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년 역사가 숨쉬는 경주 양동마을에서의 강연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에서 차로 20여분 떨어진 양동마을. 이곳은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서 깊은 마을이다.

조선 초부터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두 가문이 대를 이어 내려온 마을인데 이들이 이곳에 둥지를 튼 것은 약 550여 년 전이라고 하니, 육백 년을 이어왔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겠다.

우리나라에 조일전쟁(임진왜란) 이전에 세워진 집 네 채 중 두 채가 이 마을에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라는 참담한 전쟁도, 두 차례의 호란도, 일제강점기의 그악스런 수탈도, 한국전쟁의 참화도 그 모든 난리 속의 화마를 이겨낸 기특한 마을.

한국전쟁 때 마을 어귀의 형산강은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하건만, 전쟁의 파란을 피해간 고택의 오랜 역사가 숨쉬고 있는 곳이다.

▲ 흥민통 회원들과 함께 떠난 통일문화기행, 목적지는 신라 천년 수도 경주와 양동마을. [사진 - 정연진]

이번 기행은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이하 ‘흥민통’)가 해마다 주최하는 통일문화 기행에서 내가 강연을 맡게 되어 흥민통 회원들과 함께 1박2일간 경주로 떠나는 여정이었다.

어린 자녀를 동반한 가족부터 대학생들, 그리고 삼십대에서 칠십대까지 모든 연령대가 골고루 참여했다. 여러 세대를 아울러 다양한 연령대가 함께한 기행이라 더욱 뜻깊고 기억에 남는다.

▲ 경주도착 이튿날 아침, 양동마을의 한 정자에서 ‘우리 역사에서 찾아가는 통일 미래’라는 제목으로 우리 역사와 통일을 연결짓는 강연을 했다.(2014.11.2) [자료사진 - 정연진]

▲ 정자의 이름은 심수정. 마음을 물과 같이 맑게(또는 고요하게) 한다는 뜻이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둘러앉아 강연에 귀를 기울인다. [자료사진 - 정연진]

다 함께 읽어보는 북한의 역사만화 단군이야기

강연의 제목은 ‘역사에서 찾아가는 통일 미래’라고 정했다.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 그 중에서도 유서깊은 양동마을에서 참석자들은 자연스럽게 역사를 떠올리게 될 것이고, 우리 역사에서 분단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찾아보자는 의도에서다.

우선 곰과 호랑이, 환웅이 등장하는 ‘단군이야기’ 만화 몇 컷을 서로 역할을 정해서 마치 성우가 된 것 같이 읽어보게 했다.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곰과 호랑이. 백 일 동안 쑥과 마늘만을 먹으라는 환웅의 주문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가는 호랑이. 곰이 여자로 변하여 환웅과 혼인하는 이야기...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다 읽고 난 다음에 “방금 여러분이 재미있게 읽은 만화는 남한의 것이 아니라, 북녘 어린이들이 읽는 북한의 만화입니다”라고 했더니 모두가 무척 놀라는 기색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이야기와 한 치도 다름없이 똑같고 만화의 언어 또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다는 반응이다.

▲ 북한의 역사만화 <단군>. 2005년도 평양방문시 사가지고 온 역사 만화책에서. [자료사진 - 정연진]

▲ 여러 세대가 함께 어울려 단군이야기 만화를 낭독하는 참가자들의 표정은 밝다. [사진 - 정연진]

그렇다. 5천년 역사의 긴 세월을 통해 남이나 북이나 변함없이 내려오던 민족의 뿌리, 단군이야기는 남북이공유하고 있는 우리 겨레의 변함없는 정체성이다.

한국의 역사가 5천년보다 더 장구하다는 재야 사학자들의 연구가 예전부터 활발한데, 그렇다면 단군의 후손이라는 공통된 민족의식을 가지고 살아온 기간은 5천년 보다도 더 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5천년동안 같은 민족의식을 지니고 살아왔는데 여기에 비하면 분단시대 역사는 이제 겨우 70년. 턱없이 짧은 기간이다. 기나긴 민족사를 생각하면 훌쩍 뛰어넘을 수도 있는 짧은 순간이다.

통일로 가기 위한 첫 걸음은, 긴 역사를 통해 흐르는 한 겨레의 정체성을 가지고, ‘우리가 분단시대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갖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자신감이 통일시대를 열어가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여러 차례 강조한다.

