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나의 이번 방북 기간은 2014년 9월 25일부터 10월 6일까지이며, 내가 설립한 NK VISION 2020의 중요 기관 중에 하나인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 원장의 자격으로 방문을 했다. 특히 이번 방북에는 평소 중국과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미국 시민권자 신분의 목회자 부부가 학술원 회원의 자격으로 나와 함께 동행을 했다.

이번에 나의 방북 목적은 종교적인 업무와 학술적인 업무를 비롯하여 남과 북의 양측 사회가 서로 소통하고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 세 명은 매우 차분하면서도 기대감이 넘치는 마음으로 중국 심양에 당도하여 북한 영사관측으로부터 비자를 받고 평양발 고려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필자)


나는 이번 방북기간에 모두 서너 차례에 걸쳐서 평양 외곽의 시골 농촌지역을 둘러 볼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황해북도에서의 가을걷이 추수작업과 황해남도의 신천군을 비롯하여 평야와 곡창지대를 둘러보기 위해 아침 일찍 차량으로 평양호텔을 출발했다. 평양 시가지를 빠져 나가며 역포구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평양평야를 둘러보았다. 용성구역과 만경대구역, 강남군 일대 등을 통과하며 창밖을 바라보니 벼농사와 각종 채소, 과수 등의 농경지로 변모하여 이미 평양시의 주요 농산물 공급원이 된지 오래되어 보였다.

이윽고 평양 시내를 벗어나서 황해북도에 진입하니 차창 밖에는 풍요로운 가을 들녘에서 서너 명씩 분조단위로 평화롭게 벼베기 작업을 하는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내가 평소에 품고 있던 북의 식량문제에 대한 의문점과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는 가을 들녘의 풍성함이 보여주는 역설의 광경이 서로 충돌하며 나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고 있었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아래 보이는 황금 벼이삭들은 풍년을 위해 그동안 드려왔던 기도에 반응하듯 묵직한 황금빛 낱알로 보은을 하는 것 같아서 나에겐 은혜롭기까지 했다. 그동안 품어왔던 “이렇게 드넓고 풍요로워 보이는데 도대체 쌀 부족 현상이 왜 일어나는 것 일까?”라는 원초적 질문들은 내가 황해남북도 일대와 이북의 여러 농촌지역 여행을 모두 마치고 나서 차츰 풀리기 시작했다.

▲ 평양 외곽인 황해북도 농촌 마을의 벼베는 풍경. [사진제공:최재영]

내 삶의 블루오션, 양평에서 평양까지

원래 나는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석장 1리’에서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성장하여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부모님은 한평생을 오직 ‘농자천하지대본’의 원리대로 순수하게 사셨으며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유년시절부터 학창시절까지 틈틈이 논밭에서 부모의 농사일을 도우며 양평에서의 애잔하고 아름다운 시절을 보냈다. 그 후 나이를 먹어 미국에 유학을 와서 이민 목회자로 정착하면서도 나는 한시도 고향의 논밭과 산천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농사를 직접 지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라면 쌀과 대지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쌀에 대한 미학(米學)은 곧 그 사람의 인생철학과 가치관까지도 영향을 주는 것 같다. 한국의 전형적인 농촌지역인 양평에서 태어나서 자란 내가 평양을 방문하여 농업부문과 식량생산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현재 대북사역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식량문제를 고민하는 것도 내 고향 양평에서 힘들고 가난한 시절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 내가 존경하는 대북 농학자인 김필주 박사가 6·25전쟁 때 피란 가서 농사에 관심을 갖도록 계기를 제공해 준 곳이 바로 내 고향 양평이다. 김 박사는 그 후 서울대 농대와 미국 코넬대(종자학 박사)를 졸업하고 미국의 유명한 종자회사에 근무하다가 북에 옥수수 종자 개량을 돕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현재는 북 전역의 각 농업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될 독보적인 농업학자와 식량 구호가로 헌신하고 있다.

이처럼 ‘평양’을 방문하는 나에게 있어서 ‘양평’이라는 단어는 구순의 노모가 생존해 계신 고향의 의미와 함께 ‘평양’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품는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양평과 평양은 마치 동의어처럼 언제나 친근하게 들리며 내 삶의 블루오션으로 다가오는 곳이다.

▲ 평양고려호텔 로비에서 김필주 박사와 함께한 필자. [사진제공:최재영]

우리 일행은 미국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방북일정을 잡을 때 평양에서 멀지 않은 황해도 지역의 농촌지역에 찾아가 가을걷이 농사일을 돕기로 계획했다. 협동농장을 직접 찾아가서 한 해 동안 수고한 농부들의 거친 손들을 진심으로 잡아주고 싶었고 더 나아가 벼베기와 탈곡하는 일손들을 직접 내 손으로 돕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2012년에 단행된 ‘6.28 농업개혁조치’와 2013년도에 전국 협동농장과 기업소에 내린 ‘5.30 개혁조치’가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고 있는지도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것 만 같았다. 특히 이미 2002년에 내린 ‘7.1 경제관리 개선조치’ 이후에 실시된 포전담당제와 현재 김정은 제1위원장 시대에 접어들면서 전국으로 확대된 포전제도를 비교하며 과연 각급 농장에서는 현재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는지 궁금했으며 아울러 올해의 쌀농사 작황 상태와 농업 근로자들의 작업 환경과 여건등도 현장에서 체험하고 싶었다.

