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우리 귀에 익숙하지 않은 대종교(大倧敎)는 1909년 단군교라는 이름으로 중광(다시 일으켜 세움)한 민족 종교다. 홍암 나철(1863~1916) 대종사가 창시가 아니라 중광을 선포한 것은 단군조선 시대의 신교(神敎)로부터 이어오다 고려 중엽 몽골의 침입으로 문이 닫힌 우리 고유 종교를 다시 일으킨다는 뜻이었다.

대종교는 항일 독립운동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 시기에 중광한 대종교는 항일 독립투쟁으로 일관했고, 일제하 36년 간 무려 10만여 명의 순교자를 냈다. 홍암 나철 대종사가 유신회를 조직, 을사오적 처단에 나선 것을 비롯해 ‘무오독립선언서’ 발표, 대종교도들이 주축을 이룬 북로군정서의 ‘청산리독립전쟁’ 승리와 ‘조선어학회 사건’ 등은 일제시기 대표적 항일운동 사례로 꼽힌다.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맞아 <통일뉴스>는 대종교 측에 대종교의 민족독립운동 연재를 요청했고, 최경주 대종교 교화사(성직자)가 기존 연구 성과를 정리, 작성해 연재가 이루어졌다. 대종교의 관점에서 기술됐고, 고유한 어투로 서술된 점을 참작해 잊혀진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함께 여행해 보자. 매주 화요일 23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편집자 주
 



대종교의 문화항쟁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국어와 국사 확립을 통한 저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 집단에 있어 국어와 국사는 그 집단의 철학·사상과 더불어 정체성을 지탱하는 핵심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1. 한글운동

1) 국어연구와 항일운동 –주시경과 김두봉

훈민정음 창제는 우리 민족문화의 찬란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한말까지도 국어로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 사회구조와 밀접한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대부분 사대부들은 국시(國是)인 유교적 정서로 말미암아 한문으로 소양을 쌓고 그것을 통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등 사회적인 입지를 굳건히 하였다.

이들에게 한문은 한시((漢詩)처럼 유희나 망중한을 해소하는 매체이면서, 학문이나 정치·사회활동 등 모든 지적 활동의 중요한 도구였다. 이러한 지적 구조 속에서 중국과 정치·사회적 역학 구도와 맞물려 한문숭상주의는 당연히 득세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훈민정음은 그러한 구조적 벽에 걸려 언문(諺文)으로 폄하되어 평가받지 못했다. 이러한 정서는 한말까지도 언문 혹은 아녀자들이나 쓰는 ‘암글’이라고 평가하는 등 우리글에 대한 긍지를 심지 못했다.

우리글의 의미를 민족문화 반열 위에 내세운다는 것은 이러한 인식의 틀과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먼저 정신적으로는 유교적 사대모화사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어문을 통한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기득권을 가진 지식층의 한문 한자를 청산하고 민중보편적인 우리글 확립을 조직적으로 도모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 한힌샘 주시경(周時經, 1876~1914). 대종교로 개종했으며, 우리글을 '한글'로 명명했다. [사진출처 - 대종교 홈페이지]
이러한 혁명적인 변화의 선각자가 바로 한힌샘 주시경이다. 물론 1905년 신정국문(新訂國文)실시를 주장했던 지석영도 대종교 입교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종교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기록이 있다. 하지만 주시경이야말로 우리글의 명칭을 ‘한글’이라고 처음 명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1914년 7월 27일 임종하기까지 한글을 통한 언어민족주의와 한글 대중화를 위해 헌신했다.

주시경은 국어학자인 동시에 국어를 통하여 민족혼을 불어넣은 국어운동가였다. 주시경의 국어연구와 운동을 이해함에는 그의 정신적 배경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주시경은 배재학당을 졸업하면서 예수교 세례를 받았지만 이를 과감히 버리고 대종교로 개종하였다.

이유는 무력침략보다 정신적 침략을 더 무서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이미 정신적 침략을 받은 것으로 단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대사상이 종교침략의 결과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대종교로 개종하는 용단을 내렸다. 그러므로 주시경의 한글운동의 배경에는 철저한 단군민족주의적 정서를 토대로 한 언어민족주의적 가치가 지탱하고 있었다.

