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교수)

 

지난 5일 아침 출근길 라디오뉴스를 통해 주한미국대사의 피습 소식을 들었다.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한 방송사에서 인터뷰 요청을 해왔다. 바쁘다며 거부하자 “다른 반미 전문가”를 추천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반미’에 초점을 맞추고 사건을 해석하려는 것이었다. 맞다. 우리나라에서도 ‘반미 테러’가 일어난 것이다.

이를 두고 <한겨레>는 ‘습격’인지 ‘테러’인지 국어사전까지 동원해 차별하려 애썼다. 부질없는 짓이다. 습격도 되고 테러도 되는 것 아닌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종북 테러’로 규정했다. 청와대-새누리당-정부가 서둘러 ‘종북 세력의 범행’으로 결론 내린 터다. 미국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면 북한을 추종하는 것이라는 억지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나는 <반미 테러: 지구촌의 반미 감정>이란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반미 감정은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기 전부터 생겼다. 세계 모든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 쌓여왔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등장하면서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증오 받는 나라가 되었다. 1787년 네덜란드에서 세계 최초의 반미 폭동이 일어난 이래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폭동과 테러가 발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45년 8월 미국 주도의 분단과 함께 반미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엔 광주항쟁을 계기로 광주와 부산의 미국문화원이 불탔다. 대구의 미국문화원엔 폭탄이 떨어졌고, 서울의 미국문화원은 점거 당했다. 그리고 이번에 남북관계 개선을 가로막는 미국을 대표하는 인물이 칼에 베였다.

세계에서든 한국에서든 반미 ‘시위’나 ‘폭동’ 또는 ‘방화’나 ‘테러’는 대개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저항이다. 미국은 1945년 이후 지금까지 100번 안팎의 폭격과 침략 또는 전쟁을 일삼아왔다. 유엔도 말리지 못하는 세계 최강대국의 가장 크고 끔찍한 ‘위로부터의’ 폭력에 약소국들 또는 피압박 민족들이 ‘아래로부터의’ 폭력으로 맞서온 것이다.

그러기에 주한미국대사의 피습에 통쾌함을 느낀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한 성직자는 “최근 미국 국무부 차관의 한.중.일 과거사 관련 발언에 깊은 상처를 받았는데, 폭력을 두둔해서는 안 되겠지만 솔직히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한 원로 교수는 아예 “애국자 김기종의 리퍼트 공격”을 환호했다. 9.11 직후엔 나도 그랬다. 한 신문에 “테러를 어느 정도 감싸고 싶다”면서 “테러에 환호하는 아랍인들에게 얄미움이나 분노를 느끼기 어렵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미국은 분명히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라는 가장 큰 폭력을 가장 많이 행사해온 나라다. 한반도에서는 중국을 포위하고 견제하기 위해 다양한 폭력을 구사하고 있다. 우리는 당연히 이에 맞서야 한다. 중국을 포위하기 위한 ‘사드’라는 미사일방어망을 남한에 배치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을 자극하며 남북관계의 진전을 방해하는 것을 비판해야 한다.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일본의 역사왜곡에 눈감고 한미일 공조를 강화하자는 압력엔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거대하고 구조적인 폭력에 물리적 폭력으로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제하에서 민족해방 운동을 할 때처럼 폭력은 더 이상 효과적인 저항 수단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작은 폭력은 큰 폭력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테러라는 폭력으로 전쟁이라는 폭력을 물리치기 어렵기도 하다.

습격이든 테러든 폭력이 정당성을 지니거나 다수의 지지를 얻으려면 저항의 ‘마지막 수단’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강도나 강간을 당할 처지에 놓였을지라도 무턱대고 상대를 총칼로 쓰러뜨리는 것은 범죄일 수 있다. 애원이나 호소를 해보기도 하고, 설득이나 회유를 해보기도 하고, 뿌리쳐보거나 도망쳐보기도 하는 등 모든 비폭력 수단을 강구하는데도 자신의 재산이나 목숨 또는 순결을 더 이상 지키기 어려울 때 칼로 찌르든 총으로 쏘든 ‘정당 방어’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독재정권은 폭력적 저항을 기대하기도 하고 이끌기도 한다. 그를 빌미로 탄압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한미국대사에 대한 테러를 기다렸다는 듯 ‘종북 세력’이 저지른 것으로 단정하고 국가보안법을 들먹거리며 배후를 캔다고 하지 않은가. 대중이 모인 곳에 사제폭탄을 터뜨린 10대 고등학생의 테러엔 침묵을 지키거나 옹호하기도 하고 그 배후를 조사하라는 요구조차 외면했던 세력이 개인을 상대로 칼을 휘두른 50대 폭력 전과자의 테러엔 온갖 호들갑을 떨며 북한이나 야당과의 연계를 찾겠다고 나서는 배경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진보 세력에게 감히 부탁한다. 미국을 한반도 평화의 걸림돌로 인식하고 비판하며 저항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테러까지 옹호하거나 지지하는 것은 곤란하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질환을 지닌 김기종 씨를 동정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를 영웅으로 미화하거나 그의 테러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보수 세력이 10대 테러 소년을 ‘애국 열사’나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미친 짓을 하더라도 진보 세력은 달라야 한다. 진보세력이 물리적 힘은 없거나 약해도 양심과 도덕적 측면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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