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나의 이번 방북 기간은 2014년 9월 25일부터 10월 6일까지이며, 내가 설립한 NK VISION 2020의 중요 기관 중에 하나인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 원장의 자격으로 방문을 했다. 특히 이번 방북에는 평소 중국과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미국 시민권자 신분의 목회자 부부가 학술원 회원의 자격으로 나와 함께 동행을 했다.

이번에 나의 방북 목적은 종교적인 업무와 학술적인 업무를 비롯하여 남과 북의 양측 사회가 서로 소통하고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 세 명은 매우 차분하면서도 기대감이 넘치는 마음으로 중국 심양에 당도하여 북한 영사관측으로부터 비자를 받고 평양발 고려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필자)

해방 70년, 분단 70년, 통일의지가 안보인다

올해로 우리 겨레는 일제로부터의 해방 70주년, 미국에 의한 분단 70주년, 그리고 한국전쟁 정전(휴전)협정 62주년을 맞는다. 그 과정에서 삼천리 반도는 둘로 절단 나고 그 아픔 때문에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신음으로 70여 성상을 모질게 살아왔다. 그러나 70년이 됐는데도 아직까지 이렇다 할 민족적 비전과 대책 없이 막막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그 동안 남한정부와 북한정부 그리고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 그리고 팽팽한 군사적 대결구도의 원인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미국정부가 우리 민족의 통일 염원과 소망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응답을 하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며 살펴봤으나 이 시점에서 앞을 바라보니 오히려 흑암과 절망뿐이다.

아직도 집권자들은 통일에 대한 직접적인 의지가 없어 보인다. 평소 한국교회 신자들은 물론 진보적 지식인들조차 “북한의 인민들은 사랑하지만 그 정권은 타도의 대상이다”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그럴듯한 말로 들리지만 이 말처럼 무지하고 모순된 것은 없다. 어떻게 정권과 인민이 분리될 수 있을까? 남북이 통일이 되려면 통일을 이룩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Political Will)’가 필요한 것이지 이론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통일의 첫 단계는 북한과 남한의 집권자들에 의한 정치적 의지로 시작된다. 쉽게 말해서 양쪽 정부가 통일을 결정하고 추진하는 것이지 시민사회단체나 통일운동단체가 아무리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통일이라는 분위기와 당위성을 몰아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일 뿐, 집권자의 정치적 의지가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인민들만 인정하고 정권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통일 의지가 더 이상 없다는 말과 같다. 또한 입으로는 통일정책을 운운하며 정치적 의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정권도 알고 보면 통일의 파트너인 상대에 대한 배려나 이해심이 전혀 없이 쇼맨십에 가까운 허상을 잡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한반도의 전쟁과 냉전을 종식시킬 수 있는 ‘평화협정’을 아직도 체결하지 못한 채 무기력한 세월이 벌써 62년이 흘렀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해방과 분단 70년을 앞두고 3년 전부터 남북의 국립묘지에 각각 잠들어 있는 모든 영령들에게 무엇으로 응답해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 철조망으로 차단된 ‘D.M.Z’-한반도의 그 아픈 허리를 따라서 3년여에 걸쳐 남과 북의 국립묘지를 모두 방문하며 역사의 화해를 시도했다. 남한의 ‘국민’들과 북한의 ‘인민’들은 아직도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는 당사자들이기 때문에 서로 오고 갈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나처럼 남북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해외동포가 직접 나서야만 했으며,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양쪽의 국립묘지에 잠든 이들을 서로 화해시키는 일도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었다.

▲ 2005년 8월, 북한의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림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등 32명의 일행이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아 충혼탑을 참배하는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2014년 8월, 서울 현충원 김대중 대통령 5주기 추도식장 입구에 나란히 비치된 남과 북의 정상들이 보낸 근조 화환들. [사진제공-최재영]

나는 왜 남과 북의 국립묘지를 모두 방문했나?