▲ 미곡협동 농장원 주택단지 전경. [사진제공:최재영]

▲ 미곡협동 농장원 주택단지 전경. [사진제공:최재영]

우리가 당도한 곳은 이미 지명도가 널리 알려진 황해북도 사리원의 미곡협동농장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곳은 이미 북의 지도자들이나 외국의 방문객들도 빈번하게 방문을 할 정도의 모범적인 농장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한 곳은 정말 이름 없는 시골의 작은 농촌마을의 협동농장이었으나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산중턱에는 정자모양의 전망대가 멋스럽게 자리하고 있었고 산기슭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문화주택들은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농장원들이 거주하는 주택들은 마치 벽돌을 찍어낸 듯 같은 모양새로 획일적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채로운 것은 집집마다 비행기 프로펠러 모양의 풍력 자가발전 시설이 굴뚝처럼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특히 ‘살구동네’니 ‘추리동네’니 하는 마을 이름들이 매우 서정적으로 다가왔다.

마을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상점에서는 다양한 상품들이 판매되고 있었고 특색 있게 건축된 문화후생 시설과 공공건물들이 의외로 괜찮아 보였다. 농경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발코니 언덕에 당도하니 평야와 마을 군락들이 동시에 시원하게 보였다. 농장 책임자와 해외동포 담당자가 오래 전부터 우리를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 언덕에서 내려다 본 미곡협동농장 일대 전경(벼베기 작업을 할 농장이 창고 바로 앞에 보인다) [사진제공:최재영]

“그나저나 미국에 사시는 최 선생님이 이런 힘든 일을 직접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농사일이 보기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 그럼요. 저도 예전엔 우리 고향 양평에서 농사를 지어봤기 때문에 문제없습니다. 제가 3년 전 가을에 평의선 국제열차로 출국하면서 평양역에서 신의주역까지 여행하며 창밖을 살펴보니 평안도 지역은 농사도 아주 잘됐고 농경지도 반듯하게 정리됐던 기억이 나는데 이번에 황해도 지역을 돌아보니 오히려 다른 지역보다 농지정리가 더 잘 된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우리 미곡농장의 전체 성원들과 근로자들은 농지정리 사업을 추진 할 때 우리나라의 쌀독을 책임졌다는 높은 자각을 안고 모두가 일떠섰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마 공식적으로 첫 토지정리를 하던 해인 2000년 정월인가 우리 장군님이 태천군(평북)에 농지정리 사업 현장을 찾아주셔서 하신 말씀을 저와 온 일꾼들이 아직도 생생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 ”

“아. 그때 우리 장군님이 ‘이제는 한드레벌이 천지개벽이 되고 완전히 달라져서 앞으로는 해방 전에 옛날 지주들이 자기들 토지문서를 가지고 찾아와서 자기 땅을 찾아 달라고 해도 이젠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고 말씀하시면서 예전과 완전히 달라진 지평선을 바라보시며 흐뭇해하셨습니다.”

▲ 필자에게 설명하는 농장 책임자들. [사진제공:최재영]

시간이 촉박한 우리 일행은 대화를 나누면서 벼베기 농장으로 재빠르게 향했다. 논바닥에 도착하니 벌써 주변은 이미 오래전에 벼베기가 끝난 듯 했다. 그럼에도 특별히 우리 일행을 위해서 100평 남짓 남겨 두었다고 한다. 바둑판처럼 경지 정리가 된 논바닥에 덩그러니 남은 채 튼실하게 익어있는 누런 벼이삭들을 바라보니 반갑고 감격스러웠다.

작업복 차림이었던 나는 장갑을 끼며 벼를 벨 수 있는 낫자루를 달라고 요청했다. 알고 보니 미곡협동농장은 트랙터로 벼를 베는 기계화 농사이다 보니 낫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농장의 담당부서에서도 미처 낫을 준비할 생각을 못한 듯 했다, 담당자들이 허둥대며 어디선가 간신히 낫 세 자루를 가져왔는데 그나마 한 자루만 쓸 만했고 나머지 두 자루는 쓸 수 없을 정도로 부실했다. 어쩔 수 없이 농사경험이 많은 내가 좋은 낫을 들고 벼를 베기 시작했고 일행들도 뒤따라서 엉성한 낫들을 들고 어설프게 벼를 베기 시작했다.

