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태국 일간지 <방콕포스트>는 문성모 태국 주재 북한대사가 위싸누 끄레아응암 부총리를 만나 평양에 태국 대사관 개설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문 대사는 수교 40주년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주말에는 북한 측 6자회담 단장인 리용호 외무성 부상과 미국 측 스티븐 보즈워스 전 대북정책 특별대표 등이 싱가포르에서 만나 북.미 '1.5 트랙(반관반민) 대화'를 가질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안의 공통점은 그 장소가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 회원국이라는 것이다. 과거 6자회담 과정에서도 북한이 미국과 직접 협상을 벌일 때, 주로 택했던 지역 중의 하나가 동남아시아다.

북한의 아세안에 대한 호감과 중시는 그 연원이 깊다. 냉전시대에는 이른바 '인도차이나 3개국' 등 사회주의 나라들과의 연대, 인도네시아 등 비동맹 외교의 거점으로서, 탈냉전 이후에는 한국의 '북방외교'에 대응하는 '남방정책'의 주요 대상으로서, 2007년 이후에는 '남남협력' 차원에서, 최근에는 '다각화'의 한축으로서 아세안을 중시해왔다. 북한 지도자들과 일부 나라 지도자 사이의 친분, 북한 지도자의 일부 나라에 대한 호감도 그에 일조했다.

아세안(ASEAN)

아세안은 2002년 인도네시아에서 독립한 동티모르를 제외한 동남아시아 지역 10개국으로 이뤄진 지역협력기구다. 인도차이나 반도 5개국(태국, 베트남,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와 해안 및 도서 5개국(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브루나이, 싱가포르)이 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아세안은 베트남전이 본격화되고 인도차이나 반도에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등 국제 정세 급변에 따라 공동 대응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967년 8월 8일 인도네시아와 타이,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등 동남아 5개국이 '방콕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결성되었다. 1984년 1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브루나이가, 1995년 7월 미국과 수교한 베트남이, 1997년 7월 라오스와 미얀마, 1999년 4월 캄보디아가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현재, 사무국은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 있다.

아세안 사무국에 따르면, 2014년 8월 기준 아세안 총 인구는 6억 2,509만명이며, 면적은 443만 ㎢(세계 면적의 3.5%)이다. 국내총생산(GDP)은 2조 3,985억 달러이며, 총 교역량은 2조 5,115억(수출 1조 2710억, 수입 1조 2,404억) 달러다. 부상하는 중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미국 사이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세안 10개국은 모두 북한과 수교했다. 이 중 필리핀과 브루나이를 제외한 8개국에 북한 대사관이 개설돼 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등 6개국이 평양에 상주공관을 두고 있다.

냉전기 북한의 대아세안 외교 : 사회주의 형제국, 비동맹

냉전기 북한은 사회주의(소련) 진영에 속했다. 북한의 초기 아세안 외교도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사회주의 나라들에 집중됐다.

1957년 호치민 베트남 주석의 방북과 1964년 김일성 주석의 베트남 방문은 이 시기 대표적인 이벤트다. 두 지도자의 교차 방문을 통해, 양국은 '혈맹관계'를 수립하고 '무상군사지원 및 경제원조협정(1967)'을 체결했다. 2000년 10월 백악관에서 군복 차림으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을 만났던 조명록 차수가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북한 전투기 조종사 중 한 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1976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베트남과 북한은 새로운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79년 베트남이 중국과 전쟁에 돌입하고, 크메르루주 정권을 축출하기 위해 캄보디아에 침공하면서 북한과의 관계도 불편해졌다. 양국 관계는 1984년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군대를 철수한 이후 정상화됐다.

▲ 수카르노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자료사진-통일뉴스]

1956년 4월, 북한은 제3차 당대회에서 '다변외교'를 천명했다. 사회주의 진영의 두 축인 소련과 중국의 갈등이 위험수위에 이른 시점이었다. 보다 중요한 배경은 '제3세계'의 탄생이었다. 그 역사적인 이벤트가 1955년 4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다. '비동맹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회의를 주도한 이가 김일성 주석과 각별했던 수카르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이다. 인도네시아와 북한은 1964년 수교했다. '반둥회의 10주년'인 1965년에는 김일성 주석이 김정일 위원장을 데리고 인도네시아를 직접 방문했다. 1975년 북한은 페루 리마에서 개최된 제5차 비동맹 외상회의에서 인도네시아 등의 지원에 힘입어 비동맹 정회원국으로 가입했다. 그 다음해 스리랑카에서 열린 제5차 비동맹 정상회의에서는 '주한외국군 철수 및 외국 기지 철폐, 핵무기 및 모든 전쟁수단의 제거, 정전협정 평화협정으로 대체' 등을 담은 결의를 이끌어냈다.