내가 남한의 현충원과 북한의 열사릉을 방문한 파격행보에 대해 어느 누구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의 이런 행위는 상대 체제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거나 굴복하는 자세가 결코 아니며 회색분자는 더욱 아니다. 다만 통일의 과정에서 서로를 인정하며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열린 자세이며 통일지향적 민족애의 발로이다. 나는 ‘용서와 사랑’에서 출발한 우리 남과 북이 이제는 다정하게 서로 ‘화해와 협력’, ‘유대와 연대’ 그리고 ‘소통과 통합’이 되어 이질화된 간극이 좁혀지는 것을 보고자 하는 일념뿐이 없다. 내가 양측을 오가며 무덤을 어루만져주며 보여준 용서와 포용의 의미를 아직도 적대관계에 빠져있는 남북의 당국자들과 강경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이며 무덤속의 망자들이 죽어서나마 서로 진정한 화해가 성사되도록 성스러운 사랑의 불씨를 지피고자 했던 것이다. 통일을 앞둔 시점에서 남과 북의 사회가 서로 소통하고 통합하려는 과정에 민족애 외에 무슨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더 필요한가?

내가 찾은 남과 북의 국립묘지들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각자의 자화상과 정체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묘지들을 찾을 때마다 무덤속의 영령들은 나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원통함과 애증의 폭풍오열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북한의 전몰장병묘역인 평양 ‘조선인민군열사릉’ 개장식에 참석한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비록 나는 남한에서 철저하게 반공교육을 받았고 거기 묻힌 인민군 장병들을 적군으로 취급하며 현역으로 군복무를 했던 세대였지만, 그날 그곳에 잠든 500여 인민군 영령들을 진심으로 추모하며 명복을 빌어주었으며, 뜨거운 태양아래 구슬땀을 흘리며 묘역을 돌아보던 중에 갑자기 나도 모르게 감정이 복받쳐 올라오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거의 목 놓아 통곡하다시피 하면서도 나의 가슴 한 켠에는 같은 부모 형제끼리 70년을 으르렁거리며 총부리를 겨누는 백치 같은 짓을 하고 있는 내 자신과 우리 조국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묘역에 잠든 망자들을 ‘괴뢰군’ 이라 부르며 증오심을 키우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분노까지 치밀었던 것이다.

나는 3년 전부터 남한의 현충원에 잠든 영령들과 북한의 열사릉에 잠든 영령들은 과연 영원히 서로 화해할 수는 없는 것일까를 생각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자들에 의해 어떤 계기가 마련된다면 화해는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고민을 했다. 또한 생존시 서로 원수가 되어 잔인하게 살육전을 벌였던 양측의 영령들을 위로하고 보듬어주는 나의 행동이 너무 시기상조이며 성급한 것은 아닌가도 깊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고민하던 나에게 우리나라 5천년 역사의 교훈은 나에게 해답을 제시해주었다. 경상도에 살고 있는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서 계백장군의 묘지에 참배하는 모습과 전라도에 사는 학생들이 경상도에 있는 김유신 장군의 동상과 묘역에 참배하는 모습을 대비시키면 진정한 용서를 기반으로 한 통일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다. 서로 적국이었던 신라의 김유신 장군 묘와 백제의 계백 장군 묘 앞에 가서 그들의 후손들이 오늘날 아무렇지 않게 양측을 왕래하며 참배할 수 있는 것은 삼국을 통일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미군과 한국군이 한편이 되어 70년대를 치열하게 보냈던 월남전 당시, 적국의 수령이자 지도자는 호치민이었다. 그러나 40년의 세월이 흘러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 박근혜 대통령까지 호치민 묘지를 찾아가 헌화하고 참배했으며 미국의 국방부장관이 베트남을 공식 방문하며 국군의장대의 사열을 받았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을 수없이 침략하고 괴롭힌 일본과도 국교를 맺었고 6.25 한국전쟁에 깊이 관여한 러시아(당시 소련)나 중국과도 국교를 맺어 활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아직도 같은 동족인 북한과는 단절할 수밖에 없고 그것도 모자라 적대적으로 지낼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먼저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배려하며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길뿐이 없다. 그것은 결코 굴복이 아니다. 부모 형제를 죽인 원수의 무덤이라도 먼저 찾아가서 손을 내밀고 보듬어 줄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상 최고의 그 어떤 우월한 이데올로기보다 위대하며 종교가 추구하는 최상의 가치를 뛰어 넘는 사랑의 대혁명인 것이다.

