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5월 26∼28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서울공연 안내책자. 오른쪽 사진의 맨 윗줄 오른쪽 끝이 김주향. [자료사진 - 민족21]

▲ 2000년 5월 28일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이 마지막 서울 공연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앞줄 가운데 빨간 옷을 입은 어린이가 김주향이다. 그 왼쪽에 리진혁 학생이 서 있다.[자료사진-민족21]

유튜브(youtube)에 올라 있는 2010년 은하수관현악단의 신년경축음악회 동영상을 보고 있자니 통통한 얼굴의 한 성악가수가 나와 깊고 낮은 저음의 목소리로 <까투리타령>을 부른다.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다. 자세히 보니 2000년 서울공연에서 특유의 저음으로 <김치 깍두기>를 능청스럽게 불렀던 김주향 학생이다. 10년 전의 ‘꼬마가수’가 이제는 진짜 숙녀가 되어 노래하고 있었다.

다른 자료를 찾아보니 김주향은 금성학원을 졸업하고 왕재산예술단에 독창가수로 입단한 것으로 보인다. ‘왕재산 6중창단’의 일원으로 여러 공연에 참여한 것이 확인된다. 그가 유치원 시절부터 꿈꿨던 독창가수의 꿈을 이룬 셈이다.

남북정상회담 축하 서울공연 때 강한 인상

김주향 학생을 처음 본 것은 2000년 5월 28일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마지막 공연무대였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축하하기 위한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서울공연’이 성사되어 5월 26일부터 3일간 열렸다. 당시 최연소 단원 김주향 학생은 <김치 깍두기>를 나이답지 않은 어른스러운 음색으로 열창해 관람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 2004년 5월 27일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방문한 남측 취재진에 대답하고 있는 김주향 학생. [자료사진 - 민족21]
2004년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에서 만난 중학교 2학년 김주향 학생은 제법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는 당시 농구를 주제로 한 단독공연을 선 보였다.

-다른 분들이 많이 알아보죠?
“예.”
-수표(사인)해 달라고 막 그래요?
“네.”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고 해서 인기가 많은데, 사람들이 알아보고 반가워하고 그러면 기분이 어때요?
“좋습니다.”
-연습하고 공연하고 집에 가면 몇 시쯤 되요?
“한 6시, 7시 사이가 됩니다.”
-많이 힘들지 않아요?
“힘들지 않습니다.”
-소년궁전에서는 어떤 소조반(동아리)에 있어요?
“성악소조에 있습니다.”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요?
“앞으로 고조 독창가수가 되는 게 희망입니다.”

2005년 평양 6.15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한 남북해외의 대표들이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참관했을 때 공연에 나온 김주향 학생은 “5년 전에 서울공연에서 김치깍두기를 불렀던 김주향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유치원축전 독창공연에서 1등 차지

▲ 2007년 5월 28일 김주향 학생이 금성학원 공연에서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독창과 합창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 민족21]
만경대학생소년궁전 관계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지방에서 태어난 김주향은 유치원 1학년이던 네 살 때 유치원축전 독창공연에 나가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때 학생소년궁전의 선생님 눈에 들어 평양에 올라와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성악소조(동아리)에서 집중적으로 노래공부를 시작한다.

여섯 살 때부터 김주향 학생은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의 공연무대에 섰고, 소학교 2학년인 일곱 살에는 서울 공연을 위한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일원으로 선발됐다.

김주향 학생은 다시 만난 것은 2007년 5월 금성학원을 방문했을 때이다. 그 사이에 그는 중학반을 졸업하고 금성학원 전문부(대학반)에 진학해 있었다. 2007년 5월 11일 금성학원을 방문했을 때 그는 <백두와 한나는 내 조국>을 불렀다.

▲ 2008년 5월 15일 김주향 학생이 금성학원을 방문한 남측 방문객을 위한 공연에서 <청춘>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자료사진 - 민족21]
당시 공연에는 현재 김정은 제1비서의 부인이 된 리설주 학생도 나와 <청춘>을 불렀다. 그해 5월 28일과 다음해 5월 15일 금성학원에 다시 찾았을 때는 김주향 학생이 선배인 리설주 학생을 이어 <청춘>을 독창했다.

2005년 인천에 청년학생협력단의 일원으로 와 <청춘>을 부른 유별님 학생도 그의 선배이자 왕재산예술단의 6중창 멤버였다. 북에서는 <청춘> 노래를 독창해야 나중에 독창가수로 대성하는 모양이다.

김주향이 다닌 금성학원은 북의 예술가를 양성하는 최고의 중등교육기관이다. 학원으로 불리지만 남쪽의 학원과는 전혀 다르다. 남쪽에서 학원은 특정 과목을 가르치되 일반학교 설치 기준의 여러 조건을 구비하지 못한 사설 교육기관이지만, 북의 학원은 일반 학교의 기준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으며 특정 분야가 아니라 특정한 대상을 가르치는 전문 교육기관이다.

