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안 / NGO활동가, 재일동포 2세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일동포 2세, 배안 NGO활동가가 9월 26일부터 10월 6일까지 북한에 다녀왔다. 배안 활동가로서는 33년 만에 다시 찾는 평양행이었다. 아울러 원산도 둘러보았다. 평양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그리고 북녘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왔을까? 강산도 세 번 이상 바뀐 33년만의 방북기를 5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다시 찾은 평양호텔

▲ 평양호텔 안마당. 이곳에서 친지, 친구 그리고 동창생들을 33년 만에 다시 만났다. [사진 제공-배안]

비 오는 만수대언덕을 뒤로 하고 버스가 다시 떠났다.
“평양에 요새 비가 잘 오지를 않았던데 여러분들이 이곳에 오시자마자 비가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복을 가져다 오신 셈입니다”고 안내원 한 사람이 웃으며 말한다.

사실 비가 많이 온 것 같지는 않았다. 평양에 머무는 동안 호텔 식당에서 야채를 구경하기 어려웠고 수력발전에 전력공급이 많이 의지된다는 얘기를 듣고 있기도해서 가족, 친척집 방문시에 느닷없이 찾아온 정전을 나름 맛보면서 이곳에 사는 이들의 불편을 제대로 경험한 셈이다.

숙소에 거의 다 왔다. 33년 전과 같은 평양호텔을 향하고 있다.
언제 한번 불이 난 바람에 개축되었다는 소문도, 옛날 그 모습과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바람결에 들려왔다..

▲ 33년 전에도 같은 호텔에 묵었었다. 33년 전의 평양호텔에 선 필자. [사진 제공-배안]

그땐 지방구경 갔다 오거나 외출했다 들어오면 호텔입구 맞은 편 오른쪽 편에 있었던 바에 들르며 외국인들과 못하는 영어를 구사하면서, 또는 날 부끄럽게 할 정도로 우리말을 잘하는 중동 기술자에 감탄하면서 얘기를 나누며 재미있게 지낸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리웠다. 하긴 많이 지친 몸을 끌고 술 먹자는 마음준비가 될 것 같지가 않았다.
늦잠 잘까 봐 뜬 눈으로 밤을 새워 이른 새벽 마지막 짐을 챙긴 다음 5시엔 공항을 향해 집을 떠나왔다.

방으로 들어가면 무조건 침대 속에 처박혀 그냥 잠이나 잤으면 했다. 저녁밥 한 번쯤 걸러도 일없었다(북쪽 말로 괜찮다는 뜻). 오늘 하루 있었던 다시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들 다 잊어버리고 꿈세계로 가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나뿐만었을까?

그런데 나의 그런 작은 속셈은 버스가 호텔 정문에 다다르려 했을 때 완전 무산이 되고 말았다. 아니 몇 초 전까지 작정했던 일들이 망각의 세계로 쫓겨났다. 버스 정면 유리창 너머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립고도 그리운 초등, 중학을 함께 지낸 친구이었다.

33년 만에 만난 친지, 친구 그리고 동창생들

▲ 평양거리에서 만난 할아버지와 손녀. [사진 제공-배안]

버스를 내리면서 ‘왜?’란 말이 입 밖으로 나가기 전에 그냥 뜨거운 것이 볼에 흐르고 있었다. 앞을 가리지 못한 채 서로 껴안고 울기만 했다. 어렵게 그리고 힘 들게 살아온 친구였다.

부모님을 일찍 여위고 할머니 슬하에서 살다가 그들 형제는 할머니를 따라 중3때 이곳으로 들어왔다. 나이 드신 할머니가 당신께서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손자 둘만을 두고 일본에선 눈을 감지도 못 하겠다며 그들을 데리고 오신 것이다.

일본에서 뒷받침해 줄 가족도 친척도 없이 온갖 곤란을 이겨내면서 그는 예술대학을 졸업한 뒤 평양시내 예술단에 취직했다. 그런데 웬일이냐 10수년 전 그는 일본공연단원이 되어 우리 앞에 갑자기 나타났던 것이다. 그때 우리 모두를 얼마나 놀랍게 했는지 모른다. 그를 둘러싸고 도쿄의 호텔에서 동창회를 성대하게 가졌다. 그때도 이렇게 눈물로 만났었지.

