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흔히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하여 더 많이 안다는 것 뜻하죠. 즉 아는 만큼 우리의 사랑도 커지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알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내가 딛고 사는 이 땅의 역사를 활자가 아닌 내 발로 직접 느껴보고자 나의 한양도성기행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횟수를 거치면서 내가 보고 느꼈던 것들을 나 스스로 정리해보고, 또 그것을 함께 공유해 보고자 글로 남기기로 한 것이며, 또 내가 역사전문가가 아니기에 혹 잘못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지적과 비판은 기꺼이 환영합니다. /필자 주

<필자 프로필>
후퍼소프트(www.whoopersoft.com) 대표이사
<하나를 위하여 : 민통선-DMZ 통일나들이>, <북한영화, 그리고 거짓말> 저자, <21세기 민족주의>(공저)

 

▲ 서대문밖 독립문에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포함한 서대문독립공원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서대문 밖 이야기 : 서대문독립공원

<서재필>, 갑신정변 후 죽을 때까지 조선말을 안 한 미국인

<딜쿠샤>에서 대신중고등학교 정문 앞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바로 <독립문>이 보인다. 여기부터 <독립공원>이라 부르는데 그 입구에 <독립문> 서있는 것이다. 그 뒤로 <서재필동상>과 <독립관>이 있고, 이어서 바로 <서대문형무소>가 위치해 있다. 특히 이곳은 학생들의 체험학습이 많이 이루어지는 곳이니 자세히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참고로 독립공원은 무악산(또는 안산)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무악산과 인왕산 사이 고개를 <무악재>라 한다. 그리고 독립공원이 이 고개 아래 있다고 하여 '고개 현(峴)' 자를 써서 현저동(峴底洞)이라 하며, 맞은 편 인왕산자락은 바로 무악동(毋岳洞)이라 지은 것이다.

▲ 독립협회에 의해 지어진 독립문으로 그 앞 두 개의 돌기둥은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의 주초이다. [사진-유영호]
▲ 중국사진들에게 연회를 베풀던 <모화관>이었으나 독립협회가 사용하면서 <독립관>으로 개칭한 건물. 본래 영천시장 근처에 위치해 있었으나 현재 서대문 독립공원 내에 복원하여 놓았다. [사진-유영호]

먼저 <독립공원>입구에 서있는 <독립문>부터 둘러 보자. <독립문>은 본래 조선시대 중국사신을 맞이했던 <영은문(迎恩門)>이 서있던 곳이며, 청일전쟁 후 주초(柱礎)만 남은 채 무너져 있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협회가 세운 문이다. 이보다 350미터 아래 위치한 영천시장 앞에 중국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모화관(慕華館)>(현 우리은행 독립문지점, 영천동 305)이 있었다. 이 모화관이 갑오개혁 이후 방치되어 있던 것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서재필의 독립협회가 사무실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후 독립관은 소실되었고 1992년 정부가 지금의 독립공원을 조성하면서 이곳에 새롭게 만든 것이다. 또 독립문과 독립관 사이에 서재필(미국 명 필립 제이슨)의 동상을 세웠져다.

▲ 독립문 건립을 주도한 서재필(미국 명 필립 제이슨)의 동상. [사진-유영호]

먼저, 독립문, 독립관, 독립신문 등 이 모든 사업을 주도한 <서재필>에 대하여 알아보자. 나는 학창시절 마치 그가 '조선독립의 아버지'인 것으로 배웠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내가 아는 한 그는 조선 최대의 사대주의자이다.

19살 나이로 1885년 친일쿠데타 갑신정변에 참가해 병조참판에 올랐지만 이것이 3일천하로 끝나자 그는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상선을 타고 일본으로 도피했다. 하지만 정변실패로 그곳에서조차 냉대하니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그 후 1890년 그는 시민권을 획득하고 1893년부터 의사로 생활 하다 그곳의 인종차별로 장사가 어렵자 10년이 지난 1895년 조선에 다시 돌아 왔다.

하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조선인 서재필이 아니라 미국인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었다. 갈색머리에 키가 172센치나 되는 백인 아내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rmstrong)을 데리고 왔으며, 10년 만에 조선말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항상 영어로만 대화하였다. 조선의 황제였던 고종 앞에서조차 담배를 피우며 영어로 이야기했다. 그는 미국시민이 된 1890년 이후 단 한번도 자신의 이름을 서재필로 부르거나 표기한 적이 없다. 그래서 그의 묘비명에조차 'Philip Jaisohn'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그에게 조선은 이제 '동방의 작은 미개한 나라'일 뿐이었다.