물론 ‘용서와 화해’라는 것도 분명한 절차와 과정이 필요하며 역사의 법정에서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를 가리는 정의로운 시시비비를 가려내는 것도 필요하다. 우선 남한 내부에서의 국민통합은 역사의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에게 먼저 사과하고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국민적 통합에 이르게 되며 더 나아가 남북의 통일과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복잡하고 힘든 작업들은 실무적인 통일과정에서 거침돌이 되기 때문에 밀린 숙제들을 풀고 넘어가듯 하나씩 사전에 풀어나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대북 강경 정책으로 일관한 이명박, 박근혜 정부 하에서 내가 남북한의 국립묘지들을 모두 방문하는 일들은 마치 탐험가나 모험가들이 그랜드슬램(Grand Slam)에 도전하는 것처럼 몹시 힘들고 장애요인도 많았다. 그러나 어려운 난관을 뚫고 남북의 국립묘지를 모두 방문한 후에는 마치 성지순례를 마친 듯한 숭고함마저 느꼈으며 산악인들이 7대륙 최고봉을 등정하고 3극점까지 달성하여 그랜드슬램을 이룬 것처럼 내 마음은 뿌듯했고 희열을 느꼈다. 나의 무모함은 아무도 시도하지 않으려는 역사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려는 것이었던가?

▲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해가 안치된 평양시 대성구역 ‘태양궁전’의 측면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항일 독립투사들 160여기가 안장된 평양시 대성산 ‘혁명열사릉’ 내부의 가장 심층부 앞에서. [사진제공-최재영]

▲ 800여기가 안장된 평양시 신미리 ‘애국열사릉‘ 묘역에서. [사진제공-최재영]

▲ 전몰장병 500여기가 안장된 평양시 연못동의 ‘조국해방전쟁 참전열사릉’의 추모탑 앞에서. [사진제공-최재영]

▲ 65여기가 안장된 평양시 룡궁동에 위치한 ‘재북인사릉’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400여기가 안장된 평양시 역포구역 룡산리에 위치한 ‘해외동포 애국자묘’의 정문 앞에서. [사진제공-최재영]

북한이 먼저 찾아와 내미는 손도 잡지 못하는가?

지난 2014년 8월 18일에는 ‘김대중 평화센터’ 주관으로 서울 국립현충원 현충관에서 김대중 대통령 5주기 추도식이 거행됐다. 그러나 이날 일부 극우세력들은 북한의 김정은 제1위원장이 인편으로 보낸 근조 화환이 동작동 국립묘지 안에 반입되는 것을 저지하려다가 실패를 하자 이를 문제 삼아 현충원장에게 수많은 협박전화를 했으며 현충원의 게시판에는 항의와 욕설이 난무하여 결국 사태에 대해 현충원측이 공식발표를 하기까지 했다. 김 대통령의 묘소가 서울 현충원에 안장돼 있기 때문에 현충원 측에서는 예년처럼 행사장 제공과 지원을 했던 것이며 북한에서 보낸 화환도 정부의 협의를 거쳐 승인받은 후 반입된 것이며 행사장 입구 정면에는 사이좋게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제1위원장의 근조 화환이 좌우에 나란히 비치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 사태를 보면 아직도 한국사회는 통일의 상대인 북한이 건네는 위로와 화해의 손길을 수용할 준비가 안 돼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2005년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북한의 책임 있는 고위직인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림동옥 노동당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등 32명의 일행이 8.15 민족대축전 기간에 동작동 국립묘지 충혼탑을 참배했던 적이 있었다. 이때도 극우세력들은 기습시위를 벌였으며 극우언론인들은 노골적인 비난일색이었다. “6.25 전범집단이 피해자 묘소에 참배하는 일은 전범행위를 덮고 넘어가려는 술책이다. 김정일 정권은 이 참배를 평화공세의 하나로 활용하여 대한민국의 민족혼과 대북 경계심과 애국심과 정의감을 마취시키려 들 것이다. 북한정권의 이 선동엔 노무현 정권과 어용언론이 일제히 호응할 것이다. 김정일 전범집단으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당한 국군과 재향군인회, 그리고 성우회와 전사자 단체가 들고 일어나 전범 집단의 철면피한 국립묘지 참배 생쇼에 반대해야 한다. 이것은 피로써 조국을 지켜냈던 군선배들과 호국영령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덕적 의무일 것이다. 학살자가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시체를 구경하러 오는 데도 이를 방치하는 국군은 북한군의 재남침을 저지할 투지가 없다고 봐야 한다”며 입에 거품을 물며 연일 선동적인 보도를 했다. 이처럼 한국사회의 통일을 향한 화해의 온도계는 아직도 차가운 영하에 머무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극우세력들의 저항과 반대에 대해 당시 북측 방문단은 “6·15선언이 없었으면 우리들도 남조선을 이렇게 직접 찾아와 현충원을 참배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라며 자신들은 순수한 민족 화합 차원에서 자원하여 참배한 것임을 차분히 밝혔다. 화해와 포용을 위한 북측의 평화적인 추모 의도를 왜곡하는 모습을 보며 이 간격의 골을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그리고 언제까지 상대가 먼저 내미는 손을 냉정하게 뿌리칠 것인가를 생각하며 심각한 고민을 했다.

