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 얼마나 밑이 빠진 토요일이냐!
- 파블로 네루다

아, 얼마나 밑이 빠진 토요일이냐!
하구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는,
이 매력적인 유성,
호텔마다의 물결치는 발들,
성급한 오토바이 주자들,
바다로 달리는 철로들,
폭주하는 차륜을 타고 달리는 엄청난 부동자세의 여자들.
매주일은 남자들과, 여자들과
모래에서 끝난다,
무엇 하나 아쉬워하지도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종잡을 수 없는 산으로 올라가고,
의미도 없이 음악을 틀어 놓고 마시고,
기진맥진해서 콘크리트로 다시 돌아온다.
나는 토요일마다 정신없이 마신다,
잔인한 벽 뒤에 감금되어 있는
죄수를 잊지 않고,
죄수의 나날은 이미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 엇갈리고, 내달리는, 웅성거림은
바다처럼 그의 주변을 적시지만,
그 파도가 무엇인지를 그는 모른다.
야아, 이 분통이 터지는 토요일,
제멋대로 날뛰고, 소리 소리 지르고,
억병이 되게 마시는,
입과 다리로 철저하게 무장한 토요일-
하지만 뒤끓는 패들이 우리들과 사귀기를
싫어한다고 불평은 하지 말자.


즐겁게 살라고 한다. ‘재미’가 이 시대의 트렌드라고 한다. 도대체 한국 사람은 놀 줄 모르는 게 문제라고 한다. 그러면서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라는 이론까지 들먹인다.
정말 그렇게 즐겁게 살아도 될까? 우리는 망설인다. 올바르게 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면 올바르게 살면 우리는 인생을 제대로 사는 걸까?

'즐겁게 사느냐? 올바르게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우리는 햄릿의 고민을 해야 할까? 햄릿은 그런 ‘이분법적인 고민’을 하다 기회를 놓쳐 실패했다.

신화에서는 즐거움에는 플레저(Pleasure)와 해피니스(Happiness), 그리고 조이(Joy)가 있다고 한다. ‘플레저’는 감각적인 쾌락이고, ‘해피니스’는 정신적으로 기분이 좋은 것이고, ‘조이’는 깊은 깨달음의 즐거움이다.

보통 사람들은 플레저(Pleasure)와 해피니스(Happiness)가 즐거움의 전부인 줄 안다. 하지만 플레저(Pleasure) 뒤에는 불쾌가 따라오고, 해피니스(Happiness) 뒤에는 불행이 따라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강렬한 플레저(Pleasure)와 해피니스(Happiness)를 추구한다. 그래서 인생이란 게 점점 더 자극적인 쾌락과 더 깊어지는 불쾌 사이를 하염없이 왕복 운동하는 허무와 권태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삶의 진정한 즐거움에는 조이(Joy)가 있다. 이것은 깊은 깨달음의 즐거움이기에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천진한 아이들의 얼굴 표정, 위인과 성자들의 은은한 미소에서 조이(Joy)를 볼 수 있다.
아이들은 자신이 겪는 고통들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아무리 힘들어도 울음으로 날려버린다. 그리곤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간다. 그래서 니체는 최고의 인간을 ‘아이’라고 했다. ‘아이’의 마음을 지니고 살 때 우리는 조이(Joy)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인류는 오랫동안 원시부족사회를 이뤄왔다. 그때는 모두 즐겁게 살았다고 한다. 우리는 ‘아마존의 눈물’에서 당시의 삶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즐겁게 살면서도 올바르게 살았다.
그러다 청동기, 철기가 등장하면서 부족 간에 ‘소유’를 향한 전쟁이 벌어졌다. 이때부터 인간 사회에 ‘선(善)과 악(惡)’이 등장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

이제 인간은 ‘삶의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고달프게 일하며 올바르게 살아야하는 슬픈 존재’가 되어버렸다. 삶이 축제가 아니라 숙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항상 ‘올바르게 살아야하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악들이 선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인간 세상은 생지옥이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선악의 강박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은 즐겁게 살면서도 올바르게 살 수 있다.
니체는 정신병원에서도 ‘나는 행복하다!’고 외쳤다. 그는 조이(Joy)를 안 것이다. 그는 인간을 플레저(Pleasure)와 해피니스(Happiness)만 추구하며 사는 ‘최후의 인간’과 자신을 극복해가며 조이(Joy)의 경지에 이르는 ‘초인’으로 분류한다.

우리는 네루다가 ‘아, 얼마나 밑이 빠진 토요일이냐!’고 노래한 ‘최후의 인간’과 과감히 결별해야 한다.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강박증’에서 벗어나 원시인, 아이처럼 신나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 결국 올바르게 살게 된다.

‘즐겁게 사느냐? 올바르게 사느냐?’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즐겁게 살면서도 올바르게 사는 것!’ 이것이 우리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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