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


10월 이후 남북관계는 점점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북한의 인천 아시안게임 특사파견으로 대화국면이 열리는 듯했지만, 서해상의 군사충돌과 이른바 대북삐라 살포문제로 남북관계는 급격히 경색되기 시작했고, UN에서의 대북인권결의안 처리와 전작권 무기연기를 선언한 제46차 한미안보협의회(SCM) 결과 등으로 인해 남북관계는 거의 전면적인 경색 상황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냉전형’으로 회귀하고 있는 남북관계

10월 들어와 북한은 각종 대남 담화와 성명을 쏟아내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대북삐라 문제 등 이른바 박근혜정부의 ‘원칙적 대북정책’과 관련된 문제, 한.미.일 해상합동훈련과 ‘맞춤형 억제전략’ 등 대북 군사공세 확대문제, 전작권 전환 연기 등 제46차 SCM 결과 관련, 그리고 유엔 대북인권결의 배격 등의 내용들이다.

특히 유엔 대북인권결의안이 처리된 이후인 지난 11월 20일, 북한 외무성은 “우리의 전쟁 억제력은 무제한 강화될 것”이라며 4차 핵실험을 암시하였고, 북한의 최고 권력기구인 국방위원회는 11월 23일 “초강경 대응전에 진입할 것”이라면서 “이 땅에 핵전쟁이 터지는 경우 과연 청와대가 안전하리라고 생각하는가”라며 위협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북한의 이런 노골적인 위협 언사의 이면에는 “조선반도에서 핵위협.핵전쟁의 위험은 미국과 괴뢰패당에 의해 엄중하게 조성되고” 있다는 인식이 존재하고 있다(조평통 서기국보도, 10. 29). 북한이 말하는 핵전쟁의 위협은 핵선제타격을 전제로 하는 ‘맞춤형 억지전략’이나 한국의 킬체인(Kill-Chain)과 미국의 전략 핵폭격기 공격을 포함하는 ‘포괄적 미사일방어전략개념’ 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남북관계의 이러한 경색 상황은 사실상 ‘냉전형 남북관계’로의 회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냉전형 남북관계’란 “적대감의 고조로 협상을 성사시킨다고 하더라도 상호신뢰를 구축하기 어렵”고 그래서 “대화가 곧잘 중단되고, 어쩌다 유의미한 합의가 나와도 끊임없이 그 실행을 둘러싸고 갈등이 재현되는” 관계를 말한다(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 창비: 2012).

남한이 북한에 고위급회담을 계속 요구하면서도 북한이 요구하는 군사회담에는 거부 혹은 ‘격을 낮추는’ 등의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나, 한.미가 북한이 요구하는 평화체제로의 한반도 현상변경에 대해 철저히 ‘정전협정과 유엔사의 고수’(제46차 SCM 공동성명)를 강조하는 것은 냉전시대에 익히 보던 전형적 장면들이다.

더 심각한 것은 박근혜정부 등장 이후 막대한 군비경쟁과 핵 충돌 위기의 심화가 크게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한‧미의 ‘확장 억지’ 강화에 맞서 핵무기 소형화와 발사능력의 다양화를 추진하고 있는데, 미국의 정보당국 일각에서는 북한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개발 단계 중 하나인 미사일 수중사출(射出) 실험설을 제기하고 있다(<조선일보>, 11. 22).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은 ‘맞춤형 억지전략’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수중 핵탄두 미사일공격능력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결국 아무리 억지력을 통한 ‘힘의 우위’를 강화한다 하더라도, 군비증강과 핵능력 강화의 악순환은 결코 종결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이 말하는 남북관계 개선의 조건

이러한 상황에서 박근혜정부는 ‘대북정책의 원칙’을 지키면서 대화를 재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박근혜정부가 말하는 ‘대북정책의 원칙’은 삐라살포와 북한인권법 등 북한압박과 관련한 ‘강인한’ 입장의 견지를 말한다.

박근혜정부는 이와 함께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투명성만 담보된다면 북한의 농업·산림지원 사업에 소규모 비료지원”을 고려할 수 있다든가 혹은 “남·북·러 합작 물류 사업인 나진-하산 프로젝트” 등의 경제적 유인을 언급하고 있으며, 일부 민간단체들의 방북과 접촉을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 박근혜정부는 이렇게 해도 북한 김정은정권이 경제적‧외교적 고립을 탈피할 길이 남북관계 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남북대화에 나설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북한은 박근혜정부의 대북대화 제의가 대결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대화공세’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으며, 정부의 대북삐라 살포 방치 등이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의 상호비방금지 약속을 어긴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또 대북인도지원과 일부 사회문화교류의 제한적 허용에 대해서도 부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북한은 정부 통제 아래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민간교류나 대북지원은 대북 대결정책의 눈가림이자 정권홍보수단이라고 보고, 현재로서는 남한 민간단체의 대북인도지원을 아예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북한의 입장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문건은 지난 11월 15일에 발표된 북한 국방위원회의 성명이다. 이 문건에서 북한 국방위원회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3원칙으로 ① 반공화국 대결소동 중단, ② 남북간 합의의 준수, ③ 대통령과 당국자들의 민족화해와 단합에 부합하는 처신 등을 제시하였다. 이는 북한이 기본적으로 대화의지는 가지고 있지만, 남한 당국의 대결정책이 지속되는 한 남북관계 개선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의 천명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 국방위원회의 이 제안은 사실 단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되고 있다. ‘반공화국 대결소동 중단’이란 결국 대북삐라살포 저지 등을 의미하며, ‘남북간 합의 준수’도 좁은 의미로 해석하면 제1차 고위급회담의 비방중상금지 합의 준수 요구이고, ‘민족화해와 단합에 부합하는 처신’의 의미도 역시 대통령과 당국자의 비방중상 발언 중지 요구일 것이다. 즉 북한이 요구하는 것은 남측 당국이 대북인도지원이나 5.24조치 해제 등을 말하기 전에 먼저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합의한 ‘상호비방금지 약속’부터 지키라는 것이고, 그것만 지킨다면 남북관계 개선에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정부의 두 가지 길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남북관계 타개와 관련하여 박근혜정부가 취할 수 있는 길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박근혜정부가 말하는 ‘원칙적 대북정책’을 일관성 있게 고수하여 정전체제의 현상유지와 북한 압박 강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북한 (단계적) 흡수라는 한반도의 현상변경을 추구하는 길이다.

