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서/ 겨레말큰사전 책임연구원


10여 년 전에 EBS 토론 프로그램에 질문자로 나간 적이 있었다. 방송사에서 그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시청자 겸 질문자 역할을 할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을 했고, 그 요청을 받은 사무국장님의 ‘완서, 네가 갔다 와라’는 하달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토론의 주제는 ‘영어 공용어’였다. 방송사에서는 별 다른 설명 없이 그냥 알아서 질문을 하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녹화가 아닌 생방송이라고 했다.

드디어 생방송이 진행됐다. ‘영어 공용어’에 대한 찬성과 반대 쪽 사람의 주장과 반박이 1시간 가까이 계속되었다. 찬성 쪽 사람들은 영어를 공용어로 쓰면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다는 장점만 줄줄 늘어놓았다. 반면 반대쪽 사람들은 영어 공용어를 하게 되면 예상되는 폐해들, 즉 단점들을 설명하면서 반박을 했다. 그렇게 1부 순서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되었다. 2부가 시작되자 사회자는 시청자 질문을 받겠다고 했다. 짜인 각본대로 내가 먼저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당연히 영어 공용어 찬성자에게 추상같은 질문을 했다.

“지금 우리나라는 IT강국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IT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할지 모르는 상태에 있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현재에도 자동 번역 프로그램이 있고, 이 기술이 계속 발전하게 되면 거의 완벽하게 자동 번역이 될 텐데 굳이 우리가 영어를 익힐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영어를 익히려고 공용어로 쓸 필요가 있을까요?”

나의 추상같은 질문에 토론자는 당황한 듯 했다. 그리곤 이렇게 답변을 했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자동 번역 프로그램은 말하는 사람의 감정까지는 담아내지 못합니다. 영어를 공용어로 써서 영어식으로 감정을 나타내고 영어로 생각까지 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너무나 터무니없는 답변이었다. 난 화가 치솟아 질문을 더 하려 했으나 사회자는 짜인 각본대로 다른 질문자에게 마이크를 넘겼기 때문에 나의 추상같은 질문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장점’과 ‘단점’, 많이 쓰는 말이다. 이 가운데 ‘단점’은 남북의 사용 빈도에서 차이가 있고 약간의 의미 차이도 있다.

남과 북 ‘단점’의 사전 풀이는 아래와 같다.

 
남은 ‘단점’의 뜻갈래가 하나이고 ‘결점’을 비슷한 말로 보고 있다. 반면 북은 뜻갈래가 2개이고 ‘결점’을 같은 말로 보고 있으며 ‘결점’을 기본 올림말로 보고 있다. 아울러 두 번째 풀이에서는 ‘장점’의 반대말에 해당하는 풀이를 두면서 그 풀이를 ‘부족점’으로 돌리고 있다. 북에서 ‘단점’의 풀이를 ‘결점’과 ‘부족점’으로 한 것은 ‘단점’이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곧 북에서는 우리의 ‘단점’에 해당하는 의미로 ‘부족점’을 더 많이 쓴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는 북측의 용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사용 빈도가 월등히 높다. 그 중 일부를 보이면 아래와 같다.

⁃ 그 동무의 {부족점은} 전체 생활에서 옥에 티나 다름없습니다.《김길환: 한부문 당비서의 수기》
⁃ 살뜰한 감정으로, 극진한 믿음과 존경의 일념만으로 대해오던 사람에게서 지나쳐 버릴 수 없는 {부족점을} 발견했다.《최재석: 맹세》
⁃ 혁명가는 자신의 {부족점을} 알면서도 그럭저럭 살수 없는 불같은 사람들이여야 하오.《김창수: 금수평의 새력사》
⁃ 서로 {부족점을} 일깨워주고 그릇된 생각이나 행동을 바로잡아주는 것이 가장 뜨거운 믿음이며 사랑이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생리처럼, 인박힌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김원종: 의사는 집을 떠났다》
⁃ 금동이가 자기의 긍정적 측면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부족점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은 단순한 교양이나 개변의 과정이 아니라 지적, 도덕적 성장이 더욱 높고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과정, 사회와 집단, 동지들에 대한 리해가 깊어가는 과정이였다.《오정애: 조선 현대 아동소설 연구(해방후편)》

그렇게 방송에 출연하고 다음날 컴퓨터를 사러 구의동 테크노마트에 갔다. 컴퓨터를 구경하고 있는데 한 판매점의 직원이 나에게 아는 체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곤 이렇게 인사를 했다.

“어제 방송에 나오신 분 맞죠. 선생님의 말씀 정말 잘 들었습니다. 방송에서 본 분을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 정말 반갑네요.”

당황스러웠지만 방송 출연으로 내 얼굴을 알린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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