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과학자이자 인문과학 저널리스트인 울리히 슈나벨(Ulrich Schnabel)은 저서 『휴식-행복의 중심』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속도와 성과만을 강조하는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속병을 앓고 있다고. 휴식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라고.

취업을 못해도, 그리고 취업을 한다 해도 늘 불안한, ‘요람에서 무덤까지’ 결코 편안할 수 없는 우리 사회에서, 어쩜 ‘휴식’은 팔자 좋은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휴식이란, 저자의 지적처럼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나 ‘자유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과 만나는 시간”, 이것이 저자가 정의하는 휴식의 본래 의미다. 그렇담 우리는 평생 제대로 된 휴식을 얼마나 하며 살아갈까.

 

▲ 윤성학,『돈의 생태계』, 푸른영토, 2014.12, 316쪽, 전 3권 각 12,000원. [자료사진 - 통일뉴스]

저자는 이런 말도 하고 있다. 제대로 휴식할 시간 없이 과도하게 일하다 보면 창의성, 효율성 등은 점점 우리 곁을 떠나게 된다고. 피곤에 절어 미쳐버리겠는데, 창의성이 강림하실 리 없다. 때문에 정부가 말하는 ‘창조경제’ 역시 지금과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단순 구호로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아, 이미 그러고 있나? 다가오는 미래는 ‘상상력’의 시대라는데, 우리는 상상력 멸종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살기 위해 미치도록 바쁜 대한민국은 때문에 상상력이 절대 빈곤하다.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에 대한 상상력도 빈곤하고, 아이들의 밥 한 끼를 보는 눈빛도 무참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엔 저자가 모르는 단 하나의 예외, 열외가 존재한다.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북한이다. 북한에 대한 무궁무진한, 아니 어마무시한(!) 상상력은 그야말로 육갑자 이상의 내공을 보여준다. 오죽하면 평범한 탈북자들이 탄성과 탄식을 동시에 내지르겠는가!

종편을 보면 거의 24시간 북한과 관련된 다채로운 소설을 즐길 수 있다. 도대체 이해불가한 이들이 당최 이해불가한 이야기들을, 정말 소설처럼 늘어놓는다. 그리고 끝도 없다! 기가 막힌 네버엔딩 북한 스토리는, (전문가라는) 비전문가의 입을 통해 시작되고, (방송이라는) 차마 방송이라 부르기 민망스러운 도구를 통해 전파된다. 그리고 그것을 시청하는 선량한 시민들은 그 소설을 이내 현실로 인식한다.

예를 들어 자강도, 양강도 등 지방 출신의 탈북자가 평양의 사정을 마치 손바닥 들여다보듯 이야기하고, 심지어 권력층 내부의 은밀한(!) 속사정까지 소개한다. 한두 번 평양에 다녀왔으면 ‘평양출신’ 전문가가 된다. 핵심으로 남쪽으로 오신지 꽤 되었다! 이쯤 되면 매직이다. ‘상상력의 극한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방송들. 그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두둥! 이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이런 북한에 대한 ‘상상력’은 적대감, 증오를 밑절미에 둔 그것이다. 북한을 비정상적인 집단으로 규정하고, 그 틀 위에서 증오의 상상력을 발휘한다. 끝내 무찔러야 하는, 끝내 굴복시켜야 하는 대상인 북한에 대한 상상력은 때문에 서글프고 무참하다.

솔직히 말하자. 우리는 지금까지 북한에 대해 단편적인, 일방적인 상상력만을 허용해온 것 아닌가. 남북교류협력법과 국가보안법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북한에 대한 증오의 상상력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감히 상상치 못해온 것이 아닌가. 이런 상상력의 빈곤 또한 울리히 슈나벨이 말한 휴식의 부족 때문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남북관계에서만큼은 오히려 진정한 휴식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내면과의 대화 말이다.

