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시내 한 호텔에서 민화협이 주최하는 통일부장관 초청강연회가 개최되었다. 박근혜 정부 후반기의 대북정책에 대한 구상과 입장을 밝히는 자리라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인 듯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학자 출신답게 통일부장관은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잘 정리된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하였고, 5.24조치나 민간교류 관련한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유연한 입장의 느낌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대북정책 자체에서 좀 더 유연한 변화가 있기를 기대했던 입장에서 볼 때, 이날 조찬강연회는 사실 기대 이하였다. 무엇보다 과거의 햇볕정책이나 봉쇄정책을 넘어서는 공진론(共進論)으로서의 한반도신뢰프로세스에 대한 장관의 확신과 매우 유려한 논리전개에도 불구하고 그 입론의 한계가 너무 두드러져 보였다.

북한식 패턴의 악순환(?)

그가 한반도신뢰프로세스의 출발점으로 제시한 논리는 이른바 ‘북한식 패턴’의 악순환이었다. ‘도발-대화-보상-재도발’로 이어지는 이른바 북한식 패턴 논리는 지난 수십 년간 보수주의자들이 강조해온 오랜 ‘신화’들이다. 이 ‘신화’는 세 가지 주장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북한과의 협상 무용론으로 ‘북한은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협상해봐야 소용없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북한과의 협상은 그 자체가 보상이라는 주장으로 북한은 위기 모면이나 경제적 대가를 위해 협상을 강조할 뿐 그 협상에 대한 이행 약속을 파기한 것은 늘 북한이었다는 논리이다. 이런 주장들은 결론적으로 북한식 패턴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북한이 먼저 변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대화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전통적 대북강경정책의 논리가 ‘공진’을 지향한다는 한반도신뢰프로세스와 연결되는 지점은 아마 “상대의 과거 행동을 잘 기억하거나 (…) 정확하게 해석함으로써 상대방의 의도를 더욱 잘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적응 우위(adaptive advantage)에 있다”(프랜시스 후쿠야마, “신뢰의 기원”)는 대목일 것이다. 즉 북한식 패턴을 정확히 이해하여 허공에 집짓기 식이 아닌 진짜 신뢰 구축에 나서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그런데 이는 사실 신뢰에 대한 절반의 이해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신뢰는 각기 다른 근원들이 서로 연관된다는 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특히 북핵을 중심으로 한반도문제를 파악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북핵문제가 북한의 일방적 위협요인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한․미 양국과 북한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오랫동안 증폭되어온 것이라는 점을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과하고 있다.

이들은 이명박 정부 등장 이래, 특히 박근혜 정부 들어와 한․미의 대북 군사적 위협수준이 매우 공세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은 전혀 지적하지 않고 있다. 특히 올해 초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과 핵실험 중단’을 연계하면서 북한은 “합동군사훈련을 잠정 중단하면 올해 안에 한반도에서 많은 일들을 해결하는 게 가능하다”고 의미를 부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대북압박을 내세운 대규모 한미의 합동군사훈련과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은 오히려 더욱 확대되었다.

또 지난해 초의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합의된 ‘상호비방 중단의 약속’은 남에서도 대북삐라 살포와 정부 인사들의 북한 관련 발언 등으로 빛을 바랜 지 오래이다. 그리고 남북관계에서 신뢰의 기본토대가 되는 민간교류와 대북지원협력, 경제교류는 박근혜 정부 들어와 사실상 중단상태에 있다. 일부 민간교류가 추진되고 있으나, 북한은 이를 ‘대결정책을 호도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반도신뢰프로세스의 위기

박근혜 정부 들어와 고착상태로 들어가고 있는 남북대립의 구조화 양상은 신뢰가 아닌 ‘서로 다른 근본주의의 충돌’이 만들어내고 있는 산물이다.

대북정책의 근본이 되는 북핵문제와 관련하여, 한미 양국은 ‘전략적 인내’를 기조로 외부의 영향에 의한 북한의 변화 혹은 정권붕괴 등을 통해 북이 비핵화를 수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을 찾지 않고 있다. 반면 북은 2009년 2차 핵실험 이후 ‘전쟁이냐 평화냐’의 양자택일만 존재하는 ‘전면대결전’을 강조한 이래 한미 양국이 북의 핵 보유를 용인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느 쪽도 조만간에 실현될 가능성이 높지 않으며, 이런 양자택일적 상황은 타협의 부재 속에서 서로 상대방에게 고통만 가중시키는 구조적 대립을 고착시키고 있다.

