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사람들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요?”

이런 질문은 아주 오래 전부터 받았지만 마땅한 대답을 내놓기 어려웠다. 그저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알게 된다’는 흔해 빠진 말만 되풀이 할 뿐이다.
하지만 미술작품을 제대로 보는 방법은 있다. 단지 어렵기 때문에 쉽게 풀어 설명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에는 크게 철학적 관점과 조형적 관점이 있다.
물론 이 두 가지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미술은 철학적 내용을 미술 조형적 방식으로 풀어내어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 철학이 우선하고 조형이 뒤따른다. 철학과 조형방법이 형식이나 양식으로 통합되면 그 안에 다양한 내용이 담긴다. 이때부터는 형식이 우선하면서 내용을 끌고 같다.

서양화가 어려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큰 것은 철학적인 것이다.
서양화를 이해하려면 서구의 핵심사상인 ‘인본주의’를 알아야 한다.
인본주의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철학이다. 미약한 인간의 존재를 신의 경지까지 끌어올리고자하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한계의 상징이다.
하늘을 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 비행기이고, 빠르게 달릴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 자동차이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 소식을 전할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한 것이 전화기이며, 맹수나 적을 일당백으로 제압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총이나 대포이다.
이렇게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며 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런 영웅은 ‘도전, 탐험, 개척, 실험, 모험’이라는 다섯 가지 미덕을 가지고 있다.

서구의 미술에서 이러한 인본주의 사상에 충실한 작품이 곧 명작이 된다.
그리스로마풍의 취향과 아름다움을 부활시키고자 했던 신고전주의, 인간의 주관과 감정을 표현한 낭만주의, 인간의 눈으로 자연을 재해석한 인상주의, 원시적인 삶의 영역까지 확장한 고갱, 원자와 분자로 새로운 사물을 탄생시킨 세잔, 꿈의 세계까지 인식의 지평을 연 초현실주의, 실험정신으로 신이 만든 형태를 부셔버린 모더니즘 따위는 모두 인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한 인본주의 사상에 위배되는 사회나 개인에게는 가혹한 비판과 풍자를 담은 그림도 창작된다.
그래서 인본주의 사상을 담은 서양그림을 보면 본능적으로 몸이 긴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강렬한 영감을 받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과 위압감을 느낀다고 한다.

부차적인 이야기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인간의 관점에서 창조한 세상을 보여준다. 최근 연구발표에 의하면 [모나리자]의 모델이 정갈한 귀부인이 아니라 다빈치의 동성애 연인이자 제자인 ‘살라이’라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철저한 인본주의자였다. 이런 그가 종교적 냄새가 풍기는 그림을 4년씩이나 질질 끌며 그렸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모나리자]는 제목과는 달리 인간의 욕망이 담긴 그림이다. 그렇다면 정갈한 귀부인보다는 동성애 연인이라는 인간적인 욕망이 더욱 잘 어울린다.

▲ 복숭아나무와 잉어/심규섭/디지털회화/2014.
출세와 다산을 뜻하는 등용문의 잉어, 지조와 장수를 뜻하는 괴석, 장수와 이상세계를 뜻하는 복숭아를 결합한 그림이다. 하지만 사물에 붙은 상징을 무시하고 직관적으로 해석하면, 잉어의 힘찬 파닥거림은 생명력의 충만함이고 괴석은 변하지 않는 생명의 힘이며, 복숭아나무의 열매는 생명력의 만개가 된다. 작은 그릇에 바다가 담기고 다시 그 위에 바위와 복숭아나무를 그린 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4차원적인 상상력의 산물이다. 이것은 확대원근법의 조형원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방법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우리에게 서양의 미술작품이 어려운 것은 인본주의의 눈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관점으로 서양의 그림을 본다.
우리에게 영웅은 남극을 탐험하고 높은 산을 정복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공동체의 가치를 위해 희생하는 존재로 수용된다. 탁월한 개인의 큰 걸음보다 많은 사람이 함께 하는 작은 걸음을 소중히 여기는 사상이 깔려있다.
이런 조건에서 서양그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리고 그뿐이다. 그림에 관한 설명은 마치 관광 상품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과 비슷하다. 혹은 모르는 내용을 공부하는 자세를 취한다. 내용을 안다고 감동하는 것은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이기는 하지만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될 지는 의문이다.

조선시대의 그림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본 선비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이상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희열에 넘쳤을 것이다.
춥고 깊은 밤에 하얀 매화를 보는 조선의 선비들은 온몸에 전율이 왔을 것이다. 특히 귀양을 와 있거나 학문적 소신을 부정당하는 현세를 한탄하는 선비에게 매화, 대나무, 국화, 파초, 괴석 따위를 그린 그림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다.
학문이라는 무게, 혹은 낡은 학문에 의해 억압받았던 사람들에게 화려하게 채색된 [책가도]나 [책거리그림]는 커다란 해방감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힘들고 지친 현실에서 실낱같은 꿈이 필요했던 사람들에게 [십장생도]는 새롭고 희망적인 세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평균수명 40세 전후의 사람들에게 장수를 담은 그림이, 가난에 찌든 삶을 위로해줄 모란도가 필요했을 것이다. 평등하게 살고자 했던 마음에 [연화도]와 [등용문그림]과 같은 출세그림이 불을 지폈고, [신선도]를 통해 세상살이의 근심을 덜었다.