1980∼90년대 큰 인기를 누렸던 보천보전자악단의 가수 전혜영, 왕재산경음악단의 가수 염청 등이 모두 금성학원 출신들이다.

금성학원은 1989년 5월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이 설립된 후 이듬해 9월 금성제1고등중학교로 출범했다. 2002년 북한의 고등중학교 명칭이 중학교로 전부 바뀌면서 금성제1중학교로 잠시 변경했다가 2003년 금성학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전문부가 생기면서 7세부터 22세까지 학교에 다니게 되니 중학교란 이름이 어울리지 않게 된 것이다.

독창가수의 꿈을 이루다

2009년 3월 금성학원을 졸업한 김주향은 때마침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북한 대중음악계를 풍미했던 보천보전자악단과 왕재산경음악단을 통합해 결성한 왕재산예술단에 선발됐고, 다음해 은하수관현악단 공연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 2011년 왕재산예술단종합공연에서 <까투리타령>을 부르는 김주향 가수. [자료사진 - 민족21]
특히 2011년 4월부터 장기공연에 들어가 북에서 표가 매진돼 못 들어갈 정도로 선풍적 인기를 끈 왕재산예술단종합공연 때 그는 특유의 저음으로 <까투리타령>과 <모란봉>을 부르며 북한 대중음악계의 샛별로 우뚝 섰다. 심지어 조선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에도 그가 부른 노래를 칭찬하는 기사가 실렸다.

4살 때부터 독창가수의 꿈을 키운 끝에 19살의 나이로 최고지도자가 관람하는 음악회의 무대에 선 것이다.

지방의 이름 없는 꼬마가 북한 최고의 무대에 서기까지의 성장과정은 어렸을 때 재능 있는 아이를 발굴해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북한 당국의 정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정책의 부작용도 있을 수 있겠지만...

참고로 북의 예술가들에게는 ‘급수’가 있다. 급수는 1급부터 6급까지 나뉘어져 있다. 6급 이하는 ‘무급’이다. 음악대학을 막 졸업하고 예술단체에 들어가면 무급이다. 1년에 한 번씩 치르는 실기와 이론 시험을 통해 승급된다.

각자가 신청해서 시험을 보게 되는데 처음 들어가면 무급이지만 시험에 합격하면 6급이 되고 점차 급수를 높여서 시험을 치를 수 있다. 1~3급까지는 공훈예술가, 인민예술가와 같은 명예칭호를 받는 자격이 주어진다. 그 외 학사, 박사 칭호도 있는데 기본적으로 연주가나 작곡가 경우에 해당한다.

북의 예술가들은 정해진 ‘급수’에 따라 생활비(월급)를 받는다. 예를 들어 1급이 5,000~6,000원 정도면 6급은 대체로 3,000원 정도다. 같은 급수라고 하더라도 예술분야 기관장이나 책임자의 월급이 다소 높을 수는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급수에 따라 지급된다.

2011년 한창 독창가수로 주가를 올리고 있을 때 김주향 단원도 급수로는 5∼6급에 불과했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닥친 시련

그런데 왕재산예술단 독창가수로 대중적 인기를 모아가던 김주향에게 2013년 8월 엄청난 시련이 닥쳐왔다. 그해 6월 김정은 제1비서가 <성(性)관련 녹화물을 보지 말 것에 대하여>란 특별지시를 내렸고, 그에 따라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예술단체들에 대한 검열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검열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김정은시대에 들어와 왕재산예술단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하던 은하수관현악단의 일부 간부들이 검열에 걸렸고, 그 여파는 다른 예술단체로 급속히 확산됐다. 급기야 본보기로 은하수관현악단과 왕재산예술단이 해체되는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2000년 평양학생예술단의 서울공연에 함께 왔던 리진혁(은하수관현악단 드럼연주자), 가수 리경을 비롯해 2005년 인천육상경기 때 남북청년학생협력단으로 왔던 김수향, 류별님(왕재산예술단 가수) 등 금성학원 출신 차세대 가수와 연주자들이 하루아침에 자리를 잃어버렸다.

일부 간부 예술단원들의 ‘대형스캔들’이 터진 지 2년이 다 돼가지만 아직까지 은하수관현악단과 왕재산예술단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다른 예술단체가 결성될 것이라는 예상도 있지만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다.

다만 2011년 공연 때 김주향이 부른 <까투리타령>이 여전히 북한 언론매체에서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오랜 기간 각고의 노력을 통해 가수의 꿈을 이룬 김주향 등이 빠른 시일 안에 다시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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