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두 번째인 42년여를 옥중에서 보낸 비전향장기수 안학섭 선생이 29일 <통일뉴스>와 긴급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차라리 옥중에서 죽는 것이 내 일생 산 것에 비출 때 남아답고, 또 일생 산 것에 대한 마지막 보람있는 죽음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노벨평화상을 받고 남아프리카 최초의 유색인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전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27년이라는 장기 수형생활로 세계인의 가슴에 각인돼 있다.

그러나 1953년 4월초 투옥돼 1995년 8.15 광복절 특사로 42년 4개월여 만에 출감한 비전향양심수 안학섭(86세) 선생은 “차라리 옥중에서 죽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안학섭 선생은 2000년 6.15공동선언 덕으로 북한으로 송환된 43년 수감생활을 한 김선명 선생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긴 수형생활을 한 공인된 비전향양심수이고 고령자이지만 대한민국은 그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고 있다.

29일 오후 3시 서울 경복궁 인근 한 커피숍에서 만난 안 선생은 “3일 전에 처가 전화를 했는데, 경찰서에서 경고장이 왔다고 하더라”며 “착잡하고, 빈총도 안 맞는 것이 낫다고 마음이 불편하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강화도에 거주하고 있는 안 선생은 지난 18일 서울에 와서 다음달 1일 노동절 행사에 참석한 뒤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 2007년 스승의 날에 열린 부산지역 장기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행사에서 꽃을 받고 있는 안학섭 선생. [자료사진 - 통일뉴스]
안 선생은 “3개월에 한 번씩 보안관찰법에 따라 (동향)보고를 하게 돼 있는데 하지 않았다고 오늘까지, ‘29일까지 당 지서에 보고하지 않으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만원 이하의 벌금 물릴 수 있다’ 그러니까 보고하라. 그런 경고장을 보내왔다”며 “이것이 민주사회인지, 아니면 봉건 시대로 되돌아간 건지”라고 탄식했다.

보안관찰법은 이미 형기를 마친 ‘보안관찰대상자’들에게 ‘보안관찰처분’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법은 1975년 박정희 정권 때 제정된 사회안전법이 1987년 폐지되면서 하위지침인 보안관찰이 1989년 보안관찰법으로 대체 제정됐고 대표적인 폐기대상 악법으로 꼽힌다.

보안관찰법 제18조 신고사항에는 △3월간의 주요활동사항 △통신·회합한 다른 보안관찰처분대상자의 인적사항과 그 일시, 장소 및 내용 △3월간에 행한 여행에 관한 사항 △관할경찰서장이 보안관찰과 관련하여 신고하도록 지시한 사항을 3개월 단위로 신고하도록 돼 있다.

2010년 6.15공동선언 10주년에 정부 승인 없이 방북했다가 3년 실형을 살고 나온 한상렬 전주고백교회 목사는 이 신고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2014년 8월 체포돼 구치소에 구금되기도 했고, ‘일심회’ 사건 관련자 최기영 씨는 80만원 벌금을 납부하지 않아 지난해 7월 5일간 강제노역을 선고받고 서울남부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 안학섭 선생은 86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보안관찰대상자로 관리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안 선생은 “그동안 나를 담당하는 경찰이 여럿 바뀌었는데, 여러 가지더라”며 “만나자는 것 만나주지 않았다. ‘당신 만날 필요 없다. 나 여기 건재한 것 알면 되지 난 부담된다’고 거절했다”고 말했다.

경찰 담당자는 지난해 8월경 강화도 집으로 찾아온 적이 있고,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왔지만 만나주지 않았고, 한달 전쯤에도 만나자는 전화가 왔지만 거절했다고 밝혔다.

안 선생은 “내가 (감옥에서) 나온 지 20년 됐는데, 자기들이 잡아넣지 않은 걸로 봐서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이라며 “뻔히 알면서 왜 자꾸 전화질하고 사회보안관찰에 묶어서 자꾸 괴롭히느냐”고 반문하고 “애들은 연못에 돌 던지고 웃지만 연못 개구리는 치명적인 타격”이라고 하소연했다.

2013년 10월 부산에서 강화도로 이사한 당일, 경찰이 이사짐 차량을 가로막은 일부터 시작해 경찰은 일일이 행선지나 동향을 캐묻고 있다. “서울에 있을 때는 경찰이 그렇게 괴롭히지 않았고, 부산에서도 그러지 않았다”는 것.

보안관찰법에 의거한 경찰의 감시와 보고 요구도 괴롭지만 친척과 주변 사람들의 눈초리도 안 선생을 괴롭히는 또 다른 요인이다.

감옥에서 나와 할아버지 대부터 살아온 고향이자 친인척들이 살고 있는 강화도로 인계됐지만 이들은 안 선생의 전화 한통까지 감시하는가 하면, 농사일에 대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아 “사실 도망나왔다”고 한다.

서울로 ‘탈출’한 뒤 사기사건에 휘말려 집을 잃고 지인의 호의로 부산에 거주하다 다시 강화로 돌아왔지만 친인척들의 싸늘한 눈초리는 여전했고, 여기에 더해 재산분배를 둘러싼 험악한 분위기는 안 선생에겐 여간 고역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농사 초보자인 선생이 동네 농부들에게 자문을 구하려 해도 이웃들은 곁을 주지 않는다. “이웃에서 나를 상당히 경원해 한다. 나를 만나기를, 말하기를 꺼려한다”고 선생은 애써 담담하게 말하지만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안 선생과 함께 고초를 겪고 있는 30살 연하인 부인 이혜경 씨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친척의 도움으로 한방 치료를 받고 있다.

▲ 인터뷰에는 비전향장기수 김영식 선생(왼족)이 배석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안 선생은 “나는 사실 어려서부터 (조국을 위해) 일생을 바쳐온 사람이다”며 감옥에서 본 “발붙일 곳 없는 벼랑에 매달려서 살겠다고 바둥거리느니 차라리 손을 놓는 게 낫지 않겠는가”라는 한시가 자꾸 생각난다고 답답한 심경을 내비쳤다.

42년여의 반생을 감옥에서 보내고 난 뒤 20년의 세월동안 마음 편할 날 없이 살아온 선생의 마지막 말이 자꾸 목에 걸리는 것이 기자의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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