▲ 서울 동작동에 위치한 ‘국립서울현충원’의 일반 병사 묘역에서. [사진제공-최재영]

▲ 충남 유성에 위치한 ‘국립대전현충원’의 충혼탑에 참배하는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대전현충원 충혼탑에 참배 후 방명록에 서명하는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대전현충원의 일반 병사 묘역에서. [사진제공-최재영]

북한의 모든 국립묘지를 가다

필립 아리에스가 말하기를 “묘지는 도시의 이면이며 살아 있는 자들의 연대감의 표시이고 애국심의 고결한 장소”라고 했던가? 북한의 국립묘지들은 대체로 절도 있고 근엄하고 경건함을 뛰어넘어 숭고함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북한의 국립묘지들은 수도권에 6곳, 지방에 10곳으로서 모두 16곳에 이르며 행정구역상 수도권인 평양시 일대에 조성된 국립묘지와 각 지방에 조성된 국립묘지로 크게 구분되어 있었다. 우선 평양시 지역에 소재한 국립묘지 중에 가장 1순위로 꼽히는 곳은 평양시 대성구역 미암동의 금수산 ‘태양궁전’이다. 태양궁전은 야외 분묘 형태가 아닌 특수한 목적으로 개조된 건축물 내부에 유리관으로 조성된 묘역으로서 북한에서는 ‘혁명의 성지’로 일컬어지며 ‘특급 국립묘지’로 분류된다. 이와 더불어서 북한이라는 국가의 ‘1급 중앙 국립묘지’로 분류되는 대성산 주작봉 마루에 위치한 ‘혁명열사릉’과 형제산 구역의 신미리 ‘애국열사릉’이 있으며 전몰장병묘역이라고 할 수 있는 평양시 연못동 소재 ‘조국해방전쟁 참전열사릉’이 있다. 이와는 별도로 국립묘지의 격을 갖추면서도 특별묘역으로 차별화된 룡성구역 룡궁동의 ‘재북인사릉’과 평양시 역포구역 룡산리 ‘해외동포 애국자묘역’이 있다. 이같이 6곳의 국립묘지들은 서로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북한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핵심적인 국립묘지들로서 모두 평양시 지역에 위치해 있다.

그 다음으로 지방에 소재한 북한의 국립묘지들을 살펴보면 모두 두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첫째는 비슷한 시기(2008년 12월~ 2011년 4월)에 2년 반의 기간 안에 모두 조성됐으며 각 지방 시도 지역에 상징적으로 한 곳씩 조성됐다. 두 번째는 묘역의 명칭을 일괄적으로 ‘열사릉’이라고 호칭하고 있으며 호칭 앞에는 해당 지역 도시 이름을 넣었다는 것이다.

제일 먼저 2008년 12월에 평안남도 ‘평성열사릉’이 준공된 것을 시작으로 2009년 8월에는 함경남도 ‘함흥열사릉’을 준공했다. 이어서 2009년 12월에는 황해남도 ‘해주열사릉’과 황해북도 ‘사리원열사릉’을 같은 12월에 준공했고 이어 이듬해인 2010년 6월에는 량강도 ‘혜산열사릉’을 준공했다. 또한 2010년 7월에는 평양시 낙랑구역 장교리의 ‘평양열사릉’과 강원도 ‘원산열사릉’을 같은 7월에 준공했으며 다음 달인 2010년 8월에는 자강도 ‘강계열사릉’과 함경북도 ‘청진열사릉’을 역시 똑같은 시기에 준공했다. 특히 평양시 장교리에 조성된 평양열사릉은 현재 기존의 핵심 열사릉(혁명열사릉, 애국열사릉)들과는 전혀 다른 묘역이다. 마지막으로 2011년 4월에는 평안북도 ‘신의주열사릉’을 완공함으로써 모두 10곳의 애국열사릉을 속전 속결로 완공하여 조성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신의주열사릉이 준공된 직후부터 3년여에 걸쳐 꾸준히 평양시 지역에 위치한 북한의 핵심 국립묘지 6곳을 모두 방문하여 돌아보았으며 지방의 국립묘지 방문 일정은 앞으로도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현재 북한의 각도에 소재한 10곳의 열사릉에는 해당지역에 거주한 독립운동가들과 북한 인민정권에 공헌한 인물들과 사회공로자들, 그리고 6.25전쟁 전사자들 위주로 안장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외부세계에 공개하거나 해외방문자들에 대한 참관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이번 남북의 국립묘지 탐방기 연재를 통해 북한의 핵심 국립묘지 6곳에 대한 방문 결과를 매회 소상히 밝힐 것이다.