이것은 ‘이명박의 길’이라 할 수 있는데, 현재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북한인권법’ 강행 통과 등 대북압박수단을 총동원하여 북한의 변화를 추구하는 노선이다. 이명박정부는 선 북핵문제 해결을 내걸고 군사적 억지력과 함께 민간교류를 포함한 모든 수단을 대북 압박카드로 활용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대북 레버리지를 모두 상실하였다.

박근혜정부는 거기에 ‘북한인권’ 공세의 확대를 대북 압박수단에 추가하고 있는 셈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김정은정권의 북한식 경제개혁 정책이나 러시아.중국 등과의 다면외교가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상황에서 박근혜정부가 원하는 궁극적 ‘현상변경’(북한 붕괴 내지 흡수)은 물론이고, 당면하게는 북한의 굴복에 의한 ‘대화국면의 형성’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북한으로부터 신뢰형성에 대한 협력을 얻을 수 없는 조건하에서는 일시적 요인으로 대화가 추진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 대화가 ‘지속성’을 가지기는 어렵다. 앞서 말했듯이, 신뢰 형성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단절적 대화는 ‘냉전형 남북관계’의 한 전형이다.

박근혜정부가 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은 ‘닉슨의 길’이다. 박근혜정부와 미국의 닉슨정부는 모두 민주화운동세력이 새로운 진보의 시대를 만들어내지 못한 사회적 불안정 속에서 탄생하였고, 또 진보적 이슈의 포섭에 뛰어나면서도 일인통제적이며 비밀주의적인 리더십 스타일을 유지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닉슨은, 개인으로서는 불명예스럽게 퇴진하였지만, ‘위장된 보수’라는 반발을 무릅쓰면서 진보적 이슈의 실질적 도입과 함께 역사적인 ‘미.중데탕트’를 추구하였고, 그 결과 그는 미국 정치사 최고의 보수 전성기를 연 인물이 되었다.

박근혜정부가 ‘닉슨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최소한 북한이 상호체제인정의 초기조처로 강조하는 ‘비방중상금지’의 합의부터 지키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북한은 남북관계 개선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자, 남북간 신뢰형성의 핵심 기준을 비방중상금지 합의의 이행으로 보고 있다. 비방중상금지의 내용에는 대북삐라 살포 저지는 물론 ‘북한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목적으로 하는’ 북한인권 공세의 자제, 국제무대에서의 북한체제 비난이나 그에 동조하는 행위 중단 등이 포함된다.

비방중상금지에 대한 박근혜정부의 태도 변화는 당장 ‘북한인권법’ 논의에서부터 반영되어야 한다. 그리고 광복 70주년이자 6.15공동선언 발표 15주년을 맞는 2015년의 대통령 신년메시지 등에서 기존의 남북 당국간 합의 존중의 입장을 확실하게 밝히는 등의 조치가 뒤따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약 국회에서 ‘북한인권법’이 강행 통과될 경우 북한의 4차 핵실험이 예상되는 것은 물론이고, 박근혜정부 하에서의 남북관계는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이 정부 하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포함하여 남북관계의 변화를 제대로 추진하려면 내년 봄이 오기 전에 앞서 말한 조치들의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시기를 놓치게 되면 설사 대북정책의 전환을 추진한다 하더라도 국내외적 여러 요인들로 인해 남북관계 발전은 제한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래서 다가올 겨울은 남북관계라는 측면에서 박근혜정부에게는 다시 오지 않는 ‘골든타임’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승환은 1958년 경북 포항에 태어나, 고려대 경제학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정치학 석사)을 거쳐 경남대 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승환은 통일맞이 정책위원장, 열린정책연구원 정치아카데미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이며, 또한 민화협 집행위원장,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15년여에 걸쳐 남북 민간교류 활동을 전개해왔으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6.15남북공동행사 등을 진행해왔다.

그가 쓴 글로는 “문익환,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다”(창작과비평, 통권 143호, 2009), “6월항쟁 20년, 남북 및 북미 관계의 변화와 통일담론”(창작과비평, 통권 137호, 2008), “2000년 이후 대북정책담론 연구”(북한대학원, 2008) 등이 있다.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lsh2k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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