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공동선언이 만들어낸 '감격시대'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역사적인 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발표는 한반도 분단지형을 크게 뒤흔들었다. 남북정상회담의 여파는 곧바로 민간으로도 파급돼 2001년 6월 금강산에서 ‘6.15공동선언 발표 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토론회’가 열렸다.

▲ 2001년 금강산에서 열린 6.15민족통일대토론회 한 장면. '감격시대'가 열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남측은 7대종단과 민화협, 통일연대 등으로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2001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가, 북측은 ‘6.15-8.15 민족통일촉진운동을 위한 북측준비위원회가’ 구성돼 6.15대토론회를 공동주최했으며, 남북해외 대표단은 상봉의 감격을 누렸다. 이른바 '감격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남측 정부의 일부 대표단에 대한 ‘선별 방북 불허’ 조치가 시작됐다.

처음으로 평양에서 열린 8.15민족통일대축전은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앞에서의 행사를 불허한 남측 당국의 지침으로 갈지자를 걸었고, 보수 언론들은 강정구 교수의 만경대 방명록 서명문구를 문제삼는 등 파행으로 얼룩져, 결국 7명의 대표단이 구속되고 임동원 통일부장관이 물러나야 했다.

이후, 2002~2004년 꾸준히 6.15, 8.15공동행사 등이 추진됐고, 청년학생, 여성, 노동, 농민 등 부문별 교류가 확대됐다. 특히 2003년 ‘3.1민족대회’는 처음으로 북측 대표단이 방남해 서울 워커힐에서 행사가 열렸다.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와 부산 아시안게임에 북측 선수단과 응원단이 참석해 바람을 일으켰고, 2004년 6.15우리민족대회는 처음으로 서울이 아닌 인천에서 개최됐으며, 통상적인 공동행사추진본부에 더하여 인천지역 종교, 시민사회단체와 인천시까지 포괄하는 대회조직위원회가 구성되기도 했다.

난산 끝에 탄생한 옥동자, 6.15공동위원회

이러한 민간교류의 확대, 심화 과정을 거쳐 2004년 11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해외 통일단체 대표회의에서 6.15공동행사준비위원회 결성이 합의됐고, 이에 따라 12월 6.15북측준비위와 2005년 1월 6.15남측준비위원회, 3월 6.15해외측준비위원회가 결성돼 마침내 2005년 3월 4일 금강산에서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 해외 공동행사 준비위원회’(이하 6.15공동위원회)가 탄생했다.

▲ 2005년 3월 4일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6.15공동위원회' 결성식 모습. 왼쪽부터 백낙청 6.15남측위 상임대표, 안경호 6.15북측위 위원장, 곽동의 6.15해외측위 위원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6.15공동위원회 결성식은 6.15해외측위원회 위원장 문제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6.15남측위원회 백낙청 상임대표와 6.15북측위원회 안경호 위원장, 6.15해외측위원회 곽동의.문동환 공동위원장 4인이 공동위원장을 맡는 것으로 봉합됐다. 또한 이규재 범민련남측본부 의장과 한총련 대표 등도 방북을 승인받아 ‘선별 방북 불허’ 문제에 진전이 있었다.

6.15공동위원회는 결성선언문에서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남북, 해외 공동행사준비위원회는 공동선언에 기초하여 나라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분열 이후 처음으로 남과 북, 해외의 각 계층, 정당, 단체, 인사들을 가장 폭넓게 망라하여 결성된 상설적인 전민족적 통일운동연대기구”라고 밝혔다.

<6.15민족공동위원회 조직도>

 

 

 

6.15민족공동위원회 회의

 

 

 

 

 

 

 

 

 

 

 

 

 

 

공동위원장 회의

 

 

 

 

 

 

 

 

 

 

 

 

 

 

실무 회의

 

 

 

 

 

 

 

 

 

 

 

공동사무국

(사무국장, 사무부국장)

 

 

 

 

 

 

 

 

 

 

 

 

 

 

 

 

6.15북측위원회

(명예공동위원장, 위원장, 부위원장, 위원, 사무국장, 사무부국장)

 

6.15남측위원회

(고문, 상임고문, 명예대표, 상임대표, 공동대표, 운영위원, 공동집행위원장, 사무처장, 협동사무처장)

 

6.15해외측위원회

(명예위원장, 위원장, 부위원장, 위원, 사무국장, 사무부국장)

 

 

 

 

 

 

 

 

12부문 분과위

 

9부문 본부, 13지역 본부

 

7지역 위원회

(자료출처 - 김치관,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공동행사에 관한 연구, 2006. 수정)

6.15공동위원회 결성을 전후로 6.15남측위원회 산하에 여성, 농민, 교육, 체육, 학술, 언론, 노동, 문예본부 등 9개 부문본부와 전북, 부산, 대전충남, 인천, 대구경북, 경기, 충북, 경남, 제주, 울산, 서울, 광주전남, 강원 등 13개 지역본부가 조직됐다. 6.15북측위원회도 12개 부문별 분과위원회가 구성됐다. 6.15해외측위원회는 7개 지역위원회가 결성됐다.