▲ 벼베기 작업하는 필자와 일행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벼베기 작업하는 필자와 일행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벼베기 작업하는 필자와 일행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북에서 보낸 쌀로 남에서 떡을 해 먹었다니

우리 일행은 벼를 베면서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다. 농장 책임 관리원들도 롱(농담)들을 제법 잘했고 흐뭇한 얼굴로 우리와 함께 어울리며 벼베는 일을 옆에서 참견하며 도와주었다.

“제가 이번에 돌아다니면서 보니 누런 들판이 눈에 많이 띄던데, 올해는 전반적으로 좀 풍년이라고 보면 됩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번에 왕가물(큰가뭄)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도 풍년입니다. 이악하게(악착스럽게) 투쟁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최 선생님, 혹시 저희가 몇 년 전에 남조선에 쌀 보냈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그때 우리가 보낸 쌀로 대학생들이 떡도 해서 먹었다는 소식을 나중에 전해 들었는데...”

“예? 언제 쌀을 보냈나요? 그동안 남쪽에서 쌀을 보내면 보냈지 북에서 무슨 쌀을 보냈다는 겁니까? 예전에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남쪽에 큰 홍수가 났을 때 북에서 구호물자로 쌀과 옷감을 보내준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혹시 그 때를 말씀 하시는 거예요?”

“아이구, 그게 아닙니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요. 김필주 박사님 소개로 남조선 농업대학에 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박 교수님이라는 분이 직파기를 개발해서 맨 처음 우리 황해도 사리원에 있는 밭 농장들을 방문해서 시범적으로 기계를 보급하지 않았습니까? 그해 우리 밀농사가 그 직파기 덕을 크게 봤단 말입니다. 아마 로무현 대통령 때 우리 지역에 방문하기 시작해서 그 후로도 우리 조국에 아주 자주 오셨단 말입니다.”

▲ 평안남도 약전리 협동농장에서 복토직파기가 파종하는 모습. [사진제공:박광호 교수]

나중에 확인해 본 결과 농장 책임자가 말했던 박 교수라는 분은 현재 수원에 있는 한국농수산대학에서 작물학을 가르치는 제초학 박사인 박광호 교수였다. 박 교수는 정부의 추천으로 해외연구소에서 주도하는 벼농사 직파기 기술개발 프로젝트 과학자로 발탁된 것이 계기가 되어 직파기를 직접 개발했다고 한다. 자신이 직접 연구하여 여러 번의 실험 끝에 최종 개발한 ‘BOKTO Multi Seeder(다기능 복토직파기)'를 개발도상 국가들을 대상으로 보급하던 중에 북에도 진출하게 됐으며 2005~2007년까지 3년 동안 한민족복지재단의 후원에 힘입어 기계값이 대당 천 만 원에 이르는 직파기를 트랙터와 함께 다섯 대씩을 두 곳의 협동농장에 무상으로 보급하며 여의도 면적의 3배에 달하는 농장에서 시범적으로 직파농법을 전수했다고 한다.

“아. 저는 김필주 박사님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직파기나 박 교수님 이야기는 잘 모르는데......”

“그때 우리 농장과 봉산농장에서 시범적으로 밀농사 직파기가 성공하니까니 그 다음에는 숙천군 약전리 농장과 순안공항 부근에 있는 천동리 농장에서 시범적으로 벼농사 직파기를 활용해서 마침내 두 배 가까이 쌀농사 수확량을 올렸단 말입니다. 그때 약전리 협동농장은 그해 전국 농업부문 생산량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단 말입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도 직접 봤지만 그 기계는 참 신기해요. 직접 모내기를 할 필요가 없어요. 볍씨가 싹이 나면 그 발아 볍씨들을 기계가 직접 땅에 심어줄 뿐 아니라 비료도 뿌려주고 흙을 덮어주기 까지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벼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모든 작업들을 알아서 척척해줘서 힘든 로동도 줄여주고 비료도 적게 들게 해줘서 생산비도 많이 절감 될 뿐 아니라 열 명이 할 일을 서너 명으로 줄여주고 수확량도 높아져서 당시에 저희들은 매우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박 교수님은 이제 농장에 안 오십니까?”

“리명박이 막는 바람에 오고 싶어도 못 오지요. 우리가 직파기를 가지고 그 해 밀농사의 시작부터 잡도리(준비)를 단단히 해서 첫 수확을 하고 나니 수확량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이듬해는 저쪽 약전리 농장이 가을 벼농사가 큰 수확을 거둬서 전국에서 일등을 하여 영광스럽게도 김일성훈장을 받고 나니까 경사가 났지요. 그래서 그동안 수고했던 남측 농업 관계자분들을 모두 불러서 농장 마당에서 햅쌀로 떡 잔치도 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너무 고마우니까 농장원들이 회의를 열어서 박 교수님한테 맛이라도 좀 보시라고 햅쌀 다섯 톤을 인천항으로 보냈지 않았습니까?”

