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 대표)


미국에서 끔찍한 테러가 일어났다. 이 때문에 머지 않아 미국의 보복 공격이 있을 모양이다. 테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었는데, 또 전쟁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 없이 목숨을 잃을까.

테러에 분노하며 보복을 다짐하는 미국인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폭력의 악순환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는 없는지 안타깝다. 왜 테러가 일어났는지 차분하게 따져보거나 앞으로는 그러한 테러가 일어나지 않도록 근본적인 테러 방지책을 모색하려는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고, 테러범을 어떻게 응징하고 앞으로 있을지 모를 테러에 어떻게 대비해야할 지에 관한 논의만 무성할 뿐이다.

많은 욕과 심한 비난을 받을지 모르지만 솔직히 고백한다. 평화학자 겸 평화운동가로서 어떠한 종류의 폭력도 단호하게 거부한다고 주장해왔지만, 더구나 뉴욕과 와싱턴 지역에 적지 않은 일가 친척을 두고 있으면서도, 이번 테러를 어느 정도 감싸고 싶은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한편으로는 참사에 비통해하는 많은 미국인들을 보면서 위로와 동정의 눈물을 글썽거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제국주의의 상징이랄 수 있는 웅대한 무역 센터와 국방부 건물이 무너지는 광경에 야릇한 통쾌감을 맛보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그 참사에 환호하는 일부 아랍인들의 모습에 얄미움이나 분노를 느끼기도 어려웠다. 저들은 미국에 무슨 일로 그렇게 응어리진 게 많고 얼마나 깊은 반감이나 적대감을 품고 있기에, 무고한 사람들이 끔찍하게 죽은 것에 애도는커녕 환호와 열광을 보낸단 말인가.

적지 않은 분석가들이나 평론가들이 언론을 통해 이를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이라고 주장하는데,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흔히 반미 감정이라고 부르는 미국에 반감이나 적대감이 아랍 지역 또는 이슬람 세력에게만 있는 게 아니고, 방법이나 규모는 다르지만 테러를 포함해 그러한 감정의 표출이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반미 감정은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기 전부터 생겨났지만, 특히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등장하면서 모든 대륙에서 분출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폭동과 테러를 포함한 반미 데모가 40여개 나라에서 170회 이상 일어났듯이, 미국은 이미 40-50년 전부터 "지구상에서 가장 증오 받는 나라"가 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만 몇 가지 든다면, 미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멕시코는 1800년대 중반 미국의 침략으로 국토의 절반을 빼앗긴 원한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으며, 미국으로부터 수십 번의 침략을 받은 중남미 아메리카의 반미 감정도 쉽게 누그러질 수 없을 것이다.

유럽에서는 미군 주둔, 저질 문화와 "양키 물질주의"의 침투, 무역 압력 등으로 반미 감정이 생겼고, 아프리카에서는 내정 간섭, 쿠데타나 요인 암살 등에 대한 CIA의 지원, 인종 차별 등으로 반미 감정이 생겼으며, 아시아에서는 미군 주둔, 베트남 전쟁, 독재 정권 지원 등으로 반미 감정이 생겼다.

그리고 반미 감정이 가장 흔하고 강하게 표출되는 중동 지역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 풀어지지 않는 한, 이스라엘을 세우고 일방적으로 지원해온 미국은 "영원한 사탄"으로 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사회에서는 1979년 이란 혁명의 성공으로 근본주의의 영향이 커지면서 아랍 민족주의와 결합된 반미 감정이 더욱 과격하게 표출되어 왔다.

이렇듯 세계적으로 반미 감정이 생기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멕시코의 한 작가 출신 외교관이 미국을 "안에서는 민주주의라도 밖에서는 제국주의며, 자국에서는 지킬박사 같은데 타국에서는 하이드씨 같다"고 묘사한데서 드러나듯, 세계적 패권을 추구하고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자리를 지키려는 오만한 제국주의 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리고 군사 분야에서부터 경제나 환경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다른 나라들과 진지하게 협상을 하기보다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일방적이고 부당한 대외 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이번 보복 공격을 통해 빈 라덴을 비롯한 테러 배후 세력을 응징하고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 테러 근거지를 초토화시킨다고 하더라도, 반미 감정을 표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테러를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을까.

한편,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반미 감정에 대해 우리는 당사자인 미국인들보다 더욱 과민하게 반응한다. 미국에 대한 당연하고 건전한 비판조차 `반미 용공`이라고 몰아세우며 말도 안 되는 사대주의적 주장을 펴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사회에서 건전한 친미 세력은 찾기 어렵고, 무턱대고 미국을 숭배하며 추종하려는 `숭미 (崇美)` 또는 `종미 (從美)` 세력이 나라를 이끌려하고 있다. 그래서 건전하게 미국의 대외 정책을 비판하려해도 `비미(批美)`가 아닌 `반미`로 취급당할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의 어떤 부분에 관해 조금이라도 호의적인 언행을 취하면 주저 없이 `빨갱이`로 매도당하며 `이적 행위`로 처벌을 받기 쉽다. 냉전 시대에나 탈냉전 시대에나 `친미 반공`의 사회 구조는 여전히 변할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반 세기 이상 굳어진 의식 구조를 바꾸기가 쉽지 않겠지만 우리도 경우에 따라서는 반미도 할 줄 알고 친북도 할 줄 알아야 되지 않을까.

온 세계가 비판하는 미국의 대외 정책을 우리도 어느 정도 비판할 수 있어야 조금이나마 종속적인 입장을 벗어나 자주적이고 건전한 한미 관계를 열 수 있을 것이요, 북한에 대해 지지해줄 만한 것은 지지해주고 받아들일 만한 것은 받아들일 수 있어야 진정한 화해 협력을 통해 평화 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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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이 재 봉 (pbpm@chollian.net)
1955년 전남 고흥 출생
1983년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정치학사)
1990년 미국 텍사스텍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석사)
1994년 미국 하와이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1996년부터 원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997년부터 경실련 통일협회 정책위원
1998년 남북 지역간 자매결연 추진을 위해 평양 방문
1999년부터 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 대표
반미주의, 평화연구, 통일문제 (한미관계, 북미관계, 남북관계) 등에 관한 논문과 저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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