우리그림에는 신과 대적하고 세상을 바꾸는 영웅의 이야기는 없다. 개인적 영웅보다는 공동체의 가치를 우선했다.
모든 사람들의 인간적 욕망은 동일하다. 하지만 우리는 욕망을 구현한데 있어 자연의 질서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다. 오히려 자연의 질서와 섭리에 맞추고자 발버둥쳤다. 이것은 서양과 우리나라의 사상의 커다란 차이점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체제 순응적인 것은 아니다.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거나 인간적 도리에 어긋나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세계에서 반제의 깃발을 처음 든 동학혁명도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

예술의 역할은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다.
다른 말로 더욱 길고 넓고 시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 사람들이 인식하는 공간이 넓어지면 삶의 다양함과 풍부함이 만들어진다. 개인의 관점이 아니라 지구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또한 시간이 길어지면 지식과 지혜가 쌓인다. 이것은 세대와 세대를 연결시키고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합함으로써 육체적 한계를 극복한다.
결과적으로 시공간의 확장은 전쟁과 약탈, 개인적 탐욕에 따른 살인, 폭력 따위를 없애고 자연의 질서에 맞는 사회공동체를 창조하는 바탕인 것이다.

미술이 확장하는 시공간의 중심에는 인간과 생명이 있다.
귀신들이 사는 곳, 외계인이 사는 곳 따위는 예술이 창조하는 시공간에 포함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생명이 없는 곳, 생명이 살 수 없는 곳도 확장의 대상이 아니다. 사막이나 깊은 해저, 남북극지대까지 공간을 확장한 것은 그곳에 사람에게 필요한 자원이 있기 때문이다.
전화기나 인터넷을 통해 시간을 늘리는 것도 사람과 사람, 생명과 생명의 관계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예술의 주인공은 언제나 사람이자 생명이다. 자연풍경이나 동물, 정물을 그려도 결국은 사람의 의인화나 상징에 불과하다.
결국 모든 예술의 핵심바탕에는 ‘생명’이 있다. 생명이 없는 어떤 사상도 껍데기에 불과하다. 생명이란 개념 속에는 ‘생명의 존엄’, ‘생명의 절정’, ‘생명의 확장’, ‘생명의 영속성’, ‘생명의 교류’, ‘생명의 정화’ 따위가 포함된다.

▲ 소과도/심규섭/디지털회화/2014.
소과도蘇果圖는 채소나 과일이 있는 그림을 말한다. 이건 제목이 아니라 마땅한 제목이 없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붙인 것이다. 탁자 위에 병과 그릇이 놓여있고 그릇에는 포도가 수북하게 담겨 있으며 병에는 복숭아나무가 꽂혀있다. 작은 병에 복숭아나무가 꽂혀있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그림에서는 자연스럽다. 흔히 포도는 다산의 상징이라고 하지만 원래는 별 상징이 없다. 복숭아나무와 열매는 장수와 다산을 뜻하고 나비도 장수를 뜻한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감상하면 생명의 풍요로움으로 수용된다. [자료사진 - 심규섭]

우리에게는 오래전부터 생명사상이 발전해왔다.
‘풍류風流’가 그것이다. 풍류는 신라의 화랑, 고려의 불교, 조선의 유학에 담긴 삶과 철학의 핵심이었다. 또한 현 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삶의 바탕이다.
풍류는 곧 ‘접화군생接化群生’이라고 했다. 이는 ‘모든 생명과 만나고 어우러져 발전해 나간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우리그림인 궁중회화나 수묵화, 민화 속에 담긴 핵심 철학은 풍류이다.
우리민족을 대표하는 그림인 [십장생도]는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 혹은 생명의 완성된 세상을 표현하고 있다. [궁중모란도]는 생명의 만개를 표현하고 있으며, [화조도]는 생명의 조화와 확장을 담고 있다. 선비들의 수묵화에는 물질적으로 부족한 삶을 풍류와 유유자적한 삶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또한 대중그림인 민화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욕망을 뭇 생명의 가치와 연결시켜 표현하고 있다. 무엇보다 강력하고 원초적인 욕망을 통해 낡고 지친 생명을 정화하는 ‘신명’을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그림은 편안하고 평화롭다. 인간적인 느낌이 들고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그림에는 어떤 비판이나 풍자의 내용이 없다. 또한 괴로움이나 죽음, 고통, 발버둥, 고독, 눈물, 슬픔 따위의 감정도 표현되어 있지 않다. 물론 도전, 탐험, 개척, 실험, 모험 따위의 영웅적 가치도 없다.
그림을 감상하고 있으면 마음의 정화가 일어난다. 두고두고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한다.
은유나 복잡한 뜻을 숨기지도 않는다. 그림은 아주 직관적이다. 척 보면 누구나 알 수 있고 누구나 공감한다.

우리그림은 궁중회화, 수묵화, 민화, 동양화, 한국화 따위로 구분되어 있다. 하지만 생명을 바탕으로 하는 핵심사상과 확대원근법의 조형원리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그림은 생명사상을 담고 있는 그림, 풍류의 내용과 형식을 담고 있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풍류화風流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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