6.15민족공동위, ‘제2의 6.15 시대’를 열다

조직적 준비를 마친 6.15공동위원회는 2005년 6.15통일대축전을 10만 평양시민의 열기 속에 평양에서 개최했고, 여기에 처음으로 남북 정부의 당국 대표단이 함께 참여했다. 특히 이 기회에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특사자격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을 갖고 경색된 남북관계를 타개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 남북 당국 대표단이 처음으로 참석한 가운데 10만 평양시민들의 환호 속에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2005년 6.15민족통일대축전. '제2의 6.15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6.15공동위원회가 처음으로 주관한 2005년 6.15통일대축전은 ‘선별 방북 불허’가 사라지고 당국 대표단이 참가하는 등 전 민족적 통일축제로 치러져 이른바 ‘제2의 6.15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 광복 60년, 분단 60년에 서울에서 열린 2005년 8.15민족대축전은 남북통일축구로 관심을 모았고, 김기남 노동당 비서 등 북측 당국과 민간 대표단이 국립현충원을 참배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열었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부문별 통일선봉대를 뛰어넘어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백두한라민족통일대행진단’이 전국을 누비며 자주평화통일 의지를 나누기도 했다.

6.15공동위원회는 2005년 12월 중국에서 심양에서 회의를 갖고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이하 6.15민족공동위원회)로 개칭하고, 6.15민족공동위원회 회의와 공동위원장 회의, 실무 회의 등 3개의 회의체계를 두기로 했다.

광주에서 열린 2006년 6.15민족통일대축전은 6.15남측위원회와 광주지역 단체들이 함께 행사위원회를 결성해 주관했으며, 목포에서 예술공연을 진행하는 등 인천에 이어 민족공동행사의 지방 개최를 현실화했다. 그러나 6.15해외측위원회 대표단 일부의 ‘입국 거부’라는 문제점도 발생했다. 이후 8.15공동행사는 북한지역의 수해 발생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강요된 '분산개최 시대', 언제 끝날까

▲ 마지막 민족공동행사로 기록된 금강산에서 열린 2008년 6.15민족통일대회. [자료사진 - 통일뉴스]
북한의 핵실험 여파 등으로 평양에서 열린 2007년 6.15민족통일대축전은 남측 당국 대표단이 참석하지 않았고, 한나라당 의원의 주석단 배치 문제로 파행을 겪었다. 2차 남북정상회담이 예고된 가운데 8.15공동행사를 부산에서 치르기 위해 준비했지만 해외 대표단 ‘입국 거부’ 전례와 한미합동군사연습 등으로 무산되고 분산 개최됐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남북관계는 일반적 전망과는 달리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2008년 금강산에서 개최된 6.15민족통일대회는 당국 대표단 참석은커녕 규모를 대폭 축소하는 등 명맥만 유지했고, 그 이후에는 공동행사다운 공동행사는 열리지 못했다.

이후 남과 북, 해외는 6.15, 8.15행사를 각각 분산 개최했고, 실무 회의나 공동위원장 회의조차 남측 정부는 거의 불허했다. 심지어 2013년 7월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한 채 베이징에서 열린 6.15민족공동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 결과 통일부는 이창복 6.15남측위 상임대표의장 등에게 과태료를 부과하기도 했다.

▲ 20013년 7월 베이징에서 열린 6.15민족공동위원회 공동위원장단 회의 모습. 왼쪽부터 김완수 6.15북측위 위원장, 이창복 6.15남측위 상임대표의장, 곽동의 6.15해외측위 위원장.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하고 참석한 이창복 의장은 정부로부터 과태료를 부과받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남측의 정권교체와 이후 2010년 5.24조치 등으로 민간교류가 가로막히자 6.15민족공동위원회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에 들어갔고, 6.15남측위원회 역시 남측에서 분산 개최되는 6.15, 8.15행사 등을 관례적으로 주관하는 것 외에 특별한 활동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6.15남.북.해외측위원회는 6.15민족공동위원회 결성 10주년을 맞은 지난 4일 공동결의문을 발표, “6.15남북공동선언 발표 15돌과 조국해방 70돌에 남과 북, 해외의 각계층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민족공동의 통일대축전들을 성대히 개최하고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여성, 언론인, 종교인을 비롯한 계층별, 부문별, 지역별 단체들 사이의 왕래와 접촉, 통일회합과 협력교류를 활발히 벌여 나갈 것”이라고 결의했지만 실제 민족공동행사가 성사될 수 있을 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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