이제 그가 주도한 <독립신문>을 보자. 과연 그는 '조선의 독립'을 원했는지 의심스럽다. 그가 말하는 '독립'의 대상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에 국한된 것이다. 그랬기에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건립된 독립문은 일제의 식민지 하에서도 '독립'이란 문패를 걸고도 굳건히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것은 독립신문 논설을 보면 더욱 쉽게 알 수 있다. <독립신문> 논설 중에는 다음과 같은 친일 논조를 담은 사설이 부지기수다.

"일본이 두 해 전에 청국과 싸워 이긴 후에 조선은 분명한 독립국이 되었으니, 그것 또한 조선 인민이 일본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을 터이나, 조선 인민 중에 일본을 감사히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없는 것은 다름아니라…" (1896년 독립신문 제 6호 논설 중에서)

참고로 우리는 현재 이런 독립신문의 창간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이것뿐만 아니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미국의 이미지를 절대적으로 미화했다. 딜쿠샤에서 본 것처럼 미국의 경인철도부설권과 운산금광채굴권에 대하여 적극 환영하였다.

이러한 필립 제이슨의 사대주의는 정치, 경제측면에 국한되지 않으며, 조선인들의 생활습관까지도 비판하며 서구화할 것을 요구했다. 예를 들면 '남의 집에 갈 때 파·마늘을 먹고 가는 것이 아니고, 남 앞으로 지나갈 때는 용서해 달라(주:Excuse me)고 해야 한다' (독립신문 1896. 11. 14). '조선 사람들은 김치와 밥을 먹지 않고 소고기와 브레드를 먹게 되어야 한다' (독립신문 1896. 10. 10)며 조선의 풍습을 마치 원시시대의 것으로 폄하했다.

잠시 독립신문 창간으로 돌아가 보자. 독립신문을 우리는 마치 서재필이 창간한 것으로 배우고 있지만 조선정부의 소유이다. 그의 돈은 단 한 푼도 안 들어갔기 때문이다. 당시 고종 황제는 그에게 신문사 건물을 장만해 주고 창업자금 4,400원을 따로 주었다. 그리고 연봉으로 3,500원을 책정해 주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고액 연봉이었다. 당시 소 한 마리가 20원~40원이었으니 소 100마리 가격이 넘는 연봉이었다. 또 앞서 보았듯이 이보다 20년 뒤인 1915년 돈의문이 205원에 낙찰되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돈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공금 가운데 1,400원으로 자기 집을 사는데 썼다. 요즘 말로 말하면 이것은 횡령죄에 해당한다. 이후 독립신문의 논조와 조선정부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정부가 해고하려 하자 그는 남은 계약기간의 봉급과 두 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여비까지 하여 임금 8,800원과 미국 행 여비 600원을 챙겨 떠났다.

한편 그는 떠나면서도 자기 것도 아닌 독립신문의 소유권을 일본정부에 팔아 넘기려고까지 했다. 일본공사관의 기록물에 의하면 구두계약까지 이루어졌다고 한다. 만일 일본측이 약속을 지켰다면 독립신문은 일본정부의 소유가 되었을 것이다.

서재필, 아니 필립 제이슨 그는 이처럼 철저한 미국인이었기에 해방 후 잠시 한국에 또 다시 돌아왔을 때 일부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과정에서 그에게 미국국적포기를 요구하였으나 끝내 거부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이런 미국인 필립 제이슨에 대하여 1970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유해를 1994년 국내로 들여와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다. 그리고 2년 뒤 그를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이곳 독립공원에는 위의 시설 외에 <3.1독립선언기념탑>과 <순국선열추념탑>이 더 있는데 전자는 독립선언문을 새긴 것으로 처음 종로 파고다공원에 있다가 1980년 철거되어 삼청공원에 오랫동안 방치되다 독립공원 개원 후 이곳으로 다시 옮겨진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일제시대보다 혹독해진 대한민국의 감옥

▲ 1908년 설립된 이래 반민족, 반민주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서대문형무소. [사진-유영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독립공원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에 여기를 그냥 지나 칠 수는 없다. 약 600년 전 한양천도를 결정한 뒤 궁궐 지을 곳을 찾던 무악대사는 이곳이 닭이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의 명당'이지만 3천 명의 홀아비가 탄식하는 모습이 떠올라 포기했다고 한다. 그런 이곳에 1908년 항일의병의 탄압을 위해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무악대사가 예상했던 감옥이 들어선 것이다.

그 후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 등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그러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1998년에 이르러 이곳은 새롭게 '인권교육 학습장'으로 재 탄생한 곳이다.