신라와 고구려를 다시 생각한다

우리는 신라의 삼국 통일을 고구려 영토를 포기한 반쪽 만의 통일, 더우기 당나라를 끌어들인 통일이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다.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어떠했을까. 참석자들에게 물으니, “우리나라의 영토가 지금은 훨씬 넓었을 거에요”, “중국과 비등한 나라가 되었을 거에요” 등등의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러나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고구려를 호시탐탐 넘보는 북방세력, 멸망시키려는 수나라 당나라, 등 중국세력과 대항해 고구려는 항시 군사적인 긴장상태에 있었다. 고구려가 외족의 침입을 잘 막아낸 덕분에 남쪽에 있는 신라와 백제는 큰 전쟁의 위험없이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 북한의 역사만화 표지. <그림으로본 조선 력사: 광개토왕의 비석>. 고구려사는 북에서나 남에서나 끝없는 동경의 대상인가보다. [자료사진 - 정연진]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고 나서 우매한 왕이 정치를 그르치거나 집권세력간 다툼이 생겨 나라를 방어하지 못하고 멸망하고 만다면? 그럴 경우 남쪽까지 외적들에게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힘들게 이룩한 통일국가 자체가 아예 없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또 그럴 경우, 현재의 한국이 현재의 한국인들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또한 현재의 남북 상황도 고구려, 신라 백제를 대입해 보자. 북은 고구려의 후예, 남은 신라와 백제의 후예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당대의 가장 강력한 나라였던 수나라, 당나라 등과 힘겨루며 싸우는 나라였다. 현재의 북한이 세계 최강국 미국와 맞짱을 뜨고 있는 것을, 강국과 싸우던 고구려의 전통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조금은 북의 입장이 이해가 되지 않을까?

우리가 매우 불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신라는 사실 그렇게 단순한 나라가 아니었다. 신라인의 정신은 국호에서 드러난다. “덕업일신, 망라사방: 덕스러운 일을 날로 새롭게 하여 사방에, 즉 세계에 그물과 같이 펼친다”라는 뜻에서 국호를 신라라고 했다고 한다.(503년 지증왕 4년 )

▲ 서기 503년 지증왕 때,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와 ‘사방을 망라한다’라는 뜻을 합해 국호를 신라고 정했다고 설명한다. 경주국립박물관에서. [자료사진 - 정연진]

‘덕을 매일 매일 새롭게 하여 세계에 펼친다’라는 신라인의 덕을 숭상하는 정신을 우리가 오늘날에 되살려 실천했다면, 다시 말해 대한민국이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인재들만 양성하려 하지 말고 세계를 이끌만한 덕성스런 인재들을 길러내는데 애썼다면, 현재 과연 우리가 갈등과 반목으로 가득찬 사회에서 살고 있을까.

또 하나, 신라는 당시 자국의 운명이 달린 중대한 과업인 ‘삼한일통’ 전쟁을 자신들이 패망시킨 가야의 지배층 출신인 김유신에게 맡겼다. 이 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우리가 멸망시킨 적국 출신의 장수에게 나라의 운명이 달린 중대 전투를 맡긴다! 현재 대한민국이라면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스스로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으로 찾아들어온 북한이탈주민들도 제대로 포용하지 못하고 마구 차별하고 있는 나라에서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신라를 대한민국에 투영해 보면 현재의 우리가 한 없이 부끄러워진다.

▲ 통일신라 시대에 백제 후손들은 내세에 도래할 미륵불을 믿었던 반면 신라인들은 보다 현세적인 관세음보살을 주로 찾았다고 한다. 통일신라인들은 극락이 현세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는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니, 문득 오늘날 한국인은 극락이 현세 아니면 내세에 존재한다고 생각할지, 궁금해진다. 그윽한 미소를 머금은 경주 남산의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 666호) [사진 - 정연진]

