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영 / 동국대학교 북한학 박사 졸업
 

▲ 개성시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만월대는 고려왕조 개국부터 멸망에 이르는 470여년 동안 왕궁으로 사용됐던 터이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산과 산맥이 유난히 많은 한반도에서 명산의 정기와 기운을 타고 영웅들이 나타났다. 백두산에서는 단군신화가 있고, 개성 송악산에는 고려 태조 왕건 탄생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태조 왕건의 4대조인 강충이 화강암으로 척박한 산에 소나무를 심어 기세를 더했고, 왕건의 아버지인 용건(혹은 융건)이 도선국사의 뜻에 따라 송악산 아래 집터를 잡은 이후, 송악산의 정기를 받아 왕건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혼란스러웠던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당연히 자신의 고향이었던 이곳을 왕도로 삼았고, 송악산 밑에 고려왕궁을 만들었다. 이후 개주, 혹은 개경, 개성이라는 공식적 지명과 함께 소나무가 많은 송악산의 영향을 받아 ‘송도’라 불리기도 했다. 이렇게 송악산은 고려와 분리할 수 없는 고려의 상징이고 운명이 되었다. 1757년 조선시대 강세황이 그린 ‘송도기행첩’에도 송악산은 개성의 남대문과 함께 중요하게 부각되어 있다.

▲ 강세황 ‘송도기행첩’
▲ 송악산 안화사

 

 

 

 

 

 

사실 송악산은 높이 약 488m로 바로 주위에 있는 천마산에 비해서도 산세가 높지 않고, 아주 수려한 경관이 아니어서 한반도 명산의 반열에 있지는 않다. 그러나 송악산은 개성을 수호해주는 산으로 고려시대 이후 현대까지 다양한 역사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고려시대 황도의 진산으로 그 아래 고려 황궁인 만월대를 품고 있고, 고려 불교국의 위상에 맞는 사찰이 있다. 만월대의 바로 왼편에는 고려 태조의 옛 집을 절로 만들었다는 ‘광명사’가 있었으나 현재는 폐찰되었고, 송악산 남쪽의 안화사가 지금까지 있다. 안화사는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안화선원’으로 창건되었고, 고려 예종 때 국가적인 대찰로 중창되어 왕이 머물던 제궁(齊宮)까지 있었던 고려시대 대표적인 사찰이다. 고려 멸망 후 오랫동안 폐사되었다가 1930년대 한차례 중창되었고, 현재는 대웅전과 7층 석탑, 1989년 북한 문화보존총국이 복원한 5백 나한전이 안치되어 있는 오백성전, 칠성전 등이 남아 있다.

1393년 7월 고려왕조가 망하고 새로 수립된 조선 역시 송악산 아래 고려황궁인 만월대 수창궁에서 시작되었지만,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이후 송악산은 개성의 쇠락과 함께 했다. 조선후기와 일제시대 개성이 상인의 도시로 자리 잡으면서도 송악산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일제시대에도 송악산 정상에는 단군 산상각과 송악산 사당, 산신량당이 있었고,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城隍), 대왕(大王), 국사(國師), 고녀(姑女), 부녀(府女) 등 다섯 신을 모신 송악산사가 있었다고 하여 주민들을 보호하는 수호 산의 역할을 꾸준히 하였다.

▲ 현재 송악산과 주변 민가
송악산이 다시 주목 받게 된 것은 해방과 남북 분단을 겪으면서였다. 급조되어 조악하기 이를 데 없었던 38선이 송악산을 지나면서 송악산 이남은 남한정부에, 이북은 북한정부의 땅이 되었다. 송악산 그 자체가 38선이 된 것이다. 때문에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개전되기 이전에도 이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국지전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사건이 1949년 5월 3일과 4일에 걸쳐 진행된 이른바 ‘송악산전투’이다.

‘송악산전투’는 남북이 모든 상대방의 월경으로 인해 개전했다고 주장하는 국지전으로 그 결과 남북 모두 군사적 피해는 물론, 성균관 일부가 파손되고 개성 선죽동 일대에서는 100명 이상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다. 남한에서는 이 전투를 ‘육탄 10용사’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한국전쟁 이전 자행되던 국지전의 일면모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남한주민들에게는 송악산은 갈 수 없는 북녘의 땅과 산을 상징하고 있다. 한국전쟁기 참전했던 분들은 되찾지 못한 아쉬움의 땅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김포 문수산과 파주 감악산, 강화 평화전망대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실향민과 통일을 기원하는 주민들은 송악산을 보기 위한 산행을 하기도 한다. 또한 속살이 보이는 송악산을 통해 어려운 북한의 경제사정과 산림파괴를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송악산은 고려 황도의 영화를 누렸고, 조선시대 배반의 땅, 도시의 쇠락과 부흥의 시간을 지켜왔으며, 한반도에서 가장 아픈 현대사의 상흔도 새겨야 했다. 이처럼 송악산은 산과 도시가 함께 역사를 만들어온 대표적인 산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미래의 송악산에는 통일한반도의 부활과 번영, 그리고 남북 주민이 함께 푸른 소나무의 맑은 바람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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