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


광복과 분단 70년의 역사적인 해가 밝았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갈등과 대립은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연초에 남북 양 정부의 정상들은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대화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하였고, 이에 대한 국민의 기대도 매우 높았다.

그러나 대화를 추진하는 길목에 들어서자 남과 북은 과거에 보였던 익숙한 장면들을 연출하며 답답한 교착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남북 간의 신뢰 구축을 방해하는 여러 요인들을 하나씩 제거하거나 완화시키면서 대화를 위한 실질적인 토대를 만들어나가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서로에 책임을 넘기는 공방만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왜 남북대화는 이렇게 온민족적 기대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교착만을 반복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면 이 교착상태를 넘어 남과 북이 광복 70년을 대립과 갈등에서 화해와 협력의 국면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대화가 진전되지 않는 이유

남북관계 진전에서 북을 제약하고 있는 핵심문제는 무엇보다 ‘우리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보인다. 지난 2014년의 남북관계를 돌아보면 북한이 이런 입장을 갖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북한은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측에 대범한 양보를 했지만, 이후 국면은 이런 북한의 이런 양보를 무색하게 만드는 배신감의 연속이었다.

이산가족상봉을 합의해주면 한미합동훈련을 로우키(low-key)로 전개하겠다는 우리 정부의 약속은 사상 최대 규모의 전력을 동원한 대규모 군사력 시위로 이어졌고, 북한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북삐라 살포, 한미간 전시작전권 이양의 무기연기,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통과 등이 연이어졌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북한이 가장 민감해할 종북공세와 통합진보당 해산 등이 강행되었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지난 한해는 우리 정부가 북한 적대를 앞세우면서 대북압박의 총공세를 퍼부은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우리 정부에 대해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판판 다른 남조선당국의 이중적행태가 온 겨레를 격노시키고” 있다면서(1.25 북한 국방위 정책국 성명) “남조선당국이 북남관계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다면 (…) 실천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 남조선당국의 립장변화를 지켜볼 것”(1.23 북한 조평통 성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역할이 뒤바뀐 대화공세

북한이 대남 불신으로 인해 남북관계 진전에 극도로 신중해져 있다면, 우리 정부는 변화를 위한 조건의 개선에 지극히 소극적인 문제가 근본적인 제약이 되고 있다. 우선 우리 정부는 한 러시아 언론이 평가하듯이 “한국 사회와 북한에 한 발짝도 물러서 양보하는 것처럼 보여서도 안된다”는 스스로의 제약에 빠져있고(<러시아의 소리> 1.14),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은 변화를 위한 노력보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라는 언술만 반복하고 있다.

“북한을 회담장으로 끌어내기 위하여 현재 북한이 요구하고 있는 그런 전제조건들을 먼저 우리 정부가 선제적으로 조치할 생각은 없다”라든가, 북한이 진정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의지가 있다면 ‘전제조건을 내세우기보다는’ “일단 대화의 장에 나와서 북한이 원하는 관심사유에 대해서도 우리 정부와 포괄적으로 협의”해야 한다는 통일부 대변인의 말은 이런 우리 정부의 태도를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 정부의 언술은 사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진정성 있는 조치를 취하면’ 남북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다든가 혹은 6자회담이나 북미대화를 추진할 수 있다는 한국과 미국의 입장에 대해, 북한은 ‘부당한 전제조건을 내걸지 말고’ 일단 대화를 시작하면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지금 남북 사이에는 이러한 익숙한 풍경이 완전히 거꾸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신뢰회복의 초석 쌓기부터

이러한 역지사지(易地思之) 없는 역할 바꾸기와 극도의 대남불신이 남북관계 답보의 배경이 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남과 북이 서로 각자가 처한 조건을 무시하고 자기주장만 내세워서는 아무런 성과를 얻을 수 없다는 점이다. 아무런 변화 없이 상대를 대화에 나오라고 압박만 하거나, 일방적 전제조건만 내세워서는 대화가 시작되기 어렵다.

무엇보다 우리 정부는 신뢰 회복을 위한 실제의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한미합동훈련이나 삐라문제, 5.24조치 해제 등은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다. 그러나 작지만 변화를 이루려는 노력을 지속한다면 이런 문제들을 넘어서서 대화를 위한 신뢰를 쌓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우선 올 봄에 이루어질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최대한 규모를 축소하고 로우키로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핵 선제공격 논란이 있는 대규모 공개 무력시위를 강행하면서 ‘조건 없는 남북대화’를 하자고 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무리한 일이다. 또 최소한 삐라문제를 포함한 비방중상 중단문제에 대해서는 정부가 좀 더 단호한 입장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5.24조치는 천안함사건과 연계되어 있는 만큼 일방적으로 해제할 수 없다는 정부 주장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민간교류와 관련한 정부의 태도는 변화될 필요가 있다. 정부가 민간교류를 활성화하겠다거나 광복70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남북공동행사를 추진하겠다고 말하면서, 민간교류를 부당하게 또 차별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당장 올해 15주년을 맞는 6.15공동선언 기념행사문제부터 정부는 ‘무조건 금지’라는 기존의 태도를 변화시켜야, 광복 70주년 남북공동행사도 추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남북의 공동노력만이 한반도를 변화시킬 것

지금 필요한 것은 작은 변화를 축적하면서 신뢰의 초석을 쌓아나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만 변하면 된다는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이지만, 북한 역시 무리한 전제조건만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서로가 상대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조건이라 하더라도, 남과 북이 신뢰를 쌓아나가는 작은 노력들을 축적해나간다면 최소한 올 봄 이후에는 남북관계 변화의 긍정적 계기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현재의 한반도 상황을 감안할 때, 굳이 광복 70년을 대전환의 시기로 만들자는 북한의 주장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런 작은 변화는 남북관계 전반의 대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또 일부에서는 ‘북한 붕괴 추진’ 등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발언을 들면서 남북관계 진전에 우려하는 미국의 태도를 걱정하지만, 이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다. 관건은 우리 정부의 태도이지 미국의 입장이 아니다. 이미 한반도문제는 단지 시간문제일 뿐 많은 지점에서 ‘한반도화’의 궤도에 들어서 있다. “통일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한국과 북한의 공동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러시아의 소리> 1.24), 이는 이미 2000년 이후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남과 북은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상대만 탓하는 냉전의 유년기를 지난지 오래이며, 또 미국 등 외부의 누구에게 한반도문제의 책임을 전가할 시기도 넘어선지 오래다. 남북 양 정부가 작은 노력의 투입조차 마다하고 갈등만 누적시키면서 광복 70년의 계기를 한반도 평화와 화해협력의 역사적 전기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에 대한 엄중한 역사적 책임과 후과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이승환은 1958년 경북 포항에 태어나, 고려대 경제학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정치학 석사)을 거쳐 경남대 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승환은 통일맞이 정책위원장, 열린정책연구원 정치아카데미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이며, 또한 민화협 집행위원장,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15년여에 걸쳐 남북 민간교류 활동을 전개해왔으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6.15남북공동행사 등을 진행해왔다.

그가 쓴 글로는 “문익환,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다”(창작과비평, 통권 143호, 2009), “6월항쟁 20년, 남북 및 북미 관계의 변화와 통일담론”(창작과비평, 통권 137호, 2008), “2000년 이후 대북정책담론 연구”(북한대학원, 2008) 등이 있다.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lsh2k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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