▲ 서울 수유리에 위치한 ‘국립4.19민주묘역’ 전경. [사진제공-최재영]

▲ 경남 창원시에 위치한 ‘국립3.15민주묘역’ 전경. [사진제공-최재영]

▲ 전남 광주시 망월동에 위치한 ‘국립5.18민주묘역’ 전경. [사진제공-최재영]

남한의 모든 국립묘지를 가다

남한도 북한처럼 국립묘지들이 수도권과 지방으로 적절히 분산되어 있었다. 남한 정부의 국가보훈처가 관리하며 운영하는 국립묘지들을 살펴보면 현재 2곳의 국립현충원과 4개의 국립호국원, 3개의 국립민주묘지로 분류되어 현재 모두 9곳의 국립묘지가 운영되고 있다. 이중에서 ‘국립산청호국원’은 2015년 3월에 개원을 앞두고 있으며 개관하려면 아직 2년여의 기간이 남아있는 ‘국립제주호국원’마저 개원하면 남한은 모두 10곳의 국립묘지가 조성된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중앙급 국립묘지는 ‘현충원’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서울과 대전의 국립현충원이 있으며 그 다음은 현충원보다는 격이 다소 낮아 보이는 ‘호국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영천, 임실, 이천에 국립호국원이 있다. 또한 현충원과 호국원과는 다른 의미와 성격으로 분류된 국립민주묘지가 있는데 이는 남한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유해를 안장한 국립 4·19민주묘지, 국립 3·15민주묘지, 국립 5·18민주묘지가 새롭게 단장되어 조성돼 있다.

수도권인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현재 54,443여기 안장)의 포화상태를 감안하여 충청권인 대전에 현충원(현재 54,447여기 안장)을 조성했으나 다시 포화상태에 이르자 지방 각 시도 지역에도 골고루 국립묘지를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우선 호남권에는 19,413명의 유해를 안장한 ‘국립임실호국원’이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에 조성되어 있고 경상권에는 33,698명의 유해를 안장한 ‘국립영천호국원’이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에 조성되어 있다. 수도권에는 36,286명의 유해를 안장한 ‘국립이천호국원’이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에 위치해 있다.

또한 2015년 3월에 개원을 앞두고 있는 ‘국립산청호국원’이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은 56만㎡ 부지에 안장시설에 5만기를 안장할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이는 전국의 국립호국원 안장대상 30만명 중 남부권 거주자인 17%를 감당하는 면적이라고 한다. 또한 4.3사태 등 파란만장한 역사를 안고 있는 제주국립묘지가 ‘국립제주호국원’이라는 명칭으로 모두 1만기를 안장할 수 있는 시설 규모로 2017년도에 개원을 앞두고 있다. 제주시 노형동 일대 33만㎡ 공유지에 제주 출신 6·25참전 장병과 베트남전쟁 참전자 중 사망자 1,010명, 생존자 5,020명 등 모두 6,030명과 서귀포시 충혼묘지를 비롯해 12개 읍면 충혼묘지에 안치된 2,700여 명의 국가유공자들도 유족이 원할 경우 제주국립묘지로 이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남한정부 국가보훈처가 직접 관장하는 국립묘지는 아니지만 한국 정부차원에서도 관여하고 있는 ‘UN군 묘지’가 '유엔기념공원'이라는 이름하에 조성되어 있다.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에 소재한 이 묘역은 UN군 전용묘지로서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며 이곳은 1951~1954년 사이에 전사한 11개국의 2,300구의 유해가 현재 잠들어 있다. 원래는 21개국의 약 11,000여명의 전사자 유해가 안장되어 있었으나, 벨기에,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그리스, 룩셈부르크, 필리핀, 태국 등 7개국에서 자국의 전사자들을 본국으로 이장했고 그 외 국가의 일부 전사자 유해가 각자의 조국으로 이장되어, 현재는 유엔군 부대에 파견 중에 전사한 한국군 36명을 포함하여 2,300여기가 안장되어 있다.