50대 중반을 넘은 우리지만 언제든 만나기만 하면 초등학교시대로 되돌아간다.
“울긴 왜?”하는 그의 볼도 젖어있었다.

그외 평양에서 볼 예정이었던 사람들도 다 호텔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렸을 때 함께 자란 동생들, 육촌들, 동창생들, 시댁 어르신까지… 보고 싶었던 사람들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우리 다 같이 먹을대로 나이는 먹었건만 만나기만 하면 금방 옛날로 돌아간다.

호텔 식당에서 10여명이 같이 식탁을 둘러싸 옛이야기며 근황이며 교환하면서 울고 웃는다.

나를 맞아준 사람들 중에 중고등학교 때 귀국한 동창생 하나가 더 있었다. IT관계 회사에서 일본어 번역 등 체크하는 일을 한다는 그녀. 내가 북으로 떠나오기 직전 일본에 사시는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90대란 사실이 믿기기 어려울 정도로 창창하셨고 건강하게 지내셨는데 갑자기 가시게 된것이다. 그녀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시게 됐는지를 유가족들에게 전하는 일이 나한테 맡겨져 있었다.

“나이도 있고 해서 우리 다 각오했었어. 건강하게 잘 지내셨다는 게 다행이다”며 슬픔을 금하려 한다.

이 친구는 북에서 제 꿈을 펼치겠다며 오빠랑 단둘 고1때 귀국의 길로 올랐다.
그들이 귀국선을 타고 북으로 떠나기 전날 니이가타 숙소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와 둘이 같이 울면서 작별한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 정말로 33년 동안 못보고 지냈을까?”

▲ 평양시내의 교통안전원. [사진 제공-배안]

금방 통일이 될 것이다. 조일관계가 개선될 것이다. 이 말에 의심을 품고 북으로 건너간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사실 그땐 차별과 가난이란 현실 앞에서 재일동포 청년들이 일본에서 꿈과 희망을 펼치기엔 환경은 너무도 열악했다.

재일동포들이란 식민지 치하에서 강제로, 또는 조국에서의 살길을 잃고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을 말한다. 우리말도 글도 이름마저 빼앗긴 우리 동포들은 우리나라의 국민들과 똑 같이 해방을 맞긴 하였지만 해방 전과 다름없는 차별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늘 일본의 주민으로서의 의무를 강요받긴 하지만 사람답게 살기위한 권리를 제대로 가지지도 못하였다. 그것은 지금 현재도 변할 바가 아니다.

대학에서 높은 성적과 능력이 평가되었다 한들 일반기업에 취직할 수 있는 가망은 거의 없었다. 교원, 학자, 연구자가 되려도 일본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길은 단념이란 한마디로 짤려지고 말았다. 기업을 운영해 보자 해도 융자해줄 금융기관이 있어야 되며 복지제도 또한 외국인이란 이유로 그 적용에서 배제된 상황이었다.

생활보호제도가 유일하게 재일동포들에게 ‘준용’되었지만 재일동포들의 어려운 생활은 거의 대부분이 이 제도를 이용해야만 하는 형편이었었다. 당초에 그처럼 반대해 나선 일본정부가 재일동포들의 북으로의 귀국을 허가한 이유는 조선인들에 게 더 이상의 생활보호비 지급을 바라지 않아서였다는 웃을래야 웃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은 이미 증명된 바이다.

오늘도 ‘북송’이란 한마디로 귀국사업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일본이나 남쪽에나 적지 않다. 그때 재일동포들의 생활정형, 사회적 위치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라면 꼭 그렇게만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때 우리 친구들이며 친척들과 잠깐 못 보게 되는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우리는 서로 몇 년 후에 또 보자면서 헤어졌다.

