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산 성곽 : 혜화문~동대문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대통령을 만들고, 떠나보낸 곳 <이화장(梨花莊)>

이제 다시 <비우당>을 거쳐 다시 낙산 정상에 위치한 공원으로 올라간다. 이 공원을 거쳐 약 300미터 쯤 성안으로 들어가면 이승만의 마지막 별장 <이화장(梨花莊)>이 보인다. 혜화문 근처의 <돈암장>과는 또 다른 별장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의 거처변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호텔(1945. 10. 16 귀국) → 돈암장(1945. 10월말~1947. 8. 25) → 마포장(1947. 8. 25~1947. 10. 18) → 이화장(1947. 10.18~1948. 8. 22) →경무대(1948. 8. 22~1960. 4. 28) → 이화장(1960. 4. 28~1960. 5. 29) → 하와이 망명

이화장이 위치한 곳은 이화동이며, 이 일대는 본래 배밭이었고, 중종 이전부터 이화정(梨花亭)이 있어서 '이화정동(梨花亭洞)'이라 불리던 곳이다. 이처럼 모두 배나무와 관련된 이름이다.

▲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당선 되어 경무대에 들어가기 전과 4월혁명으로 경무대를 떠나고 미국으로 되돌아 갈기 직전 머물렀던 별장. [사진-유영호]

이화장은 본채, 별채인 조각당, 그리고 여러 부속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승만은 이곳에 살면서 정부수립 운동을 전개하여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이어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경무대로 이사하였다. 이후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 등의 불법을 통해 12년 장기집권을 하였지만 결국 1960년 4월혁명에 의해 쫓겨나고 다시 이곳 이화장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하와이로 떠나 그곳에서 숨을 거두게 된 것이다.

앞서 가본 <돈암장>에서는 이승만이 <돈암장>에 들어오기 이전의 미국생활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한편 이곳 <이화장>은 그가 권력을 잡은 곳이기도 하며, 또 쫓겨나 다시 돌아 온 곳이기도 하다. 하여 여기서는 이승만이 권력을 장악해서 어떠한 일을 하였나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승만은 이미 귀국 직전 도쿄에서 맥아더를 만나 국내정세의 나아갈 바에 대한 교감을 나누었다. 그리하여 귀국 후 <돈암장>시절 자신들의 방패가 되어줄 독립운동가가 필요했던 국내 친일파세력과 손잡고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여 활발한 정치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 가운데 1946년 6월 3일 단독정부수립 의지를 정읍에서 표명하였고, 이것은 결국 미국의 지지 속에서 이승만 정권을 탄생시켰으며 이로써 분단을 정식화해 나갔다. 이러한 분단정권의 수립은 이후 전쟁으로 이어지는데 이승만 정권이 전쟁과정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먼저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국군이 북한 괴뢰군을 잘 막고 있으니 서울시민들은 그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할 것"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하고, 정작 자신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 마치 358년 전 선조가 의주로 도망쳤듯이 그는 부산으로 도망쳤다. 그리고는 미군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넘겨버린 것이다.

이로써 이승만 정부는 군사적 권한을 잃은 채 경찰 및 특무대를 중심으로 제2전선에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 제2전선에서 이승만정부가 한 일이란 인민군과의 싸움이 아니라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전부였다. 전쟁 초기 후퇴과정에서 도보연맹원에 대한 예비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해 약 20만 명가량을 죽인 일명 <보도연맹사건>이 첫 번째이다.

또 미군의 지원으로 압록강까지 올라갔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되는 1.4후퇴 때 서울조차 재 철수가 불가피해지자 약 100만 명에 달하는 청장년들을 국민방위군에 편입하여 남쪽으로 호송하며 이들을 얼려 죽이고, 굶겨 죽였다. 이것이 바로 민간인 학살의 두 번째 사건인 <국민방위군사건>이다. 이는 이들에게 배급되어야 할 식량과 옷 등이 부패한 정권으로 인하여 벌어진 학살이다. 이에 사람들은 이 국민방위군대열을 '죽음의 대열', '해골의 대열'로 불렀다.

이러한 이승만정권의 제2전선에서의 학살은 전선이 38선 지역에서 교착된 1951년 2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전선이 교착되자 그 해 2월 거창일대 함양, 산청을 포함한 일명 <거창양민학살>이 바로 세 번째 학살이다. 이런 대규모적인 민간인 학살사건 외에도 중소규모의 민간인 학살은 거의 매일같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전쟁이 끝나고도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방법으로 그는 장기집권을 꾀한 것이다. 사전을 찾아서 확인하기 전에는 이것들이 어떻게 전개된 것인지 쉽게 알기 어려운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변칙적 방법을 통한 12년간의 장기집권에도 1960년 부정선거에서 국민들은 폭발하였고 거대한 4월혁명의 물결을 이루면서 그는 결국 경무대에서 쫓겨나 이곳 <이화장>으로 돌아온다.

