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D 참가단 판문점 통과, “유엔사가 거부했다”

▲ 24일 경의선 육로를 통해 도라산 출입사무소를 거쳐 입국한 WCD 참가자들이 임진강을 따라 설치된 2km의 철조망을 따라 행진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광복 70주년이자 분단 70년을 맞아 24일 저명한 국제여성평화운동가들이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 DMZ)를 가로지르는 ‘국제여성평화걷기’(Women Cross DMZ, WCD)를 진행했지만 판문점이 아닌 경의선 도라산 출입사무소를 통해 입국했다.

‘2015 WCD 국제위원회’는 처음부터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할 것을 촉구하면서 판문점 군사분계선(military demarcation line, MDL)을 걸어서 입경하겠다고 밝히고 이의 실현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지만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다.

WCD 국제위원회와 한국위원회는 22일 보도자료를 통해 “남한정부와 유엔사령부는 판문점으로 통과하는 것은 휴전(정전)협정조약의 위반임을 강조하며 이를 허가하지 않고 있다”며 “국제여성팀은 판문점 통과에 대한 긴급회의를 열었고 다수의 합의를 통해 경의선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앞서, 통일부는 18일 WCD 한국위원회에 보낸 공문에서 “UN사와 충분한 협의를 거쳐 입국 경로는 정전협정을 존중한다는 전제 아래 과거 전례를 감안”한 것이라며 “경의선 도로를 통해 차량으로 이동한 후 남북출입사무소에서 검역 등 출입심사를 거쳐야 한다”고 제시했다. 권고라기 보다는 사실상 최후통첩이었던 셈.

국제연합(유엔)군사령부(이하 유엔사) 관계자는 19일 <통일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출입하는 문제이며, 유엔사는 관할구역인 DMZ를 건너는 상황에 대해서만 관여한다는 입장”이라며, “한국 정부의 승인이 났을 때 유엔사는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얼핏 보면 한국 정부가 WCD 참가단의 판문점 통과를 불허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사실에 맞닥뜨리게 된다. 정통한 소식통은 “우리 정부는 허가해줄까 했는데, 유엔사에서 반대한 것”이라고 확인했다.

불편한 진실, 유엔사의 DMZ 관할권
노무현 대통령도 MDL 걸어 넘어갈 때 유엔사 허가받아

▲ 2007년 10월 2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MDL을 넘어 방북하는 노무현 대통령 내외. [자료사진 - 통일뉴스]
한국전쟁 결과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에 따르면* 남북은 MDL로부터 각각 2km에 걸친 DMZ 구간을 설정하고 남측 구간은 ‘국제연합군총사령관’이 책임지도록 돼 있다.

*정전협정 제1조 10항 :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 이남의 부분에 있어서의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은 국제련합군 총사령관이 책임진다.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 이북의 부분에 있어서의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이 공동으로 책임진다.

따라서 이번 WCD 참가단이 통과하고자 한 DMZ 판문점 지역, 즉 공동관리구역(JSA)*은 전적으로 유엔사 산하 군사정전위원회가 관할권을 행사하는 지역이므로 허가권 역시 전적으로 유엔사의 고유권한에 속한다. 한국 정부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구역인 것이다.

*JSA(Joint Security Area),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상에 있는 공동경비구역. 군사정전위원회 유엔사측과 공산측(북한,중국)이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를 원만히 운영하기 위해 1953년 10월 군사정전위원회 본부구역 군사분계선상(MDL)에 설치한 동서 800m, 남북 400m 장방형의 지대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사상식사전

DMZ의 관할권 문제가 수면위로 드러난 것은 2002년 남북 철도.도로 연결사업을 추진하면서다. 당시 유엔사는 경의선과 동해선 남측 구간의 행정적 관리권을 한국측에 위임했지만 법적 관할권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음을 확실히 시위했다.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던 정세현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은 “처음 지뢰제거 작업을 할 때는 행정권(administration)을 유엔사에서 한국 국방부에 줬고, 한번 허가가 났기 때문에 작업이 끝날 때까지는 통문을 열고 들어가서 MDL 밑에서 작업하는 것은 일일이 허가 받을 필요가 없게 됐다. 그런데 지뢰 제거 확인을 위해 경계선인 MDL을 넘는 것은 정전협정 차원의 법적 관할권(jurisdiction) 문제이기 때문에 건건이 허가를 받아야 된다고 해서 애를 먹었다”고 회고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방북할 때 노란 선으로 표시한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는 이벤트를 벌였고, 이때도 노 대통령은 ‘형식상’ 유엔사의 허가를 받고서야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을 수 있었다.

이렇듯 DMZ 남측구간 전체의 관할권은 유엔사가 보유하고 있고 경의선과 동해선 통로 남측구간은 한국이 행정권인 관리권을 이양받아 운영하지만 관할권, 특히 MDL 통과에 대한 허가권은 유엔사가 보유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지금도 개성공단 출입경 내역은 유엔사에 통보돼 허가를 받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유엔총회 결의 376호와 북한 관할권
유엔사령관 요청하면 일본 자위대의 북한 상륙도 가능

▲ 판문점에서 남북 군사회담이 여러 차례 열렸지만 정전체제의 근본적인 변화에는 미치지 못했다. 사진은 2007년 5월 판문점 남측구역 '자유의 집'에서 진행된 제5차 남북장성급회담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통일 관련 치적으로 추진하고 싶어하는 ‘DMZ 세계평화공원’ 역시 유엔사의 허가 없이는 조성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유엔사의 허가를 받아 조성되더라도 인원과 물자의 MDL 통과시에는 매 건별로 유엔사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장희 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우리 헌법은 제3조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규정해 북측지역도 우리 관할권이 미치는 것 같지만, 1950년 10월 7일 유엔총회 결의는* 북측지역 관할권을 유엔이 갖는 것으로 돼 있다”고 지적했다.

* 유엔 총회 결의 제 376호 : 1950년 10월 7일, 한국전쟁의 확전을 우려한 인도 등 일부 국가가 유엔에서 38선 돌파를 반대하고 나서자 그 근거로 채택된 것이 이 결의다. ‘한국에 통일·독립·민주적 정부 수립을 위해 모든 입헌적 행위가 취해져야 한다’는 것이 골자로 유엔군의 38선 돌파의 근거가 됐다. 그러나 미군은 이미 10월 1일 38선을 돌파해 사후 명분을 부여한 셈이었다.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유엔사 사령관이 인천상륙에 성공한 뒤 평양에 입성해 민사처를 통해 평양지역을 관리했지만 이승만 대통령 역시 같은 시도를 했다가 유엔사측의 강한 견제와 제재를 받아야 했다.

‘통일전쟁론’ 발언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은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는 “유엔이 유엔군의 38도선 이북 침공을 통일전쟁으로 규정했음을 의미하는 1950년 10월 7일자 유엔총회 결의안 376호를 폐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장희 명예교수는 “개정된 미일 안보협력지침(가이드라인)에 따라 일본 자위대가 한국에 진입하려면 우리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하지만, 북한지역에 대해서는 허락받을 필요가 없다. 북한지역 관할권을 가진 유엔사령관의 요청이면 된다”고 지적하고 “한일 국방장관회담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일 양국의 국방장관은 30일부터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제14차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서 양자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정전협정에 의한 정전체제가 작동하는 이른바 ‘53년 체제’ 하에서 DMZ 남측지역은 물론 잠재적으로 북한지역까지 사실상 주한미군 사령관이 겸직하는 유엔군 사령관이 관할권을 쥐고 있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맞아 WCD 참가단이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것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절박한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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