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현지지도 후 북측 매체들이 연일 '반미·계급교양' 강화와 '반미대결전'의 결의를 벼르고 있는 황해남도 신천군 '신천박물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지난달 25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황해남도 신천군 신천박물관을 현지지도하는 모습. 박물관내 벽면에 '미제는 신천강점 52일간에 3만5천 383명 학살' 군 인구의 4분의 1 남자 1만9천149명, 여자 1만8천 234명'이라고 쓰여있다. [사진-노동신문 캡쳐]

신천박물관은 어떤 곳인가?

북측은 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17일부터 12월7일까지 50여일 동안 미군이 황해남도 신천군 전체 군민의 1/4에 달하는 3만5천383명을 잔인하게 학살했다고 주장하며, 이 곳 밤나무골에 신천박물관을 세우고 대표적인 반미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은 해방 이후 신천군 인민위원회 건물로 사용되던 것을 한국전쟁 중 미군이 점령해 사령부로 사용한 곳이며, 지난 1958년 3월 26일 박물관으로 창립했다. 일부 자료에서 1960년 6월 25일 개관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지난 2008년 3월 27일 재일 <조선신보>에 '신천박물관 창립 50돌 기념보고회' 개최 소식을 전하고 그해 5월 27일 <조선중앙통신>이 이를 확인한 것으로 미루어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은 1관 16호실, 2관 3호실 등 2개 건물에 총 19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학살 관련 유물과 자료, 폭격 피해, 세균전 및 화학전에 대한 자료 수천 점을 전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백어머니 묘'와 '백둘어린이 묘' 등 희생자들의 합장묘는 미군의 학살자료를 실증하는 장소로 보존하고 있다.

박물관내 벽면에는 '미제는 신천강점 52일간에 3만5천 383명 학살' 군 인구의 4분의 1 남자 1만9천149명, 여자 1만8천 234명'이라고 쓰여있다.

전쟁중 이곳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북측의 주장은 1952년 3월 3일부터 19일까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중국, 벨기에, 브라질, 폴란드 등 8개국에서 온 교수, 판사, 검사, 변호사 8명으로 구성된 국제민주법률가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 조사위원회가 미군 학살에 대한 조사 작업을 벌인 후 발표한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개별 사례별로 수백명의 증언을 듣고 관련 자료와 증거를 조사한 후 1952년 3월 31일 발표한 '코리아에서의 미군 범죄에 관한 보고서'의 신천 부분에는 "미군이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신천을 점령했으며, 그 기간에 일어난 여러 학살들이 미 점령사령관 해리슨의 명령에 따라 자행되었고 그 현장에 그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해리슨은 1950년 12월 7일 신천에서 철수하기 직전 그의 휘하에 있던 미군 부대와 이승만의 원군 장교들에게, 철수는 일시적이며 전략적 이유에 따른 것이라며 주민들에게 미군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지시하라고 명령했다. 또 남아있는 자는 모두 실질적 적으로 간주할 것이며 모든 '빨갱이'지지자들을 섬멸할 것을 지시했다. 그의 명령은 그대로 실행돼 그날 신천군 원암리의 창고 두 군데에서 900명의 남녀 학살이 발생했으며, 건물안에는 어린아이들도 200여 명이 있었다.

▲ '사백어머니 묘'와 '백둘어린이 묘' 등 희생자들의 합장묘. 신천박물관은 해방 후 신천군 인민위원회 건물로 사용되던 것을 한국전쟁 중 미군이 점령해 사령부로 사용한 곳이며, 지난 1958년 3월 26일 박물관으로 창립했다. 일부 자료에서 1960년 6월 25일 개관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출처-위키백과]

오랫동안 남측에서는 묻혀있었던 이 사건은 2001년 소설가 황석영 씨가 발표한 '손님'이라는 소설을 통해 파란을 일으키며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황씨는 소설 후기와 여러 인터뷰에서 '신천대학살' 사건을 미군 점령 치하에서 벌어진 사건인 만큼 미국의 책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진실은 서구에서 들어온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발생한 동족학살이었다고 언급했다. 미군은 신천에 주둔하면서 군민을 학살한 것이 아니라 단지 두시간 동안 머물다 지나쳐 갔을 뿐이라는, 국제민주법률가협회 보고서와는 전혀 다른 내용의 전사(戰史) 기록이 주된 근거였다.

또 문화방송은 2002년 4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망각의 전쟁 편' 프로그램에서도 "당시 미군은 평양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붙어 신천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면서 미군에 의한 것이기 보다는 당시 점령지 관리를 맡게 된 신천지역 반공청년단에 의한 학살이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미군 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는 2002년 5월 4일 보고대회를 통해 '신천대학살'에 대한 앞의 두 견해를 정면 반박하고 '한국전쟁 시기 황해도 신천지역에서 저질러진 일련의 학살이 미군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공식 발표했다.

전민특위는 2000년부터 한국전쟁 전후 미군에 의해 자행된 학살만행들을 조사하기 위해 국제적인 저명인사들로 국제조사단을 구성하여 남북을 오가며 진 상조사 작업을 벌여 온 터였다.