이승만이 경무대에서 쫓겨나 <이화장>으로 돌아오는 날 시인 김수영은 다음과 같이 그 기쁨을 읊조렸다.

우선 그 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 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이렇게 김수영은 이제 '민주주의와 자유는 이제 상식이 되었다'고 외쳤지만 그래도 미심쩍어 그랬는지 그는 몇 개월 뒤 미국과 소련에게 "가다오 너희들의 고장으로 소박하게 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가다오"라며 "백성들의 마음에는 '미국인'도 '소련인'도 똑같은 놈들 가다오 가다오"라고 외쳤다. 그런데 김수영의 마지막 바람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것 때문일까? 바로 1년 뒤 박정희는 탱크와 총칼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였고, 그 뒤 3선 개헌과 유신헌법을 통해 또 다시 18년 장기집권을 하였다.

이렇듯 자기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이화장>은 현재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이곳에 들리면 이승만 전 대통령에 관한 여러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지만 그가 우리 역사에 끼친 과오를 생각하면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한편 <이화장> 담장을 타고 돌아가면 뒤편에 자그마한 공원이 있고 그곳에 이승만이 1959년에 쓴 글 "경천애인(敬天愛人)"을 새긴 돌이 세워져있다.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한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학살했던가? 이 돌을 보는 순간 나는 학창시절 '사람이 말과 행동은 일치해야 한다'는 의미로 배웠던 사자성어 언행일치(言行一致)가 떠올랐다.

▲ 이화장 뒤편 낙산자락의 공원에 새겨진 이승만의 친필 '敬天愛人(경천애인)' [사진-유영호]

70년대 미싱사들의 터전 <창신동>의 추억

이제 성곽 길을 따라 동대문 쪽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낙산정상부터 청계천까지 도성 밖의 동명이 창신동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52방(坊) 가운데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의 글자를 딴 이름으로 1914년부터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이곳은 6.25전쟁 이후 갈 곳을 잃은 저소득층이 대거 몰려들면서 판자촌을 형성하던 곳이다. 전쟁으로 헐벗은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옷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던 상황에서 창신동은 의류산업의 풍부한 노동력을 공급했다. 그리하여 1955년 국내소비용 의류의 60%가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창신동의 미싱소리는 국내섬유산업의 발전을 나타내는 소리이기도 하였다. 1961년 평화시장이 건설되고 박정희정권의 섬유수출정책과 결합되면서 당시 이곳 창신동에서 생산되는 기성복이 국내물량의 70%까지 차지했다.

전쟁과 이촌향도의 물결 속에서 전국의 여성노동자들이 몰려들던 이곳. 우리 현대사의 단면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60~70년대 시각의 기준으로 미싱사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3D직종이라는 선입관 때문에 이곳은 이제 활기를 잃어 가고 있다. 또 저렴한 인건비로 위협해 오는 중국 상품으로 이곳 창신동 주민들은 자구책을 찾고 있다. 마땅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채 아직도 창신동일대 좁은 골목길에 늘어선 건물마다 미싱소리가 요란하며 물건을 실어 나르는 오토바이가 골목길을 채우고 있다. 하지만 왠지 활기차기보다 썰렁함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 아쉽게 느껴진다. 이것은 어쩌면 현재 한국경제의 한 단면일 것이다.

▲ 1970년대 국내 기성복의 60~70%가 생산되었던 종로구 창신동 영세수공업 골목. 아직도 그 흔적은 뚜렷이 남아 있다. [사진-유영호]

이런 변화되어 가는 현재의 한국경제를 생각하며 내려오니 어느덧 종로에 의해 성곽은 끊겨 있었다. 건널목을 건너면 바로 동대문이지만 길을 건너기 전에 근처에 최근 2014년 8월 새로 생긴 <한양도성박물관>을 관람하면 도성순례에 도움이 되겠다. 대부분 '도성'의 축조 및 변화에 대한 것들이지만 한양도성의 과거와 현재를 영상을 통해 좀 더 실감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전시물 등은 이 글에서 설명하기 보다는 직접 육안으로 확인해야 다가오기에 여기서의 설명을 줄이기로 한다.

참고로 이곳 <한양도성박물관>에서 서쪽 시내방향으로 길 건너편에는 조선시대 동북부 여진족 사신들의 숙소인 <북평관(北平館)>이 있던 곳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곳에서 묵을 뿐 여진족의 한양출입문은 혜화문이었다. 그리하여 앞서 본 혜화문의 문루가 소문의 아닌 대문의 규모로 컸던 것이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건국한 여진족의 도성출입문이 전일의 명나라 사신이 출입하던 돈의문으로 바뀌면서부터 문의 관리를 소홀히 하여 점차 왜소화된 것이 결국 일제 때 헐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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