▲ 백연 김두봉(金枓奉, 1889∼1961?). 독립운동가로 유명하지만 대종교 상교이자 한글학자이기도 했다. [사진출처 - 대종교 홈페이지]
주시경의 국어정신을 계승한 대표적 인물이 김두봉이었다. 그는 주시경이 『우리말본』을 짓고 가르치는 일에 온 정성을 다하는 동안 사전 만드는 일에 온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1914년 주시경이 세상을 떠나자 스승이 못다 한 일을 이어 받아 『조선말본』을 저술하였다. 『조선말본』은 그 때까지 발표된 문법학설로는 가장 깊고 넓게 연구된 대표적 저서라는 평가를 받았다.

김두봉은 스승 주시경으로부터 대종교적 민족주의 가치관도 계승받은 듯하다. 그는 1916년 나철의 구월산 봉심(奉審)에 수석시자(首席侍者)로서 동행을 했다. 당시 나철은 6명의 시봉자(侍奉者)를 대동하는데, 그 중에서 김두봉은 교질(敎秩: 대종교 믿음의 단계)이 가장 높은 상교(尙敎)의 위치에 있었다.

한편 김두봉은 상해 시절에도 개천절 경축회 석상에서 개천절에 대한 역사를 해박한 지식으로 기술하였다.

“오늘은 단군께서 우리나라를 처음 세우신 건국기념일이라. … 독립을 선언한 지 올해까지 3년 동안 국경일로 지냅니다. 이제로부터 13년 전에 대종교 곧 단군이 세우신 종교가 부흥하게 됨으로부터 그 교중(敎中)에서는 이 날을 기념하여 … 단군이 건국하신 후 단군조는 물론이고 그 뒤를 계승한 역대의 모든 나라들이 다 단군의 건국위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월일을 택하여 성대한 의식을 거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역대로 그 기념의 명칭과 의식과 그 월일의 차이는 불문하나, 단군을 건국시조라 하여 그를 불망함이 건국을 기념함으로 생각함은 역대의 공통된 정신으로 볼 수 있으며 … 교조로 신봉하여 기념함도 사실이었습니다. 명칭으로 말하면 삼한의 천군제라던지 부여의 영고회·예의 무천회·기씨箕氏의 보본제報本祭·고구려의 동맹회·신라의 태백산사太白山祠·백제의 사중제四仲祭·발해의 단계축檀戒祝·요遼의 군수제君樹祭·금金의 장백산책長白山柵·고려의 삼성사제三聖祠祭·조선의 숭령전제崇靈殿祭등이 이명동체의 기념이올시다. 의식으로 말하면 삼한, 부여, 예, 고구려 등 모든 나라에서는 전국의 공동거행으로 삼한은 대표자를 선출하여 국읍國邑에 제祭하고 그 남아 세 나라는 민중이 회집영축會集頒祝하였으며, 기씨箕氏·신라·발해·요금遼金·고려·조선 등 모든 나라는 국군國君이 친제親祭하거나 혹 강향대제降香代祭하였습니다. …”

김두봉의 대종교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김두봉은 조선어학회 활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조선어사전편찬사업의 추진 과정에서, 김양수를 통하여 내린 지시에서 다음과 같이 정신적인 측면과 함께 국어를 통한 항일정신을 강조함으로써 국어운동에서 그가 중시하고자 했던 요소가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한갓 조선어문의 연구 또는 사전편찬은 민족운동으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고 연구의 결과, 정리 통일된 조선어문을 널리 조선 민중에 선전 보급함으로써, 처음으로 조선 고유문화의 유지 발전, 민족의식의 배양도 기할 수 있으며 조선독립의 실력양성도 가능한 것이니, 다음으로부터 이와 같은 방침으로 진행하라.’

그에게 한글은 조선 고유문화를 유지·발전시키는 원천이자 민족의식을 배양하는 밑거름이었다. 이러한 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김두봉이 일찍부터 대종교에 입교하여 활동했음은 물론 대종교에서 역할 또한 중요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곧 국어사랑은 한국독립을 추진시키는 ‘에너지원’이나 다름없었다.

김두봉을 평가할 때, 조선적인 것은 무엇보다 사랑하고 자랑하고 싶은 민족애에 사로잡힌 사람으로서, 종래의 역사 관념을 그대로 계승하여 배달민족으로서 조선인의 긍지를 가진 완고한 국수주의자라고 말한다. 또한 대종교에 종사한 이론가이면서 과학적 혁명이론으로 무장한 역전의 투사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민족혼을 되살리기 위해 대종교에 심취하여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려고 꾸준히 노력했던 인물임을 확인해 볼 때, 그의 국어사랑과 나라사랑의 정신적 배경 역시 대종교에 있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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