이곳을 거쳐간 애국자는 약 4만 여명이며, 여기서 옥사한 사람만도 4백 여명이다. 하지만 본래 있던 건물의 3분의 2가량은 철거되었고 일부만 남아 있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항일과 반독재투쟁의 현장인 이곳은 분명 '민족'과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줄 커다란 교육장이 될만한 곳인데 너무도 쉽게 이런 역사현장을 없앤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러면 먼저 이곳을 돌아 보기 전에 우리는 '감옥'이라는 '근대의 산물'을 상상해 보자. 통상 감옥을 비롯하여 학교, 군대, 공장, 정신병원 등을 사회과학에서는 근대의 산물이라 하고 있다. 즉 근대국가가 성립되기 전에는 이러한 것들이 국가적 차원에서 조직되고 건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교'와 '군대'를 통해 국가규율을 배우고 이들은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 훌륭한 노동자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공장, 나아가 국가사회가 요구하는 규율을 어기면 이들은 '감옥'으로 보내져 교화되고 다시 사회로 복귀된다. 하지만 통상적인 교화가 불가능할 정도의 일탈행위는 '정신병원'으로 보내져 사회와 격리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엄격하게 규율이 적용되는 공간이 바로 '감옥'이다. 따라서 푸코는 감옥이란 "관대함이 없는 학교이자 더 엄격한 병영"이며,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질서에 대한 일반 대중의 복종을 끌어내고, 규율을 부여하는 과정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라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근대감옥의 특징은 우리역사를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일제시대 외세에 의한 감옥이나 해방 후 대한민국 자체의 감옥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이곳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거의 대부분 일제시대의 감옥만을 재현해 놓고 있다. 이곳은 일제시대에는 민족해방을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들이 주를 이루었다면, 해방 후에는 사회주의자들로 가득 찼고, 전쟁 후에는 민주주의자들을 가두어 두었던 곳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비록 작지만 최근 일부 공간에서 해방 이후 조국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이들도 전시되기 시작하고 있다. 아직도 많이 미흡하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다시 감옥이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으로 돌아와 그렇다면 과연 전근대시대의 형벌은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조선시대를 예로 살펴 보자. 우리는 조선시대의 형벌 제도를 생각할 때 대개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법 집행과 고문 등을 연상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나름의 엄격한 법집행과 형벌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형법은 일반적으로 중국 명나라의 《대명률》을 이용하였는데 대명률의 첫머리에는 태·장·도·류·사(笞·杖·徒·流·死)라는 다섯 가지의 형벌이 적혀 있다. '태형'과 '장형'은 죄인의 볼기를 치는 것에 따른 분류이고, '도형'은 관에 붙잡아 두고 힘든 일을 시키는 것이며, '류형'은 유배 보내는 것, '사형'은 곧 목숨을 끊는 것이다. 굳이 지금의 징역형과 유사하다고 볼 만한 것은 힘든 일을 시키는 도형이지만 근대의 징역형과는 기본적 형벌의 개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 지금처럼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는 '자유형'이라는 형벌은 없었다. 즉 징역형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감옥의 역할은 그저 수사나 재판절차를 밟고 있는 사람들을 잠시 가두어 두는 것에 불과했다. 요즘 말로 일종의 '유치장'이라고나 할까.

참고로 조선시대는 감옥을 <전옥서>라 불렀는데 이것은 1호선 종각역 6번출구에 있는 영풍문고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건너편 1번출구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일대는 <의금부>가 위치해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조상들은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재판이 공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해서 이곳의 동명을 '공평동'이라 지은 것이며, 이것으로도 마음이 안 놓였는지 바로 그 위 동네는 재판과정에서 그러한 공정성을 끝까지 견지해야 한다는 의미로 '견지동'이라 지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법원과 검찰은 모두 서초동에 있다. '서초(瑞草)'란 이름은 그곳에 '서리풀이 많다는 의미'를 한자로 쓴 것이다. 서리풀이란 '서리를 맞은 풀'을 이른다. 요즘은 권력으로부터 서리를 맞아서 그런지 검찰청은 말할 것도 없고 사법부의 위상조차 국민들 속에서 그리 신뢰가 높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법조인들이 일해야 할 곳은 '우리조상이 이름 지어 준 공평동이 맞는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이제 그럼 이곳을 간단히 돌아보며 우리의 인권역사를 느껴보도록 하자. 제일먼저 만나는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가면 이곳 체험의 핵심인 여러 옥사들이 나온다. 현재 중앙사와 9, 10, 11, 12옥사만 남아 있다.