▲ 약전리 농장에서 복토직파법으로 재배한 벼를 콤바인으로 추수하는 장면(2006년 9월말경). [사진출처:한겨레신문 2006년 10월 2일자 인터넷판]

 

▲ 약전리 농장원들과 남측 농업 관계자들이 함께 모여 햅쌀로 떡 잔치를 하는 모습(우측 남성은 남측 관계자, 좌측 여성은 북측 농장원). [사진출처:한겨레신문 2006년 10월 2일자 인터넷판]

확인한 결과 북으로부터 감사의 표시로 쌀을 받게 된 박 교수와 복지재단은 인천항으로 보내준 쌀의 용도를 정부와 협의한 끝에 쌀 1포대당 2kg 단위로 포장을 해서 ‘평화의 쌀’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음력 설날에 실향민들을 대상으로 설날 차례용품으로 사용하도록 나눠 줬다고 한다. 인천항에 쌀이 도착했다는 뉴스를 접한 전북일보는 이 쌀의 일부를 전달 받아서 ‘평화의 비빔밥’ 행사를 개최해서 전주시민들과 함께 나눠 먹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부산지역의 고신대학교와 동의대학교에서도 역시 이 쌀의 일부를 전달 받아서 이듬해인 2007년 5월에 많은 대학생들과 교직원들이 ‘평화의 떡’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작년에는 정전협정 60주년 기념으로 경기도 최전방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유일한 민간인 마을인 남측의 대성동 마을주민들이 북측의 기정동 마을주민들에게 ‘평화의 떡’을 만들어서 전달했다. '남북 양측은 비무장지대 안에 각각 주민들이 거주하는 마을을 두어야 한다'는 정전협정 규정에 의해서 탄생된 두 마을은 그동안 10분 거리로 서로 마주 보고 무던히도 60년을 살아왔다. 분단 비극의 현실을 상징처럼 보여주는 양측 마을이 생긴 지 어느덧 60년을 맞이하여 환갑 기념으로 남측 마을에서 먼저 보낸 이 떡이야 말로 남과 북이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전국적으로 확대해야 할 ‘통일정신’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 부산 고신대 측의 ‘평화의 떡’ 행사 시작 장면. [사진출처: 고신대학교 제공]

아무튼, 미곡농장 당국자들과 농민들은 남측의 어느 농기계 개발학자와 구호단체가 자신들의 식량 증산을 돕고자 여의도 면적의 3배에 해당하는 협동농장이 큰 풍작을 이루도록 힘쓰고 애쓴 공로를 아직도 잊지 않고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루빨리 북측의 풍부한 자원들과 노동력이 남측의 자본과 기술에 접목되는 농업관련 남북교류 사업이 속히 재개되어야 하겠다.

두건으로 구별된 포전식구들과의 탈곡작업

내가 벼베기 작업을 하면서도 농업과 관련한 여러 질문들을 마구 쏟아내자 안내원과 농장 책임자는 어디론가 손전화를 걸어 내 질문에 답변을 할 만한 인물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농업관련 국가정책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관리 한명이 근처에 머물고 있는 것이 확인되어 이곳으로 불렀다고 한다. 나는 벼베기를 마치고 이동하면서 방금 합류한 관리와 책임 지도원에게 농업과 관련한 궁금하고 예민한 질문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 머리에 쓴 수건색으로 구분된 포전식구들과 탈곡작업을 하는 필자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농장 책임자들과 탈곡작업 현장에서(필자 우측부터 작업반장, 해외동포담당 관리). [사진제공:최재영]

“현재 조선(북한)의 농업 부문 인구는 모두 얼마나 됩니까?”

“예, 그전에 먼저 우리 공화국의 인구가 올 여름까지 정확하게 꽉 찬 2,500백만 명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올해 들어 가장 최근에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발표된 겁니다. 그중에서 농촌인구가 1,000만 명 정도가 되며 이중에서도 농업부문에 종사하는 일꾼들은 어림잡아 300백만 명 정도가 됩니다.”

“그러면 토지나 경작지 면적은 얼마나 되는지 알고 계시면...?”

“우리 공화국의 토지는 총면적이 1,200만 정보이고 농지면적은 260만 정보입니다. 그중에 실제로 경작하고 있는 농경지 면적은 230만 정보가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역시 그는 농업 행정전문가로서 다방면으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국가에서 끊임없이 교육한 결과로 보여졌다. 탈곡하는 장소에 도착하니 12명의 남녀 농장원들이 이미 탈곡에 열중하고 있었다. 여성 근로자가 10명, 남성 근로자가 2명이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남성 2명은 각각 탈곡기를 작동하고 관리하는 담당자였다. 탈곡기 여기저기에는 한문 표기로 된 상표들이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한 눈에 봐도 중국 제품으로 보였다.