또한 마지막으로 남한 정부의 국립묘지는 아니지만 국방부에서 직적 관리하는 특수한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곳은 바로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봉리에 위치한 ‘북한군, 중국군 묘지(일명 적군묘지)’이다. 제네바 협정에는 교전 중에 사망한 적군의 유해도 묘지를 조성해서 관리해야 한다는 협약 조항에 따라 정부가 주도하여 경기도 파주에 적군묘지를 조성한 것이며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묘역 중에 한 곳이다. 이곳 역시 서로 남과 북의 군대가 격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전사한 북한의 인민군들과 중국군의 유해를 안장한 묘지이인데 적군묘지로서는 세계에서 이곳이 유일하며 1, 2묘역 합치면 축구장 두 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다. 이곳은 북한군 묘역인 1묘역과 북한군, 중국군을 함께 안장한 2묘역이 밭 가운데를 사이로 나누어져 있으며 북한군과 중국군 유해 1,100구가 안장돼 있으며, 중국인 유가족들과 참배객들이 늘어나며 묘지관리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지난 2012년 8월에 국방부에서 새롭게 단장을 했다. 그나마 중국인들은 유가족들이 간혹 참배를 오건만 북한에서는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한 맺힌 영혼들의 묘지로 남아 있다.

나는 북한의 국립묘지 탐방기에 이어서 남한의 국립현충원과 특수묘지들을 방문한 이야기들을 하고자 한다. 특히 서울과 대전의 현충원을 방문하여 임정요인들을 비롯하여 항일투사들과 독립운동가들의 묘역과 전직 국가원수 묘역들, 전몰장병들의 묘역을 돌아본 이야기들을 구체적으로 기술할 계획이다. 앞으로 기회가 되는대로 지방의 국립호국원과 국립민주묘지 방문도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 경북 영천에 위치한 ‘국립영천호국원’ 전경. [사진제공-최재영]

▲ 전북 임실에 위치한 ‘국립임실호국원’ 전경. [사진제공-최재영]

▲ 경기 이천에 위치한 ‘국립이천호국원’ 전경. [사진제공-최재영]

▲ 경남 산청에 위치한 ‘국립산청호국원’ 전경. [사진제공-최재영]

사연도 많고 아픔도 많은 남과 북의 국립묘지들

다음 회 방문기부터 자세히 밝히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 몇 가지만 술회하려고 한다. 현재 남한의 국립 대전현충원에는 북한 김일성대학교 총장 출신이자 노동당 비서였던 황장엽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반면 북한의 신미리 애국열사능에는 대한민국의 제9대 외무장관을 지낸 최덕신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었다. 최덕신은 한국전쟁 중에는 국군 사단장까지 지내고 정전협정회담에서 남측 실무 대표단이었던 인물이다. 이처럼 분단이후 남과 북의 최고위직을 지낸 두 사람이 남북의 현실을 상징이나 하듯 해독하기 어려운 난수표 같은 역설의 삶과 죽음을 통해 각각 상대편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남과 북 어느 한쪽에서 영웅 대접을 받으면 다른 한쪽에서는 역적으로 취급되는 사례였다.

그러나 다른 경우도 있었다. 비록 유해는 길림성의 북산공동묘지에서 아직 찾지 못했어도 남과 북이 모두 동시에 존경하는 손정도 목사가 있으며 항일투쟁 중 전사했던 양세봉 선생도 역시 남과 북이 모두 존경하여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과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나란히 안장돼 있으며 허묘로 조성된 현충원의 묘비에는 ‘순국선열 양세봉의 묘’라고 기록됐고 진묘로 조성된 애국열사릉의 묘비에는 ‘량세봉 선생 독립군 사령’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처럼 한 인물이 남북 양쪽의 중앙국립묘지에 안장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평양 혁명열사릉에는 최효일 열사의 묘와 반신상이 세워졌으며 그가 국민부 산하 부대에서 활약하다 처형된 업적이 인정돼 남한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역시 혁명열사릉에 안장된 최윤구 열사도 조선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다 전사한 경력을 인정해 남한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강제하 열사도 1995년 남한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며 함께 안장된 윤기섭,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최동오 선생 등과 임정요인 지도자인 김규식 선생과 신간회 간부를 지낸 오화영 선생 등도 한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으며 재북인사릉에 묻힌 독립 유공자들까지 모두 포함하면 남과 북이 함께 함께 기리고 있는 항일투쟁가와 독립운동가들이 30명 가까이 된다. 그 동안 북한 사회는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묻힌 항일 투쟁가들과 독립 운동가들 앞에서 분열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전혀 없다. 그곳은 앞으로 우리민족이 통일이 되어도 그대로 보존해도 되는 이념과 무관한 묘역이라서 남과 북이 함께 기려도 되는 곳이다. 항일운동가들의 숭고한 죽음 앞에서 분열은 있을 수 없다.