중앙사라는 곳에 서있노라면 철학자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이야기하는 '파놉티콘(일망감시:一望監視)'을 그대로 재현해놓았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파놉티콘을 감옥구조에 처음으로 적용시킨 사람은 영국의 공리주의자 벤담이다. 의회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정치적 자유 확대를 옹호했던 벤담이 한편으로는 보다 집중적인 감시와 처벌 위한 근대적 감옥의 고안자이고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 벤담 덕분에 푸고가 말하는 '시선의 권력', 파놉티콘이 현실 속에서 완성된 것이다. 이제 "'보는 자'의 시선은 철저히 가려진 채 '보이는 자'의 일거수일투족이 일망감시장치로 투시되는 것. 소통을 위한 시선은 '주고받음'을 전제로 하지만 감시와 처벌을 위한 시선은 오직 '바라보는 자'의 일방적인 공격이다. 파놉티콘으로 감시 당하는 죄수는 간수가 딴청을 피울 때조차도 '그가 나를 감시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24시간 연기자가 되어야"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감시구조 속에서 우리의 애국지사들이 생활하였다는 것을 상상하니 왠지 벤담이 주장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가 얼마나 무서운 폭력적 논리였나를 느끼게 된다.

이제 이토록 무시 무시한 감시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면 <공작사>, <한센병원>, <추모비>를 지나게 된다. 그리고 감옥에서 가장 무섭게 느껴지는 <사형장>이 구석에 또 다시 담장에 둘러 쌓여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형장에는 두 그루의 미루나무가 있는데, 바로 담장을 사이에 두고 안팎으로 같은 해 심어졌지만 그 나무 크기는 현저히 다르다. 사형장 안에 심어진 미루나무는 상대적으로 너무 작아 보이는데 사람들은 이를 속칭 '통곡의 미루나무'라 부른다. 사형수가 일반범이든 정치범이든 자신의 죽음 앞에서야 얼마나 통곡했겠는가? 약 400여 명의 애국자들이 조국의 해방과 민주화를 위하여 이곳에서 죽어 갔다고 하니 갑자기 숙연해지고 만다.

최근 재심을 거쳐 무죄로 판결 난 인혁당재건위사건 희생자들 8명에 대한 사형집행(1975.4.9)이 떠오른다. 법원에서 사형판결이 내려지기 전 사형장에서는 사형집행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또 판결이 내려진 뒤 24시간조차 지나지 않은 상태에 8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이러한 정권의 행위에 놀란 것은 이들의 가족뿐이 아니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세계최대의 사법살인이라며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정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이곳에 와서 느끼고 상상해 봐야 할 것은 지난 일제시대에 머물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이곳을 벗어 나 출입구 쪽으로 돌아 오면 여옥사가 있다. 일명 <유관순지하감옥>이라 불린다. 일제는 1934년경 옥사를 고쳐 지으면서 이 지하감옥을 매립하였으나 1992년에 독립공원을 조성할 때 발굴·복원하여 놓은 곳이다. 유관순열사가 바로 이곳에서 옥사했다고 한다.

참고로 우리는 감옥이라고 하면 모든 감시와 통제 속에서 죄수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끔직한 공간으로 상상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우리나라에서만, 아니 이보다 더 정확히는 '해방 된 이후' 우리나라에서만 적용되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시인 김남주는 감옥에서 종이와 펜을 빼앗겨 '우유 갑 안쪽 은박지를 뜯어내 못으로 눌러 새겨 쓴 시' <그랬었구나>에서 우리의 현실을 폭로했던 것이다.

아 그랬었구나
로마를 약탈한 민족들도
약탈에 저항한 사람들을 감옥에 처넣기는 했으되
펜과 종이는 약탈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보에티우스 같은 이는 감옥에서
'철학의 위안'을 쓰게 되었구나

아 그랬었구나
캄캄한 중세 암흑기에도
감옥에는 불이 켜져 있었구나 그래서 그 밑에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을 쓰게 되었고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쓰게 되었구나

아 그랬었구나
전제군주 짜르 체제에서도 러시아에서도
시인에게서 펜만은 빼앗아가지 않았구나
그래서 체르니세프스키 같은 이는 감옥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쓰게 되었구나

아 그랬었구나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도
우리 민족을 노예로 전락시키고
우리말 우리 성까지 빼앗아간
이민족의 치하에서도
감옥에서 펜과 종이를 빼앗아가지 않았구나
그래서 단재 신채호 선생 같은 이는 여순옥에서
'조선상고사'를 쓰게 되었구나
우리말로 우리 역사를!

아 역사를 거꾸로 살 수 있다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차라리 나는 고대 노예로 다시 태어나고 싶구나
차라리 나는 중세 농노로 다시 태어나고 싶구나
차라리 나는 일제치하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구나
펜도 없고 종이도 없는 자유대한에서 그 감옥에서 살기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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