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대 / 동국대 북한학 박사수료


1998년 9월 16일부터 25일까지 여섯 번째 평양(국제)영화제(공식명칭: 제6차 쁠럭불가담 및 기타 발전도상 나라들의 평양영화축전)가 열렸다. 이번 영화제 기간은 열흘로 지난번과 비교하면 하루가 늘었다. 줄곧 이야기했지만 1990년대 북한 영화계는 제작 환경의 악화로 부진을 거듭해왔다. 영화제가 제3세계와 개발도상국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지도자의 사망, 총체적 경제난 등은 영화제 운영에 악영향을 주었다.

1990년대가 갖는 악조건 속에서도 제3차(1992년), 제4차(1994년), 제5차(1996년) 영화제는 거르지 않고 진행했다. 20세기에 마지막으로 열렸던 제6차(1998년) 영화제는 북한 내부적으로 우호적인 환경 속에서 열렸다. 북한은 영화제 개최 약 보름 전인 8월 31일에 대포동 1호(=백두산 1호, 로켓명으로는 광명성 1호)를 발사하였다. 광명성(光明星)은 북한의 두 번째 지도자인 김정일을 부르는 별칭이다. 9월 5일에는 헌법을 개정해 첫 번째 지도자였던 김일성의 공식 직함인 ‘주석제’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김정일을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추대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명실공히 ‘김정일 시대’를 축하하고, 제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영화제 개막 1주일 전인 9월 9일에는 정권 수립 50주년을 기념하는 열병식을 진행하였다.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김정일은 1994년 북한 전역에 3년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하며 최고 지도자로서의 공식 승계를 미뤘다. 이른바 ‘유훈통치’였다. 삼년상이 끝난 후 북한 당국은 곳곳에서 활력을 불어넣고자 했다. 영화제 참가 규모로 보면 ‘30여개 나라와 7곳의 국제기구에서 출품한 70여 편의 예술 및 기록, 단편예술영화’가 상영되었다. 4년 전과 비교해 참가 규모 면에서는 대략 30%가 하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축전조직위원회 측은 이번 영화제를 자신들의 축제로 만들었다.

▲ [자료사진 - 한승대]
북한 <먼 후날(훗날)의 나의 모습>은 ‘예술영화 부문’에서 최우수상인 ‘홰불금상’과 여우주연상인 ‘녀자배우연기상’을 수상했다. 또한, <천하제일봉>은 ‘기록영화 부문’에서 최우수상인 ‘홰불금상’과 ‘촬영상’을 받았다. 비록 자국에서 열리는 영화제이지만 늘 북한 영화가 주요 시상을 휩쓸지는 않았다. 과거 1987년 제1차 영화제에서 <도라지 꽃>이 ‘예술영화 부문’에서 최우수상(홰불 금상)과 여우주연상(금 연기상)을, <도적을 쳐부신 소년>이 ‘만화영화 부문’ 최우수상을, 기록영화 <조선의 사시절>이 기술상을 받았다. 11년 만의 쾌거였다.

특히, <먼 후날(훗날)의 나의 모습>은 1998년 북한 영화계에서 최고의 성과로 꼽히고 있다. 이 영화는 과거 ‘통일전망대(MBC)’에도 소개된 바 있다. 북한 자료에서는 “영화를 만든 창작가들과 배우들은 모두 신인들이지만 영화를 교양적 의의가 있게 잘 만든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영화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등에 업고 행복을 누리는 청년 ‘신준’과 백두산기슭 대홍단군에서 ‘속도청년돌격대 미장소대장’인 처녀 ‘수양’의 만남을 비중 있게 그리고 있다. ‘신준’은 과거 부모세대가 이루어 놓은 것을 탐하기만 하는 일종의 ‘한량’이다. 우연히 서로 다른 가치관을 따르고 있는 ‘수양’을 마음에 두지만 ‘수양’은 스스로 이룬 것이 없는 ‘신준’에게 따끔한 충고를 한다. 결국, ‘신준’은 자신을 반성하면서 과거 세대가 이루어 놓은 것은 굳건히 지키고, 미래를 위해 자신의 열정을 바칠 것을 다짐한다.

<먼 후날(훗날)의 나의 모습>은 북한의 청년이 가져야 할 시대적 사명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국가의 미래를 내다보라”는 것이다. ‘새세대’, ‘청년’에 대한 강조는 과거부터 있었지만 1990년대가 갖는 시대적 어려움은 보다 적극적인 청년의 역할을 기대하게 한다. 또한 영화에서 ‘신준’과 ‘수양’의 계급적 차이는 크다. 직접 드러나진 않지만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 주민 간 빈부 격차는 심화되었을 것이다. 물론 ‘신준’의 부모가 이루어놓은 재부가 자본의 확충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여전히 북한 사회는 ‘가진 자’에 대한 느슨함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북한 주민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보다 소외되고 어려운 ‘현장’에 눈을 돌릴 것을 강조한다.

다음에는 2000년 9월 13일부터 9월 21일까지 열린 제7차 평양(국제)영화제를 다룰 것이다.

▲ [자료사진 - 한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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