이제 책을 말하자. 윤성학의 『돈의 생태계』는 대한민국에서 북한을 상상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른 바 ‘야매’가 아닌 출처(!)가 분명한 진정한 의미의 상상력이 무엇인지 느끼게 된다. 오호라, 어지러운 강호에 비로소 절대고수가 등장한 것인가!

모두 세 권으로 이뤄진 소설은 그 만만치 않은 양에도 불구하고, 마치 무협소설을 읽는 듯 착각에 빠질 정도로 쉽게 읽힌다. 한 마디로 재미지다! 남한에서 주식시장을 어지럽히며(!) 능수능란하게 작전을 펼쳐온 애널리스트 김종근이 우여곡절 끝에 북한에 들어가게 되고, 무려 장성택의 경제정책 자문 역할을 맡게 된다. 그는 북한의 인민들을 잘 살게 하고픈 장성택의 진정성을 받아들이고, ‘돈과 인심’으로 체제를 바꾸겠다는 야망을 품게 된다. 아, 스케일부터 장난 아니다.

소설 전체를 통해 저자의 내공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국내 주식시장 이면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북한 정치와 사회 변화 모습 또한 극히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사회주의 체제전환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저자이기에 가능한 놀라움이다. 아울러 기성 소설가 못지않은 필력은 ‘북한 관련 책들은 재미없다’는 통념을 그대로 무너뜨린다. 통쾌한 액션과 가슴 아픈 러브 스토리 그리고 김종근과 김정은 간의 치밀한 두뇌 플레이 등 소설이 갖추어야 할 재미를 100% 이상 챙기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재미있는 북한 관련 소설은 지금껏 목격하지 못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책을 통해 느낀 가장 큰 감동은 다름 아닌 주인공 김종근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저자의 북한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정이다. 아, 말조심해야지. 북한 인민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정이다! 그는 증오의 상상력 대신, 공존과 평화, 화해와 통일을 꿈꾸며 상상력을 발휘했다. 때문에 그의 글에는 서슬퍼런 칼날보다는 사람들 간의 끈끈한 정과 사랑이 더 돋보인다.

혹자는 김정은 위원장을 부정적으로 표현했다거나, 반대로 장성택을 너무 미화했다는 점 등을 들어 작품을 비판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제발 안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상상력을 통제할 수 있다는 발상, 우리까지 할 필요는 없다. 소설은 소설이고, 현실은 현실 아닌가. 현실과 소설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얼마나 피곤한가.

누군가 줄기차게 외치는 ‘잃어버린 10년’을 제외하고 오랫동안 남북은 상대에 대한 증오의 상상력만을 허용해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존을 이야기하고, 평화와 화해, 통일을 말한다는 것은, 정치적 선전 외에 그 어떠한 진실성도 찾아보기 힘들다. 상대가 나를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불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대화와 타협의 장으로 나오기는 쉽지 않다. 남북 모두 마찬가지다.

때문에 당장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통일 대박’을 공허하게 외치기보다는, 자유롭게 북한 상상하기 연습을 먼저 할 필요가 있겠다. 이는 북한으로 인해 먹고 사는 보수 언론과 전문가들이 먼저 해야 할 것이다. ‘다양한 상상력으로 그대들의 영역을 확장하라!’ 정도? 물론 문화예술인들도 마찬가지다. 소재의 빈곤을 당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제 증오와 불신보다는 공존과 이해를 위한 상상하기를 함께 하자고 살짝 권장한다. 누구를 미워하는 것만큼 피로한 일도 드물다. 줄기차게 미워하기란 그야말로 초인적인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하다. 이제 좀 잠깐 쉬자!

예전엔 남북관계가 냉탕과 온탕을 왔다 갔다 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지금은? 전부 얼어 죽었다. 그런 와중에 6.15공동선언 15주년과 광복 70주년을 남북이 함께 기념하기란 여간해선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벌써부터 포기하진 말자. 우리 모두 뜨거운! 상상력으로 다시 한 번 함께 모여 제대로 기념 한 번 해보자.

올해는 얼어 죽지 말자.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