나는 도착 즉시 탈곡기 옆으로 달려들어 볏단을 들어서 탈곡 투입구에 집어넣는 작업에 합류했다. 또한 탈곡 배출구로 이동해서 탈곡된 알곡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가마니에 담아 포장하는 작업도 도왔으며 탈곡을 마친 볏짚을 논바닥으로 옮기는 작업등 여러 가지 일들을 반복적으로 병행하며 일손을 도왔다. 나는 작업을 하면서도 나를 따라 다니는 농장 책임자에게 연신 질문들을 쏟아냈다.

“여기 작업하는 농장원 일꾼들은 서로 어떤 관계입니까?”

“여기 탈곡하는 일꾼들은 우리 분조에 소속된 두개의 포전식구들 입니다. 여기 일하는 열 명의 여성 일꾼들 머리를 자세히 보십시오. 다섯 명은 빨강색 수건을 쓰고 있고 나머지 다섯 명은 하얀색 수건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모두 같은 분조에 소속됐지만 포전 소속은 달라서 저렇게 수건으로 구분한 것입니다.”

“포전별로 농사는 각각 따로 짓고 탈곡은 분조가 같이 한다는 말씀인가요?”

“그게 아니고 애초부터 못자리, 모내기, 김매기, 비료나 농약주기, 잡초제거 등은 자기 포전식구들이 책임지고 해야 됩니다만 분조에 속한 다른 포전식구들도 서로 왕래하며 그런 일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벼베기나 탈곡작업은 어차피 기계가 하는 일이니 만큼 모든 일은 작업반 안에서 분조단위끼리 서로 협력해서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농장조직이 어떻게 편성되는지 좀 자세히 알려주세요. 사실은 저도 많이 헷갈립니다.”

“우리 공화국에는 오래전에 행정개편을 했기 때문에 ‘도’와 ‘군’과 ‘리’는 아직도 존속하고 있지만 이미 ‘면단위’가 없어졌지 않습니까? 그래서 각 군에는 작게는 20개 정도, 많게는 25개 정도의 큰 ‘리’가 조직돼 있고 그 ‘리’ 단위마다에는 큰 협동농장들이 있습니다.”

“아, 그럼 이곳이 바로 ‘리 단위 농장’ 이라고 보면 됩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관리장(관리위원장)과 리당비서가 있습니다. 또 부관리장(관리부위원장)과 기사장과 부기장이 있습니다. 부기장 아래는 또 부기원 두 명이 딸려 있단 말입니다. 게다가 작업반장, 노동지도원, 계획지도원, 통계원, 기술지도원이 아주 중요한 일들을 맡고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창고장, 마당장, 분조장들이 일 년 내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고 또 연구실 관리원, 선전원, 기동예술 선전대 등 관련 농업 일꾼들이 많이 속해 있는데 이들을 모두 합치면 대략 4-50명이나 됩니다.”

“그러면 포전제가 되고 나서도 저런 분들이 계속 농장에서 필요한 건가요? 포전제는 현재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각 ‘리’ 단위 농장은 또 다시 다섯 개 정도의 작업반으로 나눠져 있고 그 작업반은 다시 서너 개의 분조단위로 나눠집니다. 지금까지는 분조원이 대략 10-15명 정도 소속돼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는 이 분조는 다시 서너 개의 포전단위로 나눠졌습니다. 기존 식구들 중에서 나누기도 했고 아예 새롭게 인원을 조직하기도 했고 한 포전에 대략 다섯 명 정도로 조직돼 있습니다.”

“포전제라는 것이 원래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포전제는 원래 우리 공화국에서는 ‘부침땅’이라고 부릅니다. 토지정리 할 때 뙈기밭과 짜투리 논밭들을 정리해서 1,000평, 1,500평 2,000평 단위로 큼직하게 바둑판처럼 만들어서 부침땅을 만든 것이지요. 그러니까 토지정리를 끝낸 논밭을 포전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 포전을 서너 명의 식구들이 책임지고 열심히 농사를 지으라는 것입니다.”

“그럼, 분조단위는 아예 없어진 건가요? 제가 알기로는 포전제는 가족단위 위주로 조직된 것으로 아는데...?”

“아. 네. 포전제를 하면서 분조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분조장도 그대로 있고 분조원도 그대로 있습니다. 다만 효율적으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분조를 포전조직으로 나눈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분조장의 역할이 이전 보다 더 커졌단 말입니다. 꼭 분조식구라고 해서 한집에 사는 식구들로만 조직된 것이 아닙니다. 같은 집안에 로동력이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자기 집안식구들로만 조직된 포전도 있고, 이웃에 사는 친한 사람들끼리 조직된 포전도 있고, 집안식구들과 이웃들이 섞여 있는 포전도 있습니다. 포전인원과 조직은 사정에 따라서 모두 다르고 다양합니다. 중요한 것은 책임을 지고 자기들이 일한 만큼 수확을 가져가는 것이라서 열심히 일들을 합니다.”