대한민국과 신라, 자주성을 비교한다면

신라의 삼국통일이 공격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같은 민족을 통일하는데 외세의 힘을 빌린 것이다. 당나라를 등에 업고 같은 민족을 멸망시켰다고 신라는 천오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후손들로부터 두고두고 ‘어떻게 힘을 빌려 같은 민족을 치는가. 자주성이 없다’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당나라를 끌어들인 것은 물론 큰 잘못이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돌아갈 줄 알았던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 땅에 이어 신라 땅에도 도독부를 설치해 식민지로 만들려는 야욕을 드러낸다. 이 때 신라인은 어떻게 했나? 우리가 알다시피, 고구려, 백제인들과 힘을 합해 7년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당나라를 몰아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빗대어 생각해 보자. “만약에, 예를 들어, 남한과 미국이 연합해 통일전쟁을 벌여 북한을 점령했다 치자.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미국이 갑자기 ‘북한을 우리가 직접 통치하겠으니, 한국은 물러서라’라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신라가 했던 것처럼 할 수 있을까? 과연 수 년간의 전쟁을 무릅쓰고 패망한 북한 주민들과 힘을 합쳐 미국을 몰아내고 통일을 완성하려고 시도할까?

자주성이 결여되었다고 비판받는 신라마저 현재의 대한민국보다는 떳떳하고 당당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현 실체를 직시하고, 역사를 오늘의 현재에 끌어들여 생각해 보고, 통일시대로 가는 지혜를 찾아보자. 우리가 신라인들처럼 후손에게 대대손손 욕먹는 선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더군다나, 현재의 대한민국은 미국으로부터 돌려받기로 합의했던 전시작전권 마저 자진해서 미국에 다시 헌납하는 우스운 나라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만약 신라인들이 안다면 뭐라고 말할까? 국가의 운명이 달린 전시에 제 나라 군대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니! 이거야 말로 땅을 치고 곡할 일이다.

아마도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기세로, 조상들은 ‘우리가 비록 통일은 외세의 힘을 빌려했지만, 그 후 외세를 쫒아내기 위해 얼마나 비장하고 장렬하게 목숨바쳐 싸웠는데, 외세에 전시통제권을 자진해서 갖다 바쳐? 이봐 후손들! 너희 후손들 때문에 하늘에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다. 제발 정신들 차려!’ 하고 호되게 호통을 치지나 않을런지...

▲ 경주 왕릉에서 찍은 소나무 숲. 소나무 처럼, 잠시 굽어가더라도 결국 하늘을 향해 우뚝 서는 소나무 처럼, 묵묵히 은근과 끈기를 가지고 묵묵히 변함없는 푸른 기상으로 통일시대를 열어갔으면 한다. [사진 - 정연진]

한편 일제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선조들은 광복 70년이 다되어도 아직껏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후손들에게 무어라 말씀하실까.

평생토록 제 피붙이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있는 이산가족이 자그만치 천만에 달하는 기막힌 현실을...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눈물과 한숨을 거두어 주지 못하고 있는 이 못난 후손들에게 과연 무어라 말씀하실까.

우리 생애 내에 분단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역사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예전에 교과서에서 한국인의 덕목으로 배우던 것들이 무엇이 있었나, 생각해 보니, 문득 ‘은근과 끈기’가 생각난다. 분단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정말로 필요한 것이 식지 않는 은근함과 포기하지 않는 끈기 이것이 아닐까 하는데, 불행히도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에게서는 은근과 끈기를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또한 생명력과 역동성, 자주성과 창의성, 나누고 베푸는 정신 등과 같이 우리 역사를 통해 면면히 내려온 한국인의 장점과 저력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덕목을 오늘에 되살려, 분단시대를 끝내고 통일 시대를 열어가는 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후손인 우리들이 마땅히 이루어야 할 몫이 아니겠는가.

▲ 양동마을의 은행나무 단풍은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에 최고였다. 마치 오백년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듯 눈부신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 [자료 사진 - 정연진]

<은행나무 앞 단상>

은행나무 단풍이 뿜어내는 찬연함으로
가을 빛으로 가득한 이 곳이 더욱 빛나 보입니다.

천년을 내려온 역사, 오백년된 마을에서
우리 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지는
한국인의 정신과 혼을 생각해 봅니다.

나무잎은 바람에 떨어지고
이 가을과 함께 사라지겠지만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다시 새 봄에 새싹을 틔우 듯
절망과 고통의 분단 시기를 이겨내고
희망찬 하나의 미래로 갈 수 있는 힘을
우리 역사에서 찾아가기 소망합니다.

통일로 가는 미래는 우리 역사를 마주보는
긴 호흡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2014년 11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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