▲ 2,300기가 안장된 부산시 남구 대연동에 위치한 ‘UN군 묘지’전경. 정식명칭은 ‘UN기념공원’이다. [사진제공-최재영]

▲ 1,100여기가 안장된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 위치한 일명 ‘적군묘지(북한군, 중국군 전사자 묘지)’ 전경. [사진제공-최재영]

국립묘지의 재구조화를 시행해야 한다

현재 남한의 국립묘지에 안장된 후손들은 북한에 의해 자신들의 가족이 희생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북한의 국립묘지에 묻힌 후손들도 그들의 기준으로 역시 자신들의 가족들이 남한에 의해 희생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처럼 남과 북은 62년의 세월이 흘러도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적대적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할 것 같이 보인다. 여전히 남측 현충원과 북측 열사릉의 성격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문제들은 근본적으로는 남과 북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방과 분단, 그리고 비극적인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적대적 관계에서 파생된 역사해석의 차이 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근현대사와 관련된 ‘역사와 인물’에 대한 평가와 해석이 제각기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남의 현충원과 북의 열사릉 사이에는 아직도 넘기 힘든 역사 해석과 정통성의 문제가 가로놓여 있음을 통감했다.

그러기 때문에 남북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공동의 민족가치관을 활용하거나 남과 북이 함께 항일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사업이 필요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운동가들과 항일투사들에 대한 평가는 현재 남과 북이 거의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남북의 유가족들이 상호 방문하여 참배하는 일들을 통해 서로 소통의 길을 열 수 있을 것 같다. 남북의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는 항일투사들에 대해선 우선적으로 공동의 예우를 하고, 체제의 정통성 문제와 연관된 인물들에 대해서는 평가를 유보하거나 서로 공감할 수 있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또한 남북이 공감하는 역사적 사건을 다시 되살려 서로 머리를 맞대고 접근할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더구나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고령의 이산가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많은 만큼 인도적인 차원에서라도 시급하게 남과 북이 상호 방문 참배를 허용해야 한다. 이 모든 일들은 반드시 남북 기본합의서와 6·15선언, 10.4선언의 정신에 입각해서 추진해야 하며 남과 북이 상호 체제를 존중하는 태도는 통일을 이뤄나가는 과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또한 통일된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논쟁거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국립묘지를 재구조화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통일이 될 경우 남북이 각각 애국열사릉과 현충원들을 앞세워 정통성을 둘러싼 논쟁이나 경쟁을 벌일 경우 통일국가의 화합과 통합을 크게 해칠 수도 있기 때문에 현충원에 묻혀 있는 인사들의 모순적인 측면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재구조화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무력을 사용해서 단시일 내에 물리적 통일을 성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됐기 때문에 국립묘지의 재구조화만이 남북의 현재 모순과 통일 후의 갈등을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임정 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한 선생은 “내가 죽거든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지 말고 나와 생사를 같이한 임정 요인들이 누워 있는 효창공원 묘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백강 선생이 그런 유언을 간곡히 남긴 이유는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 등에는 숱하게 많은 친일파들이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한민국 임정 대통령이었던 박은식 선생의 묘지는 고작 8평에 불과한데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의 묘지는 동작동 묘역 중에서도 가장 좋은 명당자리에 80평에 이르는 거대한 능의 규모로 조성되어 호령하듯 기세를 떨치고 있다. 어느 누가 봐도 불합리하고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다. 죽음의 무게와 무덤에 대한 우리들의 전통적 관념은 이미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는 기정사실을 뒤집는다는 것은 거의 생각하지 못하고 있으나 속히 국립묘지를 정리하여 총체적으로 재구조화하는 일은 통일되기 전에 시급히 해야 할 일들이다. 안 그러면 통일이 되어도 누워있는 영령들은 끝나지 않는 전쟁을 계속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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