“포전은 대략 한명 당 어느 정도 크기의 땅이 지급 됩니까?”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최 선생님은 미국에 사시면서 우리 조선의 농업을 어떻게 그리 많이 아십니까? 참으로 놀랍습니다. 한 명당 그저 1,000평(다섯 마지기)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우리 원수님께서 농업생산에서 대혁명을 일으키기기 위해서 연구하시던 중에 그동안은 모든 농장에서 수확량을 나눠줄 때 평균주의를 분배원칙을 삼았는데 그러다보니 평균주의는 농장원들의 생산의욕을 저하시키는 역효과 작용을 한다고 결론을 내리시고 이번에 이런 포전제 조치를 내리신 겁니다.”

“한 사람이 농사를 짓기에는 너무 일이 많은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땅을 더 받으면 좋겠는 말들을 합니다. 분조 단위를 포전제로 하고 나니 우리 조합원들은 아주 다들 좋아합니다. 넓은 땅을 무상으로 거저 받았고 본인 땅이나 마찬가지니까 이전보다 정신력과 생산열의가 더 켜졌단 말입니다. 열심히 할수록 식량을 많이 갖게 되니까니 그 어느 때 보다 작업에 대한 열성이 더 높아졌단 말입니다. 앞으로 우리 농장은 우리 당의 농사제일주의 방침을 관철하는데 가장 앞장설 것입니다.”

▲ 황해도 봉산농장 부근에서 포전식구들 끼리 벼베기를 하는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내가 볼 때 현재 전국 협동농장들은 포전제를 통해서 그동안 가장 말단 단위였던 분조단위 규모를 다시 가족 단위로 재 축소하면서 기존 분조단위는 더욱 철저하게 가족주의 개념 위주가 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포전제 구성원이 되려면 평소에도 포전식구들끼리 협력관계가 유지돼야 하며 노동공동체로서 서로 인간적 유대관계와 생계 활동관계에 있어서 상호 신뢰가 있어야만 포전식구가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일정에 맞춰진 시간 안에 벼베기와 탈곡 작업을 하다 보니 어느덧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기 위해 일손을 놓아야 했다. 모든 작업을 마치고 나니 내 마음이 날아갈 듯 기쁘고 몹시 흐뭇했다. 농장원들도 우리 일행을 향해 수고했다며 연신 고마움을 표시했다. 우리는 곧 바로 차를 타고 황해남도 지역을 향하여 이동하며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평야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끝없이 펼쳐진 평야들과 곡창지대들

황해북도를 벗어나서 차창 밖으로 펼쳐진 황해남도 재령평야 일대의 전경들이 차량의 속도에 맞춰 필름처럼 내 시야를 빠르게 지나갔다. 평야와 산맥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북녘의 산야들을 바라보노라니 그동안 수없이 공부했던 우리나라의 산맥들과 평야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오버랩 되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북은 전체 면적의 약 80%가 산지이고 나머지 20% 정도만 평지를 이루고 있는 산악국가인데다 그나마 80%의 산지는 산림이 많이 황폐화되어 있는 실정이고 나머지 20%의 농지로만 식량을 자급자족 해야만 하는 나라이다. 그러기에 산지와 평야를 이해하는 것이 식량문제를 해결하는데도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해 왔다.

우리나라의 최북단에는 마천령산맥이 남동방향을 향해 힘차게 뻗어 있고 함경북도에서 함경남도에 걸쳐 있는 함경산맥은 마천령산맥과 함께 십자형을 이루며 연결되어 있다. 그 함경산맥의 끝자락은 남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쭉 뻗은 낭림산맥과 연결이 되어 있고 낭림산맥은 서해방향을 향해 나뭇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갈라진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묘향산맥, 언진산맥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언진산맥 아래는 멸악산맥과 마식령산맥이 남서방향으로 이북의 중심부를 향해 힘 있게 펼쳐있는 구조이다.

또한 강원도 동해방향으로 태백산맥이 남쪽을 향해 시원하게 뻗어 있고 그 태백산맥에 붙어있는 광주산맥은 다시 서쪽 내륙으로 뻗어있는 것이 현재 북녘의 산맥 지도이다. 이들 산맥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여러 강줄기들이 황해와 동해를 향해 흘러 들어가면서 그 주변 유역에 충적평야와 준평원을 형성한 것이 오늘날 이북의 농경지대와 평야인 것이다.

▲ 추수를 마친 재령평야 전경. [사진제공:최재영]
▲ 아직도 벼베기를 안한 연백평야 일대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 조국의 평야들은 남이나 북이나 모두 서쪽 지역에 집중돼 있는데 특히 이남의 서해안에는 김포평야를 시작으로 김제, 나주, 논산, 안성, 예당평야들이 펼쳐 있고 만경강 유역에는 유명한 호남평야가, 남해안에는 낙동강 유역의 김해평야가 현대식으로 개발되어 드넓게 펼쳐져 있다. 그러나 이와 못지않게 이북의 평야들도 끝없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현대식 농지구획 정리도 매우 잘 되어 있었다.

