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앞에서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현실을 바라보는 올바른 눈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현실을 바라보는 올바른 눈은 과거를 바라보는 올바른 눈 속에서 형성된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단순히 흘러간 과거가 아닙니다. 그 까닭은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과거를 모두 알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과거만을 알기 위해서 아무리 많은 사실들을 수집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과거의 파편들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과거를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알고 있는 과거의 사실들을 바탕으로 과거의 전체를 반영하는 하나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그 과거들을 다시 짜맞추어야 합니다. 이렇게 다시 짜맞추어진 과거에 대한 전체적인 모습이 엄밀한 의미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에 사는 사람들의 손으로 다시 짜맞추어진 과거에 대한 전체적인 모습인 역사는,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쓰여 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과거를 다시 구성할 때 어떤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가, 어떤 사람이 하는가에 따라 그 전체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역사에 대한 서술은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평가를 뜻합니다.

과거 사실을 다시 구성하는 사람이 살고 있는 시대와 생각하는 바에 따라 역사 서술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삼국사기`는 고려 시대에 살던 김부식이라는 사람이 다시 구성해 낸 삼국시대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김부식처럼 삼국시대를 서술할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역사 연구자들의 지속적인 탐구 및 과학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오늘날에는 그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들이 많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김부식처럼 유교적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김부식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만 해도 과거를 바라보는 관점과 서술하는 내용이 `삼국사기`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일연은 무신 정변과 몽고 침략을 겪은 뒤에 살았고 승려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연은 어떤 사실을 역사 서술의 바탕으로 삼을 것인가, 어떤 관점에서 과거를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문벌 귀족을 대표한 사람이었던 김부식과 많이 달랐습니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그 사람의 처지나 생각하는 바에 따라 역사는 달리 서술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역사를 서술하는 데에 차이가 있다면, 과연 어떠한 것이 역사적 진실인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우리 나라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책을 다시 써야 하는 경우에는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역사적 진실은 서술된 역사가 바탕으로 하고 있는 사실이 정확한가 하는 문제와 서술한 사람의 관점이 올바른가 하는 문제에 따라 결정됩니다. 정확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역사 서술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역사 서술은 어차피 과거 사실의 부분들을 바탕으로 해서 다시 구성하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다시 구성하는가 하는 관점이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이 관점을 우리는 역사관이라고 합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는 것이듯 정확한 과거 사실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다 해도 그것을 어떤 식으로 다시 구성해서 서술하느냐 하는 것이 역사 서술에서는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이에 대해 영국의 사상가이자 정치학자인 에드워드 카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역사가가 역사를 정확하게 썼다고 해서 칭찬하는 것은, 건축가가 잘 말린 목재를 썼다거나 잘 혼합된 콘크리트를 썼다고 해서 칭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역사가가 어떤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한다고 해도 그것의 옳고 그름은 시간이 흐르고 과학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밝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서술한 사람의 태도, 곧 역사관이 올바른가 하는 문제는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역사관은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이 살고 있는 시대의 현실적인 요구에 들어맞는가 아닌가에 따라 판별됩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과거의 재구성이지만, 동시에 현실의 필요에 따른 재구성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필요하지 않은 과거의 재구성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현재 속에 살아 움직이는 과거`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논의해야 하는 점은 분명해졌습니다. 올바른 역사관은 바로 현실적인 요구에 맞는 역사관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다음 번부터 좀더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도록 합시다. 그 이전에 우리가 한 가지 분명하게 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현실적`이라는 것을 눈 앞의 이익만을 좇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제 말기에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고, 많은 젊은이들을 일제의 야욕을 위한 희생양으로 내몰았던 친일파들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척 `현실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과 몇 년 후 아니 몇 달 후에 닥칠 일제 패망도 내다 보지 못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에도 지금의 분단 구조가, 미국의 세계 제패가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현실적인` 생각이 아니라 `눈 앞의 이익` 때문에 변화하는 현실을 보지 못하는 짧은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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