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대 (<디펜스21+> 편집장)


4년 전에 번역된 번스타인 교수의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는 집단 사고(group thinking)의 위험성을 예리하게 파헤친 책이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생각을 교류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오히려 극단의 사고를 강화시키는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는 건 한 번 쯤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

가끔 시민단체의 어떤 모임에 나가면 유난히 막말을 섞어서 강경한 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런 사례가 있다. 작년에 한 노동운동 계열의 무크지에서 세월호 사건 당시 국민행동본부 지도부를 격하게 비난하는 글이 실렸다. 읽어보니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고 첫 번째 촛불시위에서 “박근혜가 책임져라”라는 구호가 등장한 건 잘못된 일이라는 이야기다. “박근혜는 사퇴하라”고 했었어야 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바로 극단적 주장이다. 사실 세월호 참사 초기에는 박근혜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책임 져라”라는 주장도 사실은 빨랐다. 잘못한 걸 밝혀내고 그 책임을 물어도 늦지 않은데 처음부터 이렇게 정치 논리로 몰고 간 건 결국 시민운동에 손실로 되돌아 왔다. 아마도 이 점을 우려하여 표창원 씨가 시위대에 “박근혜는 잊으라”고 바른 말 했다가 엄청난 비난을 받고 매장되었다. 그리고 지방선거는 여권의 압승으로 끝나고 세월호 심판론은 폐기처분되었다.

이 나라가 잘못된 공안 통치로 무고한 사람이 고통 받고 서민경제가 파탄 나는 데 대해 우리는 맞서야 한다. 여기에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건 망설일 필요가 없는 당연한 시민의 권리다. 그러나 그 과정이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도의 간디가 암살된 것은 영국의 사주를 받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자신이 해방시킨 동족으로부터였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지사들 중 상당수는 일본의 탄압 때문이 아니라 같은 독립운동 진영의 내부 분열로 인해 희생되었다. 근본주의는 적에게 맞서는 내부의 동지부터 학살한다. 그래서 전쟁이건 선거에서건 항상 지게 되어 있다. 이런 식으로 개혁·진보 진영이 자해적인 행태를 되풀이하게 되면 국민들은 진보에 대한 기대를 거두어버린다. 미움과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 결과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되면 전술적으로는 승리할 런지 모르나 전략적으로 패배한다. 마오저뚱은 “전략이 확고할수록 전술은 유연해 진다”고 말한 바 있다. 오늘날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마치 자신이 평화·진보 세력을 대표하는 것처럼 인식하고 무모하고 과격한 주장과 행태로 판을 깨는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엄밀히 말해서 그들은 평화세력도 아니고 진보세력도 아니다. 과격한 행태로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일종의 자해 공갈단이다.

9년 전에 박근혜 대통령이 괴한으로부터 칼로 얼굴을 긋는 테러를 당한 후 박 대통령은 수난 받는 비운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아버지가 저격당한 이후 상황을 “등에 비수를 꽂아도 이보다 더 아플 순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자신이 공격받아 생긴 얼굴의 흉터를 2012년 대선의 TV 광고에 그대로 내보냈다. 이것이 상실의 시대를 사는 노장년층의 눈물샘을 자극하여 열광적인 지지를 확보하게 된다. 아직도 지방의 시장통에 가면 노점상을 하는 할머니들이 박근혜 대통령이 잘 못될까봐 잠을 이루지 못한다. 박 대통령의 한 서린 것 같은 눈빛에 그냥 애간장이 녹는다. 대통령 지지율 30%란 그러한 노년들의 감성적 지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대통령 얼굴의 칼자국은 하나의 정치적 자산이 되고 말았는데 이번에 공교롭게도 미국 대사가 비슷한 일을 당한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즉시 전화를 해서 “나도 비슷한 일을 당했었다”며 “거기 다치면 말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리고 중동에서 귀국하더니 아예 미국 대사와 같은 사연을 가진 오누이처럼 말하고 다닌다. 어느새 박 대통령과 미국 대사가 동병상련으로 엮이는 것이고, 공격 받은 한미동맹은 지고지순함의 아름다움으로 재탄생되는 것이다. 특히 한국 국민과 친하고자 했던 착한 미국 대사가 공격 받았다는 그 스토리 자체가 9년 전 사건의 완벽한 재현이 된다.

국정원과 군, 검찰 출신들을 모아 공안 권력을 강화한 박근혜 정부에게 김기종의 미국 대사 공격은 딱 좋은 선물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박근혜 정부가 공안 통치를 강화해도 국민들은 할 말이 없게 된다. 북한까지 막말을 해대니 김기종과 북한을 연계시켜 종북몰이를 촉발시키는 데 일조한다. 참으로 고약할 노릇이다. 결국 박근혜 정부가 한국이 IS와 같은 극단적 테러세력의 서식지이며 치안은 지극히 불안하다는 걸 국제사회에 거리낌 없이 홍보하는데 자제력을 발휘하기 어려워 졌다. 미국은 차분하게 대응을 하고 있지만 한국은 그럴 수가 없다. 바로 감성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게 참으로 답답하고 무서운 일이다. 아무쪼록 리퍼트 미국 대사가 빨리 쾌차해서 한국 국민에게 차분하고 지혜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젊은 대사의 얼굴의 칼자국이 엉뚱하게 활용되는 일이 없도록 현명한 처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사드 미사일 도입을 비롯한 한미동맹 현안이 도매금으로 처리되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14~16대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 보좌관

16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국방전문위원

전 청와대 국방보좌관실 행정관

전 국무총리실 산하 비상기획위원회 혁신기획관

<디펜스21+>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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