당시 전민특위는 성명서에서 "한국전 당시 작전지휘권이 맥아더에게 있던 상황에서 미군은 수천명의 민간인을 탄압하고 죽이는데 있어서 이승만 정권의 군, 관, 경찰 세력과 합세했었다"며, "황해도 신천지역에 미군은 이승만 정권의 극우청년대와 함께 진주했고, 1950년 당시 신천의 인구수는 140,000명이었지만, 미군이 남으로 철수한 후 그해 겨울의 인구수는 고작 10,5000으로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또 전민특위 국제자문위원들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실제로 그곳에 있었던 다수의 주민들과의 대담을 통해 'Harrison D. Madden'과 'Catain York' 두 명의 미군장교를 확인"했으며, "밀폐된 공간에서 가솔린으로 불을 내 민간인을 살해한 곳과 총으로 학살한 곳 등 세 곳의 학살지를 방문해 증거를 확인했다"고 명확히 밝혔다.

한편, 신천 출신 월남자들은 오랫동안 신천대학살에 대해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노동당과 인민군에 대항한 우파 지하조직과 신천군민의 저항이며 반공투쟁 사건"이라고 해석하거나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을 앞두고 선발대로 신천에 들어온 우익 청년들이 좌익활동가들에게 보복을 가하던 중 미군 폭격과 겹치면서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이 발생한 일이라고 주장해왔다.

가해자로서의 해명 또는 변명이었지만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는 사실까지 부정하지는 못했으며, 해리슨이라는 장교가 당시 주둔 미군 명단에 없다는 정도의 빈약한 논거를 제시했으나 이마저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은 해리슨의 지휘아래 황해남도 장연군에 있는 '락연광산'에서도 802명의 노동자와 주민을 깊이 110m의 광산 수직경에 산채로 차넣어 학살당한 사건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왜 신천박물관인가?

게르니카와 더불어 파브로 피카소의 대표적인 반전작품을 꼽히는 1951년작 '한국에서의 학살(Masacre en Corea)'은 이 신천대학살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지난 1980년대까지 남측에서는 '금지미술'이었다.

그림 속 총을 들고 겨냥한 군인들 앞에 알몸으로 노출된 여인들과 엄마 품에 매달린 갓난아이, 흙장난 하고 있는 철부지, 공포에 떨며 엄마에게 안겨드는 아이들의 모습이 새삼 그날의 참상을 말해주는 듯 하다.

게르니카와 더불어 파브로 피카소의 대표적인 반전작품으로 꼽히는 1951년작 '한국에서의 학살(Masacre en Corea)'은 이 신천대학살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지난 1980년대까지 남측에서는 '금지미술'이었다. [사진출처-위키백과]

"미제 살인귀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집단적으로 불태워 죽이고 생매장하였으며 굶겨죽이고 얼구어 죽이었을 뿐아니라 어린이들을 어머니품에서 강제로 떼내여 화약창고에 가둔 다음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죽였다고, 사람들의 머리에 못을 박고 사지를 찢어 학살하는 귀축같은 만행도 꺼리낌없이 감행하였다."

<노동신문>이 지난달 25일 김정은 제1위원장의 신천박물관 현지지도 소식을 보도하면서, 김 제1위원장이 준절히 말했다고 전한 내용이다.

과거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신천박물관은 미제와 계급적 원쑤들의 귀축같은 만행을 보여주는 축도이며 역사의 고발장'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같은 사연이 있는 곳이기에 북한은 박물관 설립이래 이 곳을 대표적인 '반미·계급 교양장소'로 활용했다.

전쟁발발일인 6월 25일부터 휴전협정체결일인 7월 27일까지 북한에서 반미공동투쟁월간으로 정한 기간에는 하루 평균 5천여 명에 달하는 참관자들이 박물관을 찾고 있으며, 이 기간에 청년학생과 농업근로자, 노동자 및 직업동맹원, 여맹, 군 장병들이 복수결의모임, 성토모임 등을 매년 개최한다. 물론 매년 당시 미국과의 관계에 따라 규모나 강도는 달라진다.

박물관 건립이후 올해 6월까지 56년간 무려 1천700만명이 이곳을 찾았으며, 422만 5천465명이 강사들의 해설강의를 들었다고 신문은 전했다. 2008년 개관 50년 통계에 따르면, 1천 540만 여명의 참관객 중 해외동포가 22만 여명, 외국인도 3만 여명에 달한다.

특히 이번 현지지도에서 김 제1위원장이 새 세대들에게 계급교양을 강화하는 것은 더욱 절박한 문제라고 강조한 이래 신문은 과거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일화 등을 소개하면서 이를 내용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신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지난 1998년 11월 신천박물관 방공호 입구에서 "지금 일부 사람들은 신천박물관을 반미교양장소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게 외곬으로만 볼 필요가 없다고, 미제침략자들이 계급적 원수들, 주구들을 앞장에 내세워 학살만행을 감행한 것만큼 신천박물관은 반미교양장소일 뿐아니라 계급적 원수들에 대한 증오심과 투쟁정신을 높여주는 중요한 계급교양장소로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사람들이 계급적 원수들에 대한 비타협적인 투쟁정신을 가지지 못하다보니 적들과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무맥하게 죽었다"고 언급했으며, 김 주석도 생전에 "신천땅에서 무려 수만명의 인민들이 무참히 학살된 것은 해방 직후에 계급교양을 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신문은 '적에 대한 환상은 곧 죽음'이라며, 계급의식 고취와 '반미대결전'을 연일 독려하고 있다. 바야흐로 미국과의 전면전을 불사하려는 결속을 이곳 신천박물관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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