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영(겨레말큰사전 선임연구원)


이번 설은 주말이 바로 이어져 여느 때보다 긴 연휴였다. 그래서인지 고향을 찾은 가족, 친지들의 움직임에도 여유가 묻어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여유가 늘 복이 되지만은 않는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난 기쁨도 잠시일 뿐, 대개는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이겠지만 서로의 근황을 묻고 이러저러한 충고를 하고 듣다 보면 어느새 ‘말은 적을수록 좋다’라는 속담을 떠올리게 된다.

오랜만에 모인 이때를 맞아 ‘섣부른’ 충고와 시비를 일삼는 것은 서로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성싶다. 진정 어린 그 마음이 곧이곧대로 전해지기도 어려운 일이며, 그 마음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노릇일 것이다.

이 ‘섣부르다’의 표기가 남과 북에서 같지 않다. 남에서는 ‘섣부르다’로 쓰고 북에서는 ‘서뿌르다’로 쓴다.

{섣부르게} 아는 것은 아예 모르니만 못한 것이야.《박태순: 어느 사학도의 젊은 시절》(남)
고지식한 소년은 모든 잘못이 자기의 {서뿌른} 탐사 때문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장수근: 광산후보지》(북)
{섣부르게} 품은 희망 또는 욕망은 마음을 얼마나 아프고 쓰리게 하였던가.《허련순: 바람꽃》(연변)
{서뿌른} 일본말만 지껄이는 가네무라란 교장은 학교에 오자마자 그래도 그만한 례절은 아는 모양인지 강 교장을 찾아 인사를 하였다.《김창걸: 강교장》(연변)

남에서는 한글 맞춤법 제29항 “끝소리가 ‘ㄹ’인 말과 딴 말이 어울릴 적에 ‘ㄹ’ 소리가 ‘ㄷ’ 소리로 나는 것은 ‘ㄷ’으로 적는다”에 따른 것이다. ‘반짇고리(바느질+고리), 사흗날(사흘+날), 섣달(설+날), 숟가락(술+가락), 잗다듬다(잘-+다듬-)’와 같이 단어가 만들어질 때 앞말의 끝소리 ㄹ이 ㄷ으로 바뀌는 경우가 있다. 이는 역사적인 변화 현상으로 이미 ㄷ으로 굳어져 쓰이는 단어의 경우 바뀐 형태를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과 관련된 북의 맞춤법 규정에는 제17항 “합친말에서 앞말뿌리의 끝소리 <ㄹ>이 닫김소리로 된 것은 <ㄷ>으로 적는다”가 있다. 이 항에서 ‘나흗날, 사흗날, 섣달, 숟가락, 이튿날’과 같이 단어가 만들어 질 때 ㄹ 소리가 ㄷ으로 바뀌어 나는 경우 ㄷ으로 표기하기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같은 현상에 의한 ‘섣부르다’의 경우 ‘서뿌르다’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섣-(<설-)’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은 까닭에 단어가 만들어질 때 말뿌리가 뚜렷하지 않은 것은 그 본래 형태를 밝혀 적지 않는다는 규정에 따라 된소리가 나는 대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섣부르다’는 ‘설다’와의 연관성이 인정되는 구조이다. 또한 ‘섣부르다’의 고형이 ‘설우르다{석보상절}’인 점 등을 고려한다면 남의 제29항과 북의 제17항에 따라 ‘설-’의 끝소리 ㄹ이 ㄷ으로 바뀐 형태인 ‘섣부르다’로 적어야 할 것이다.

이번 설에 자신이 섣부르게 행동하거나 말하지는 않았는지 한 번 돌이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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