대종교 중광으로 반만년 신역(神域)에 신교의 교화는 널리 전포되었으나 약육강식한 일정의 침략으로 국권을 빼앗기고 전 민족이 통한과 울분 속에서 자유를 잃고 노예생활을 당하게 됨에 신명(身命)이 다하여도 적과 싸워 망국의 치욕을 씻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적개심은 충천하였다.

▲ 백포 서일(徐一, 1881~1921) 초상. [사진출처 - 대종교]
그리하여 우리 대종교도 만주에 진출한 이래 선종사를 비롯하여 수십만 교도가 신앙을 토대로 삼고 광복운동에 나섰다. 특히 서일 종사는 지용(智勇)을 겸비하신 당세의 철공(哲工)이라 삼진귀일의 종도(倧道)를 연구하시던 붓을 꽂으시고 광복군지휘의 칼을 뽑으시었다.

개천 4368년 신해(서기 1911년)에 종사는 처음으로 거사를 도모하고 월강(越江) 입만(入滿)한 의병들을 규합하여 중광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여 본영(本營)을 길림성 왕청현에 두었다.

그러나 당시 중광단은 무기의 불비(不備)로 적극적인 활동을 취하지 못하고 정신교육과 조련에 힘쓰는 한편 동지 획득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 후 군사행동을 취하기 위하여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다시 정의단을 조직하였고 개천 4375년 무오(서기 1918년) 8월 7일에 백야 김좌진 장군을 맞이하여 정의단의 개편과 아울러 임전태세의 군정부를 편성하였다.

동 무오년 12월에 이르러 서일 종사는 교중(敎中) 동지 현천묵, 조성환, 이장녕, 이범석, 김규식, 계화, 정신, 이홍래, 나중소, 박성태 등과 협모(協謀)하여 북로군정서를 설립하고 대중의 추대로 총재에 선임되었다. 서일 종사는 본영을 국경이 인접하고 유벽(幽僻)한 밀림지대인 왕청현 서대보에 두고 항전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그러나 무기의 부족으로 고심하던 중 신화(神化)의 천은(天恩)을 입음인 지 때마침 제1차 세계대전 때 시베리아에 출병하였던 체코군의 특별한 후의로 노령 해삼위로부터 다량의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준비는 이로써 완벽을 기하게 되고 장병들의 사기(士氣) 또한 충천하였다.

당시 병력 500명(설립초기), 무기 장총 500정, 권총 40정, 기관총 3문, 각종 탄환 100만발에 군자금 10만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군정을 보강하기 위하여 각처에 정보연락기관인 경신분국(警信分局)을 두었으며 사관훈련기관으로 왕청현 십리평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양사연병(養士練兵)에 전력하였으니 당시의 사관학생 수는 400명에 달하였고 십리평 삼림중에서 거행한 제1회 사관졸업생 수는 298명이었다.

군정서는 군사훈련에 전력하는 한편 교우들의 후원으로 노령, 북만일대에 있는 각 독립단체와도 제휴하니 실로 동북만(東北滿) 광복운동의 중추기관이었으며 또 지방행정과 산업진흥에도 특별히 유의하여 지도에 힘썼으며 관하(管下) 교민 부락에 소학교와 야간강습소를 설치하여 교육사업에도 공헌한 바 컸었다.

기미년에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앞장서서 지지하였고 청산리대첩 이전부터 긴밀한 연락이 있었다.

북로군정서의 부서는 다음과 같다

총재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장 이장녕
사단장 김규식
여단장 최해
연대장 정훈
연성대장 이범석
경리 계화
길림분서(分署)고문 윤복영
군기감독 양현

사관연성소장: 김좌진
교관: 이장녕
교관: 이범석
교관: 김규식
교관: 김홍국
교관: 최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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