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공식적으로 소집하는 마지막 모임”
“내가 나이 아흔 아닌가. 내년 4.2공동성명이 내가 공식적으로 소집하는 마지막 모임이 될 것 같아.”눈썹까지 하얀 서리가 내린 구순의 정경모 선생은 일본 요코하마 자택을 찾은 문익환 목사의 셋째 아들 문성근 ‘국민의 명령’ 상임운영위원장 등 문 목사 가족들을 반갑게 맞으며 내년 기념행사 이야기부터 꺼냈다.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해온 정경모 선생은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주선해 1989년 3월 문 목사와 함께 방북했으며, 문 목사는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회동한 뒤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과 공동명의로 ‘4.2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정경모 선생은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내년 4월 5일 도쿄 YMCA에서 4.2공동성명 기념행사를 추진하겠다고 강한 의욕을 보였다.
선생은 “6.15도 있고 10.4도 있고 기념해야 할 날이 많지만, 내가 직접 관여됐다고 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4.2공동성명을 기념해야 된다”며 “다른 것은 다들 권력자들끼리 했지만 4.2공동성명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게 목숨을 걸고 가서 김 주석을 만나고 낸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남북간 연방제 처음 나온 것이 4.2공동성명”
특히 “남북 간에 연방제 이야기가 제일 처음에 나온 것이 4.2공동성명”이라며 “김 주석은 군사권과 외교권을 가지고 있는 연방을 만들자고 했다”며 “문 목사가 그거는 안 된다고 현실적이 아니란 것을 설명을 했다”고 회고했다.“당신(문 목사)은 연방제를 승인하는 것이야말로 전쟁을 하지 않고 남북을 통일시키는 유일한 방법인 것을 알지만, 지금 김 주석이 생각하는 것처럼 군사권과 외교권을 쥐고 있는 통일연방제를 당장에 한다는 것은 도저히 현실적이 아니니까 그래서 안 된다고 했다”는 것.
9개항의 4.2공동성명 중 네 번째 항은 “쌍방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가 누구에게 먹히지 않고 일방이 타방을 압도하거나 타방에게 압도당하지 않는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선택해야 할 필연적이고 합리적인 통일방도가 되며 그 구체적인 실현방도로서는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점에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4.2공동성명의 맥락에서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6.15공동선언’ 2항에서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합의했다.
선생은 “그때는 연방제를 한다고 하면 다들 빨갱이라고 펄쩍 뛰던 시절”이라며 “그 후에 김대중 대통령도 가고 노무현 대통령도 (북에) 가서 그 이야기가 나왔다”고 말했다.
선생은 “내년 4.2공동성명 기념행사에는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사람들도 부르려고 한다”며 “남북이 같이 합동해서 4.2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서 해야 될 일이 연방제”라고 강조했다.
“소가 뒷걸음질을 치다가 쥐를 잡는 법도 있으니까”
<한겨레>에 인기리에 연재한 뒤 단행본으로 펴낸 『시대의 불침번』에서 2010년 오바마 대통령 등장으로 한반도 정세가 긍정적으로 풀릴 것이라고 내다봤던 선생은 “오바마에 대한 기대는 벌써 꺼진지가 오래고, 오바마는 늘 자기 행동보다는 말이 앞선 사람”이라고 비판했다.최근 납치자 문제를 두고 북-일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것과 관련 “아베는 이북 땅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고 대가리에 뿔이 달린 귀신들만 살고 있는 것처럼 일본사람들한테 선전해서 그것 때문에 부상이 된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아베는 또 현실적이랄까 욕심이 있으니까 이북이 가지고 있는 지하자원에 대한 욕심은 있다”고 진단했다.
선생은 “(아베 총리가) 북조선에 한 번은 가겠다고 여러 번 약속했는데 약속이 이행된 적은 없다”며 “이번에는 북에 가서 김정은을 만나서 일본과 북조선 사이가 긍정적으로 전개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소가 뒷걸음질을 치다가 쥐를 잡는 법도 있으니까” 말이다.
시간에 쫒겨 서둘러 돌아가는 일행에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걸음걸이를 보여주겠다”며 굳이 대문 밖까지 배웅을 나선 선생의 허리가 유난히 굽어보였다.
문익환 목사 일행이 평양을 떠난 것이 1989년 4월 2일 오후였소이다. 그날 아침 문 목사가 기자단 앞에서 낭독하신 선언문이 오늘 우리가 ‘4.2남북공동성명’이라고 부르는 것이오이다. 이 성명문은 27일부터 30일까지 나흘 동안에 걸친 김 주석과 문 목사 사이의 회담을 담은 것으로 9개 항목에 걸친 상당히 장문의 것이지만, 알맹이만을 뽑아서 요약한다면 다음 세 가지 항복이 아닐까 하오이다.
①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니만치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일체이다.
② 통일에 관한 남북 간 대화의 창구는 널리 개방되어야 하며, 당국자들 사이의 독점에 맡기지 않는다.
③ 통일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질진대 연방제는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경로인데, 이의 실시는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
이 문서를 작성하느라고 나와 안병수(훗날 안경호로 확인) 동지는 31일 밤을 꼬박 세웠지요...
아무튼 4.2공동성명은 그로부터 11년의 세월이 흘러간 후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날의 동지 문익환 목사의 발자취를 따라 평양을 방문하고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후 발표된 6.15공동성명으로 직결되고, 또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 때의 10.4공동성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통일을 지향하는 남북공동성명의 시발점은 문 목사의 평양 방문이었음이 자명한 사실이라 하겠지요.
(정경모, 『시대의 불침번』, 한겨레출판, 2010. 361-399쪽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