이북의 서해안에는 박평평야를 시작으로 야천, 안주, 연백, 용천, 재령, 평양평야 등이 있고 동해안은 함흥평야, 수성평야가 있다. 이번에 내가 방북일정을 다 마치고 출국하는 시점에 미국에서 시인으로서 통일운동가로 활동하는 정찬열 선생 일행이 마침 나를 뒤이어 평양에 방문했다. 그들은 자동차를 타고 이북 전 지역을 횡단하기 위해 방문했다. 미국으로 귀국한 후 횡단일정을 마친 일행을 만나서 물어보니 이번에 함경북도와 자강도, 양강도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개 도 전 지역을 모두 횡단했다고 한다.

특히 원산이나 해주에 방문하니 고층 건물들과 호텔들이 서있는 것을 보고 놀랐으며 평안남도에는 청천강을 낀 ‘열두 삼천리벌’이라고 불리는 안주평야가 강서평야, 온천평야와 더불어 대풍작을 이룬 모습을 이었으며 평안북도는 박천평야와 더불어서 압록강 주변의 용천평야와 예성강을 낀 운전평야가 황금들녘이었다고 전했다,

이어서 그들이 함경남도 제일의 곡창 지대인 함흥평야를 방문해보니 성천강, 금진천을 끼고서 형성된 함주평야와 정평평야가 알곡이 풍성한 상태로 펼쳐져 있음에 놀라웠고 이어서 안변평야와 더불어서 영흥평야(금야평야라고도 불림)를 통과할 때는 고원군, 금야군 일대에 바둑판 같이 농지정리가 잘된 농토에 누런 알곡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벼베기를 마치고 논바닥에 세워진 모습들이 목격되어 관북지방 최대의 평야라는 명성을 실감했다고 한다.

특히 우리 일행이 재령평야 일대를 통과할 때 보니 과연 북녘의 쌀을 25~ 30%를 생산하는 최대의 곡창지대로서 손색이 없어 보였다. 안악군, 재령군을 통과하며 펼쳐지는 재령평야는 말 그대로 황금벌 곡창지대였다.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재령평야는 남동쪽에 자리 잡은 연백평야와 함께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구월산, 장수산이 그 광활한 대벌판 위에 위용을 뽐내며 우뚝 솟아 있었다.

또한 아직 벼베기를 하지 않은 연백평야는 말 그대로 황금들판이었다. 또한 주민들의 설명에 의하면 재령평야 일대는 여러 호칭으로 구분됐는데 ‘어러리 평야’, ‘재령나무리 평야’, ‘태상평야’ , ‘봉산나무리 평야’ 등의 토속적인 명칭으로 불렸으며 신천군 미군학살 박물관을 갈 때는 ‘재령나무리 평야’를 통과하기도 했다. 구월산, 장수산 양대 산맥의 계곡은 올 가뭄으로 비록 적은 양이기는 하나 계곡의 물들이 잔잔히 흐르며 드넓은 평야를 적시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했다. 또한 북쪽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눈앞에 보이는 해주시는 수양산 줄기를 타고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광석천을 따라 부근에는 남산 같은 작은 언덕배기들을 껴안고 장방평야와 신광평야 등을 펼쳐내고 있었다.

▲ 여성 해설사와 함께 서해갑문을 둘러보며(지난 4월 말경). [사진제공:최재영]

그뿐 아니다. 연백평야는 해방 전에도 우리나라 주요 곡창지대의 하나로 손꼽혀 왔던 곳이며 해방 전부터 관개시설이 잘 갖춰졌던 곳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구암저수지, 연백 제1호, 2호저수지에서 관개용수를 공급받고 있다고 한다. 특히 내가 지난 4-5월에 서해갑문에 방문할 때 목격했던 대규모 수로는 그 길이가 재령평야를 거쳐 연백평야에 이르고 있었으며 이 엄청난 수로공사는 이미 1990년 5월에 완공하여 관개시설을 갖추어 물 공급문제를 해결했다는 설명을 북측 관리로부터 들었다.

천지개벽 하듯 정리된 농경지들

이번 농촌지역 여행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대평야 외에도 일반 전답들도 대체적으로 규격화되어 있었다. 원래부터 내려오던 ‘유전적 평야’와 인위적으로 토지공사를 해서 조성한 ‘경지정리 평야’는 명확히 구분되며 이 두 종류의 평야가 현재 이북 쌀농사의 주축을 이루는 양대 산맥이다.

알려진 대로 해방 이전부터 내려온 무질서한 전답들이 가지런하게 정리되거나 평야로 변모한 것은 1998년부터 시작된 대단위 토지정리 사업 때문이라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98년 5월에 최전방 시찰을 위해 강원도 창도군을 지나던 중에 서로 얽혀있는 뙈기밭들을 보고 현지에서 관계부문 일꾼을 불러서 토지정리에 대한 교시를 내린 것이 시초가 되어 그 이후 전국으로 확대된 사업이라고 전해진다.