문제는 후반기에 들어선 한반도신뢰프로세스가 이런 안보딜레마의 악순환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당국간 대화나 문화‧체육 등의 민간교류 활성화 등을 내세우면서 이를 ‘신뢰’의 기초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분적이든 아니든 정부 대북정책의 유연성이 증대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남북 양측의 군사적 근본주의를 유연화시키지 않는 한 안보딜레마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이는 확고한 비대칭 우위에 서 있는 한미가 긴장완화의 이니셔티브를 취해야 비로소 ‘신뢰형성’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진정한 신뢰형성을 위해서는, 교류와 접촉에서 부분적인 유연성 확대만으로 신뢰가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 군사적 대립구조를 완화시키려는 적극적 신뢰 형성의 노력이 필요하다.

북한의 핵개발과 이에 대한 한미 양국의 군사적 압박이 반복되는 ‘안보딜레마’를 풀기 위해 현재의 대북정책을 수정해야 한다는 다음과 같은 주장은 한반도신뢰프로세스의 운명과 관련해서 매우 시사적이다.

“핵문제 해결을 모든 문제에 우선하는 입장을 재검토해야 합니다. (…) 핵문제의 완전한 해결 시점을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과 남북의 공동 번영이 상당하게 진전되는 시점으로 늦춰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핵문제 해결을 너무 서두를 경우 북한의 붕괴 이외에 다른 모든 전망과 대책이 설 자리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홍석현, “한반도포럼 기조연설문”)

즉 이들은 핵문제 해결을 단계적이고 장기적인 과제로 다루되, 현단계에서는 “북한이 더 이상 핵개발을 진전시키지 않고 핵보유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수준”이 최선이며 이를 통해 ‘안보 딜레마’에서 벗어나 남북관계의 진전을 추구해나가자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북한과의 협상 자체를 보상으로 보거나 혹은 북에 대한 보상 자체를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적공(積功)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반도신뢰프로세스를 가동시키려면 적어도 이 정도의 대담한 접근이 필수적이다. 지금과 같이 ‘공진’ 등의 화려한 수사로 치장된 ‘근본주의적 접근’으로는 신뢰프로세스 원래의 취지를 펼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말의 성찬’으로만 끝나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치며

이 문제는 다가오는 광복 70주년의 남북공동행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 정부는 이 행사를 비정치적 민간교류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불편하더라도 정치성 비정치성 여부를 떠나 민간의 자율성을 보장하면서 이를 남북관계 변화의 계기로 포착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남북공동행사는 남과 북의 종교, 정당과 단체들이 참여하는 통일공론의 장(場) 으로서 기능해왔고, 그 점에서 한반도식 통일과정을 특징짓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정부가 정치성을 이유로 민간교류를 불허하거나, 혹은 아무 신뢰의 기반도 없이 비정치적 행사만을 강조해서는 남북공동행사의 의미는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이는 북도 마찬가지이다. 북은 광복 70주년 남북공동행사가 아무 소통과 변화 없는 일방적 행사가 아니라 함께 손뼉을 마주치는 행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공동행사가 남북관계 전환의 기회로 이어질 수 있다.

담대한 유연성이 ‘근본주의’를 넘어설 때 비로소 남북관계의 전환이 시작될 수 있다.

 

 
이승환은 1958년 경북 포항에 태어나, 고려대 경제학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정치학 석사)을 거쳐 경남대 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승환은 통일맞이 정책위원장, 열린정책연구원 정치아카데미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이며, 또한 민화협 집행위원장,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15년여에 걸쳐 남북 민간교류 활동을 전개해왔으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6.15남북공동행사 등을 진행해왔다.

그가 쓴 글로는 “문익환,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다”(창작과비평, 통권 143호, 2009), “6월항쟁 20년, 남북 및 북미 관계의 변화와 통일담론”(창작과비평, 통권 137호, 2008), “2000년 이후 대북정책담론 연구”(북한대학원, 2008) 등이 있다.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lsh2k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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