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글운동

1) 국어연구와 항일운동 -이극로

▲ 고루 이극로(李克魯, 1893∼1978). [사진출처 - 대종교 홈페이지]
국어확립을 통한 항일운동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의 하나가 이극로이다. 그는 베를린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고 파리대학과 런던대학에서 음성학을 연구한 뒤 귀국하여 1929년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였다.

주시경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1921년에 결성한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조선어학회로 명칭을 바꾸고 조선어사전편찬·한글맞춤법제정·외래어표기·표준어사정 등의 굵직한 국어의 당면문제들을 추진해 나갔다. 이극로는 간사장(幹事長)으로서 사실상 조선어학회를 이끌었다.

이극로 또한 대종교를 통하여 민족의식에 눈을 뜨고 국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며 국어연구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이극로가 대종교에 입교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 시기는 분명하지 않고 1912년으로 추측된다.

1912년 만주 회인현에서 대종교를 처음 접한 이극로는 대종교의 중심인물이었던 윤세복과 박은식, 그리고 국어연구의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백주 김진(대종교에서는 김영숙으로 많이 알려짐)을 만나 이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때에 처음으로 나는 한문학 조선역사가로 이름 높은 박은식 선생과 대종교 시교사요 동창학교 교주인 윤세복 선생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날부터 여기에서 한어(漢語)를 공부하며 교편을 들며 등사 일을 하게 되었다. 또 여기 일을 잊지 못할 것은 내가 한글 연구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함께 일보던 교원 중에는 백주 김진씨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이는 주시경 선생 밑에서 한글을 공부하고 조선어연구의 좋은 참고서를 많이 가지고 오신 분이다.”

1914년 이극로는 회인현 대종교 교당에서 단재 신채호를 처음 만나 영향을 받은 듯하며, 윤세복을 따라 무송현으로 들어가 대종교 계열의 학교인 백산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이러한 만남들은 이극로의 인생에 중요한 변화를 몰고 왔다. 당시 윤세복·박은식·신채호 등과의 만남, 한글연구의 계기가 되는 김영숙과 만남은 그가 대종교적 민족주의 정서를 토대로 한글운동에 헌신하게 된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윤세복은 대종교의 절친한 동지인 백산 안희제와 함께 이극로뿐만 아니라 신성모·안호상 등을 상해로 보내 유럽 유학을 주선했다. 특히 이극로로 하여금 베를린대학에 조선어과를 설치해 전 세계에 우리 국어·국문, 그리고 우리 문화를 최초로 선전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그의 활동으로 대종교 정신을 통한 국어사랑에 초지일관할 수 있는 의지를 심어주었다.

1936년 국내에서 조선어학회를 이끌던 이극로는 그의 생에 있어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인물로 윤세복을 꼽으면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나는 선생을 잘 안다. 나에게 가장 많은 감화를 주신 어른은 단애 윤세복 선생이다. 참 숭배할 인격자다. 첫째로 철석같이 굳은 의지를 가진 어른이다. 한번 작정하신 일이면 시종여일하게 하여 가신다. 둘째로 보름달과 같이 환하고 둥근 성격을 가지신 어른이라 어디에나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시고 또 컴컴한 행동이 없다. 셋째로 담대한 어른이다. 천병만마가 덮치어도 눈도 하나 깜짝 아니하신다. 넷째로 희생적인 정신이 많은 어른이다. 억만금의 사재도 공(公)을 위하여 희생하고 폐의파립(敝衣破笠)으로 방랑생활하실 때에 삼순구식(三旬九食)을 하시어도 조금도 불편과 불만과 불안을 느끼지 아니하신다.”

이러한 관계로 이극로는 독일 유학 당시 발간한 책에서도 대종교를 소개하고 있다. 이극로는 이 책에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서술된 종교 관련 기록과 동일하게, 대종교를 가장 먼저 소개함으로써 대종교 국교관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리고 대종교가 단군에 의해 창교되어 4천여 년을 흘러 왔음을 밝히고, 알게 모르게 뭇사람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왔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그는 대종교의 종교문화 구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삼신의 거룩함」·「성지태백산」·「한얼님의 도움」 등 많은 대종교의 노래를 작사하였다.

해방 후에도 이극로는 당시 대종교의 교주를 맡고 있던 윤세복을 도와, 전강이라는 중책 맡아 대종교의 연구·교육활동에 중심이 되었다. 종학연구회(倧學硏究會) 회원으로서 활동은 이를 실천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극로가 대종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면서 그의 국어사랑의 실천과 조선어학회를 이끌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의 국어운동을 통한 항일운동의 정신적 배경은 결국 대종교로 귀착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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