하긴 분단과 대립이 우리의 자유로운 왕래를 갈라 막아 버렸다. 혈육의 정이며 우정이며 미움이며 원망이며 하는 다른 모든 정을 나눌 마당을, 평범한 생활들을 빼앗겨버렸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려는 임종의 그 시간에도 떠나가실 분들이 이 세상에 작별을 나누어야 할 귀중한 마당에도 행복과 기쁨으로 넘친 마당에도 이별, 이산이란 단어가 가족이란 단어 위에 씌어져 있는 자들에겐 그 자리에 설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가슴아픈 일이다. 잠시 우리 사이에 침묵이란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는다.

좋고 나쁘고, 즐거우며 서러우며, 기쁘고 슬프고를 거듭하면서 많은 시간이 지나갔지만 그때나 오늘이나 우리 사이에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서로가 깊숙이 아줌마, 아저씨가 되었고 나는 손자를 가진 신세가 되고 말았다. 눈물을 일단 닦고 난 뒤엔 금방 아줌마, 아저씨 토크가 꽃 핀다.

“얘, 니네 남편 뭐 하는 사람이니?”, “아이는 몇이니?”, “넌 일하냐? 무슨 일하냐?”, “엊저녁 뭐 먹었니?”, “어떤 요리를 잘 해 먹냐?” 등등…

직장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 부하들이 말 잘 안듣는다니 상사가 어떻다니 남편이 집안일에 제대로 협력 안 하는 얘기며 마누라가 남편을 잘 이해를 아니하다는 얘기며 아줌마, 아저씨들이 하는 얘기는 온세상 어디가나 똑 같다.

“우리 정말로 33년 동안 못보고 지냈을까?” 서로가 못보고 지냈던 게 거짓말 같다며 얼굴 맞대며 웃는다.

평양이 나에게 잘 왔다며 미소 짓는다

▲ 고운 한복을 입고 평양시내를 활보하는 여성들. [사진 제공-배안]

평양 인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내 감상에 자리를 함께한 사람들 모두가 입을 모은 듯 말한다.

“어려운 고개를 넘으며 우린 여기까지 왔어. 고난의 행군시절 그땐 정말 어려웠지. 그냥 어려울 정도가 아니야. 지금도 앞으로도 넘어야 할 산들이 낮지도 적지도 않지만 꼭 더 잘 살 수 있게 될 거야.”

이 말이 거짓말은 아니라는 건 그들의 표정에서 알아차릴 수 있다. 그 험난한 고난의 행군의 나날 일본에선 겪어보지도 상상도 못한 수많은 실망, 슬픔과 아픔, 기아를 이겨내며 견뎌낸 그들이었다.

높다랗고 웅장한 건물들은 그들의 노력과 인내력의 상징이며 넓고 길게 뻗은 거리는 그들의 피와 땀으로 닦아진 것이다.

날씬한 몸매에 고운색 옷을 멋지게 입은 어여쁜 여자들이 눈에 띄게 많아진 것도 사실이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자신감에 넘쳐 보이는 것은 이런 하나둘도 아닌 가시박힌 어려움을 뚫고 온 하나의 결실인 것이다.

분명히 여기는 평범하고 평온한 마음을 안고 살고 싶다는 사람들의 동네인 것이다.

사람 사는 냄새며 풍경이며 누구나가 가지는 욕망도 희망도 당연히 여기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차례졌다.

북의 뉴스라면 핵개발이요, 미사일 실험이요, 하다못해 북붕괴란 한마디로 결론지으려 하는 치졸한 미디어들 치고 진실을 전하라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미국과 맞붙은 나라인 것이다. 대국에 빌러붙기를 바라지 않고 제발로 서고 제손으로 먹고 그저 평온하게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나라인 것이다.

이런 기골에 넘친 나라를 대국들의 그림자에마저 겁내 하며 부들부들 떨며 눈치 보는 그런 나라와 비교하고 평론하며 평가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용감하게도 그 어려운 시기를 지내온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 온 동네에 넘친 것 같았다.

평양이 나에게 잘 왔다며 미소를 짓는다.
행복한 밤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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