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겸 / 동국대학교 북한학 석사 졸업
 

앞으로 북한지명을 다루는 데 참고할 자료인 『조선향토대백과사전』(이하 『향토대백과』)에 대해 우선 소개한다. 『향토대백과』는 2000년대 초반 남북 교류협력사업의 일환으로서 북한 각 지역의 지명, 자연, 역사, 사회·경제, 민속 등을 망라해 편찬되었다. 총 20권의 방대한 백과사전으로 북한 각 지역의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 지리학적, 민속학적 ‘총서’라 할 수 있다. 남한의 평화문제연구소와 북한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공동 편찬하였으며, 공동저자가 1,000여명에 이른다.

2004년 간행된 『향토대백과』 편찬 실무사업은 2001년에 시작되었지만, 이 방대한 편찬사업이 불과 3년 만에 완성된 것은 물론 아니다. 북한은 1966년부터 국가적으로 ‘조선지명총정리사업’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 북한의 지명유래와 지방사, 민속 등을 다룬 『고장이름사전』(2000년, 총10권)이 출간되었다. 이 『고장이름사전』이 『향토대백과』의 모체이며, 여기에 사진, 지도 등 최신자료를 반영하고 남북한 간의 협의와 수정을 거쳐 『향토대백과』가 출간되었다.

『향토대백과』는 최근의 자료 중 북한 지리정보에 대해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자료라 할 수 있으며, 이를 자료로 삼아 북한의 지명유래를 살펴본다. (부산대학교의 김기혁 교수는 『향토대백과』, 『고장이름사전』, 『조선지명편람』(2002년 북한 편찬, 총10권) 등 최근에 발행된 북한지명 관련 자료들이 구성만 다를 뿐 내용은 유사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평양의 지명유래

우선 북한의 수도인 평양의 지명유래를 살펴보겠다. 원래 평양(平壤)이라는 지명은 우리 고유어인 ‘부루나’를 한문으로 옮긴 것이다. ‘부루나’는 ‘평평한 땅, 벌판의 땅’을 의미하며, 예로부터 평양 일대는 벌판이 많고 땅이 기름지며 강을 끼고 있어 교통도 편리한 지대였다고 한다. ‘부루나’를 다르게 옮겨 ‘평천’ 혹은 ‘평나’라는 명칭도 있었다. 또한 평양은 예로부터 버들이 우거지고 꽃이 만발하고 풍치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른 봄에 버들가지가 늘어지고 갖가지 꽃이 피어나, 버들이 우거진 수도라는 뜻에서 ‘류경’(柳京)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유명한 류경호텔의 명칭도 이로부터 유래한다.

『향토대백과』에 의하면 고조선, 고구려, 고려, 조선 등 한반도 역사 대부분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는 고조선시기 평양을 ‘왕검성’이라 부르기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시조왕이 도읍한 성시라는 의미이다. 고구려 초기에는 평양에 평양성, 대성산성, 안학궁을 건설하여 남방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다. 고구려가 삼국통합정책을 추진한 후로는 평양이 수도가 되었지만, 통일신라시기에는 변방지역이 되고 만다. 고려시기 들어서는 서쪽의 수도라는 의미에서 ‘서경’(西京) 혹은 ‘서도’(西都)라 불리며 중요시 되었다. 태조 왕건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으며, 고려 전 기간 동안 제2의 수도라 할 만큼 중요한 도시였다. 조선시기에는 서북지방의 중심지로서 평양부를 두고 중요시 했으며, 1930년대 일제시기에는 공업이 발달해 인구가 늘어났다.

이러한 역사관에 대한 진위 여부는 일단 차치하고, 북한은 위와 같은 평양 중심의 역사를 강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평양시는 그들 표현대로 북한 ‘혁명의 수도’이기 때문이다. 1946년 9월에 이미 평양시는 수도이자 특별시로 지정되었으며, 현재까지 북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위에서 언급한 평양성, 대성산성, 안학궁(터) 등을 중요한 역사문화재로 삼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 대성산성(소문봉성벽)
자료: 『조선향토대백과사전』
▲ 안학궁터
자료: 『조선향토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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