탈냉전기 북한의 대아세안 외교 : 남방정책, 남남협력, 다각화

1980년대 후반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고 한국의 노태우 정부가 '북방외교'를 활발하게 전개하자, 북한은 '자위력'에 기초한 대미수교 추진, 그리고 '남방정책'으로 대응했다. 1991년 신년사를 통해 김일성 주석은 '대아시아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직후, 연형묵 총리가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를 순방했다. 4월말에는 리종옥 부주석이 베트남, 라오스를 방문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은 '동남아와의 교역 확대'를 당부한 김일성 주석의 유훈에 따라 아세안을 상대로 경제외교에 적극 나섰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2011년 7월 발리 ARF 회의에서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왼쪽)과 박의춘 북 외무상. [자료사진-통일뉴스]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 주변 정세가 안정되면서 북한은 아세안 외교에 다시 적극 나섰다. 그해 7월 27일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유일한 정치.안보협의체인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23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당시 백남순 외무상은 가입 연설을 통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ARF의 목적과 이상에 부응해 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보를 담보하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할 것을 약속한다"고 다짐했다. 이 회의는 아세안 관련 회의 중 유일하게 북한이 참석하기 때문에,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 외신의 취재 경쟁이 치열하기로 유명하다. 2011년 7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ARF회의 기간에는 남북 6자회담 수석대표들이 회동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2007년 6자회담 '2.13합의' 이후, 북한의 '남남협력' 행보도 강화됐다. 그 해 4월 김영일 외무성 부상이 미얀마를 방문했으며, 9월에는 우 쵸 투 미얀마 외무성 부상이 방북했다. '아웅산테러'로 인해 1983년 단교됐던 양국관계가 정상화된 것이다. 9월에는 최수헌 북한 외무성 부상이 개발도상국 모임인 '77그룹' 외무장관 회의에서 "남남협조를 확대발전시키는 것은 조선(북)의 일관한 입장"이라고 밝혔다. 10월 16~18일 농 득 마잉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에 따라 방북했다. 10월말부터 11월까지는 김영일 내각총리가 베트남,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라오스를 순방했다.

2014년 신년사에서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는 앞으로도 자주, 평화, 친선의 대외정책 이념을 확고히 견지하면서 우리나라의 자주권을 존중하고 우리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모든 나라들과의 친선협조 관계를 확대 발전시키며 세계의 평화와 안전, 인류공동의 번영을 위하여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8월 리수용 신임 외무상이 미얀마 수도 네피도에서 열린 ARF회의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9월 강석주 당 국제비서의 유럽.몽골 방문, 리수용 외무상의 유엔총회 참석과 이란, 러시아 방문 등 '다각화 외교'의 신호탄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태국 사랑'

김일성 주석과 호치민 주석, 수카르노 대통령, 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과의 친분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태국 사랑'도 외교가에 회자되고 있다. 이 사실이 외부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2000년 10월 방북해 김 위원장을 만났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의 회고록이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김정일 위원장이 태국의 입헌군주제에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고 밝혔다. 북한에서 근무한 바 있는 유럽의 한 외교관도 "김 위원장이 생전에 후계체제와 관련해 태국 모델을 관심있게 검토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다. 탁신 전 총리 등장으로 만성적인 정치 갈등을 겪기 전까지, 태국 외교관들은 강한 자부심과 풍부한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아세안 관련 회의를 이끌어왔다. "태국 외교부에는 옥스포드대 출신자들이 특히 많다"고 한 외교관은 전했다. 외교정책이나 경험 측면에서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태국과 북한은 1975년 5월 수교했으나 냉전기간에는 경제관계 중심으로 관계가 유지됐다. 1991년 3월 북한이 '남방정책'을 본격화하면서 태국에 상주공관을 개설했다. 1996년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던 양국관계는 1999년 2월 '홍순경 사건'으로 고비를 맞는다. 태국 주재 북한 참사관이던 홍씨 일가족이 북한 요원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납치'됐다가 탈출해 정치적 망명을 요청한 것이다. 태국 정부는 그해 3월 사건에 관여된 북한 외교관 6명을 추방했다. 이에 북한이 태국대사를 교체하는 등의 화해조치를 취하고 태국이 북한의 ARF 가입을 지원하면서 양국관계는 정상화됐다. 2001년 12월 태국을 방문한 북한대표단은 쌀 30만톤 수입에 합의했다.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에 따른 교역 급감 등으로 양국관계도 다소 침체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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