▲ 황해남도 토지정리 공사장에서 불도저들이 작업하는 모습. [<우리 민족끼리> 화면 캡쳐]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인 1998년 10월, 강원도를 시작으로 평안북도, 황해남도 등의 순으로 시행된 대규모 토지정리 공사는 전국적으로 도화선처럼 번졌다. 특히 김 국방위원장은 평북에서 토지정리 작업을 할 때는 나흘 간 현지에 머물면서 의욕적으로 진두지휘를 했고 "남조선 사람들이 한드레벌에 와보면 깜짝 놀라며 대단히 부러워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토지정리 사업은 농경지를 확대하거나 곡물생산을 증대하고 농촌기계화 실현에 그 목적이 있었으나 더 큰 중요한 이유는 봉건잔재를 청산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북의 언론과 정부는 토지정리에 대해 연속해서 “뙈기 논밭에서 봉건적 토지소유의 잔재를 발견하고 낡은 사회의 유물을 완전히 청산하기 위한 하나의 혁명으로 토지정리 사업을 내세웠다"고 강조한 것으로 보아 토지정리와 봉건잔재 청산은 직접적 관계가 있었다. 이제는 봉건주의를 청산해 나가는 조선식 사회주의로 인해서 남측에 사는 실향민들이 통일이 된후에 실제로 토지문서를 들고 이북의 옛 고향 땅에 찾아간들 아무도 자기 소유의 전답을 찾지 못하는 시대가 되고 만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전 국토의 토지정리 사업이 마무리되었고 이제는 온 나라가 세포등판 완공에 전력하고 있는 모양새다. 세포등판 사업은 강원도의 이천군, 평강군, 세포군의 세 개 군을 합해서 목장지대로 만드는 대규모 사업인데 이제 해외 동포들이나 남측의 동포들은 서울시 면적 보다 약간 더 큰 세포등판 목장에 소, 염소, 양 같은 가축들을 보내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번에 나는 협동농장을 비롯한 북녘의 다양한 주민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그들은 진정으로 남측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마음들을 발견했다. 2000년대의 활발한 남북교류를 통해서 북의 주민들이 서서히 남측 사람들을 형제라고 느끼기 시작했듯이 이제 다시 한번 북의 주민들을 품고 껴안을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북측 사람들과 먼저 마음의 통일을 이루기 전에는 진정한 의미의 통일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4월 중순경, 평양에 체류하는 중에 고려호텔 객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오다가 문득 객실 TV에서 방송되는 CNN뉴스 특보를 통해 세월호 침몰 속보를 처음 접했다. 그날 이후로 안내원들은 시시각각으로 들려오는 세월호 뉴스를 우리 일행들에게 직접 전해주기도 했으며 그 기간에 만났던 북녘의 주민들도 우리처럼 세월호 사건에 대해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들도 북측에서 일어나는 안타까운 일들에 대해 가슴 아파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장 시급한 것이 농업지원과 식량지원이다. 그것은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에 민족화합과 통일을 위한 지름길이다.

이북은 매년 풍년이 왔다 해도 그것과는 별도로 구조적으로 반드시 타국에서 쌀이 반입되어야 한다. 적어도 1년에 평균 50~100만톤 정도의 쌀이 반입돼야 북의 주민들이 여유 있게 먹고 살 수가 있다고 본다. 특히 고난의 행군 시기부터 최근까지 빈번한 홍수, 가뭄, 냉해 등의 자연재해가 연속으로 닥쳤다. 비료가 부족하면 수확한 벼에 쭉정이가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전국적으로 비료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탈곡 전에 논에 벼를 말리는 시기에 억수같은 비가 많이 내려 수확을 방해한 경우도 허다했다. 이처럼 북에는 그동안 식량 부족을 유발한 많은 불가항력적인 외적 요인들이 다방면에서 발생하여왔다.

그뿐 아니라 전 국토의 80%가 산악지대이고 나머지 20%의 농지에서 식량을 자급자족해야만 하는 나라이다 보니 완전히 식량자립이 될 때까지 외부 원조를 받지 않으면 식량부족 사태는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먹는 양식을 장만해주는 일은 가장 기본적인 인권에 해당되는 일이기에 가장 정직하고 보람된 일이다. 이데올로기와 정치적인 것을 떠나서 우리 민족 고유의 농업정신을 통해 남북이 서로 사심 없이 왕성한 농업교류를 하며 나눔의 마음으로 서로를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계속)

 

한국 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미국 The Light of Glory Church 담임목사 역임
소셜무브먼트그룹 NK VISION 2020 설립 & 대표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장 & 동북아종교위원회위원장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해외총회 남가주노회 소속
미국 풀러신학교 대학원 선교목회학 박사
미주장신대학교 대학원 구약학 석사
미주총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석사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철학교육학
안양대학교 신학과 同 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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