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환(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박근혜 대통령에게 왜 욕심이 없겠는가. 의도야 어땠든 간에 박정희 대통령이 7·4남북공동성명을 낳은 주역이고, 박근혜 대통령 자신은 2002년 5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직접 만나 통일을 논의했던 당사자니 대통령이 된 지금 통일에 뭔가 한 획을 긋고 싶은 욕심이 있겠지. 그래서 새누리당에서 ‘통일대박=통일대통령 박근혜’라는 얘기도 나오는 거겠지.

2월 25일에 박 대통령이 대통령 직속기구로 ‘통일준비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공약하자 이런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물론 박 대통령의 ‘드레스덴 구상’ 발표(3월), 한·미정상회담(4월) 등을 거치며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과연 박 대통령에게 통일을 진전시키려는 의지가 있는지 회의하는 쪽이 많았지만, 그래도 박 대통령이 남북관계 카드를 내려놓을 리 없다고 생각했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악화된 국민 여론이 박 대통령으로 하여금 남북관계 카드를 만지작거리게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했더랬다.

인천아시안게임 북한 응원단 방남이 무산되면서, 곧 남북관계를 개선할 좋은 기회를 박근혜 정부가 날려버리면서, 그리고 박근혜 정부가 일부 탈북자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를 전혀 제어하지 않으면서, 내 생각이 틀렸던 건 아닐지 한창 반성하고 있을 즈음 북에서 ‘그들’이 왔다.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은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이 열린 10월 4일 정홍원 국무총리에게 “이번에 좁은 오솔길을 냈는데 앞으로 대통로로 열어가자”고 말하고 떠났다.

10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은 8월 7일 1차 회의에 이어 두 달 여 만에 통일준비위원회 2차 회의를 주재하며 사흘 전 휴전선 인근에서 발생했던 총격 사건에도 불구하고 아래처럼 말했다.

“‘전쟁 중에도 대화는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이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을 위해서는 대화가 지속되어야 합니다. 고위급 접촉을 남북 관계 개선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지금 핫 이슈인 5·24 문제 등도 남북한 당국이 만나서 책임 있는 자세로 진정성 있는 대화를 나누어 풀어 나가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통일준비위원회가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통일에 대한 국민의 의지를 결집하는 역할을 해 주셔야 합니다.”

박 대통령이 천안함 사건에 대한 ‘북한의 인정과 사과’를 명확히 언급하는 대신, 일단 만나서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자고 말한 만큼, 곧 있을 남북고위급접촉에 5·24조치 해제 문제가 의제로 올라올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박 대통령이 통일에 진정으로 한 획을 긋기를 원한다면, 지금부터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국내외에서 어떠한 반대가 있더라도 대범하게 5·24조치를 해제하는 것이다. 통일준비위원회 위원들의 ‘건의’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5·24조치를 해제하는 것도 방법이 될 듯싶다. 5·24조치를 그대로 두고 박 대통령이 공언한 ‘통일대박’을 이루어나갈 수는 없다. 5·24조치 해제와 함께 박 대통령이 꼭 챙겨야 될 일은 일부 탈북자단체들의 위험천만한 대북 전단 살포, 김정은 제1위원장 건강이상설 유포 같은 남북관계 악화 요인을 제어하는 것이다. 악재가 쌓일수록 남북관계 개선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다음으로 7·4남북공동성명, 6·15남북공동선언, 10·4선언 등 역대 남북 합의에 대한 이행 의지를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 특히 10·4선언에 명시된 남북의회회담, 남북국방장관회담, 남북부총리급회담, 남북총리회담, ‘수시’ 남북정상회담 등을 실질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10·4선언에 명시된 여러 회담을 정기적으로 가지면서 남북관계 현안을 풀어나간다면, 남북은 사실상 ‘남북연합’으로 진입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남북연합은 한국 정부 통일방안인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통일 2단계에 해당한다. 이렇게 되면 통일 1단계인 화해협력은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통일 2단계인 남북연합은 박근혜 정부가 진전시킨 셈이 되고, 이 쯤 되면 박 대통령은 적어도 통일 분야에서만큼은 뚜렷이 한 획을 그은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반대로, ‘그들’이 찾아와서 겨우 만들어진 남북관계 개선 기회를 박 대통령이 또 날려버린다면 ‘통일대박’, ‘통일대통령 박근혜’는 일장춘몽에 그칠 것이다. 박 대통령 임기도 3년차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시동이 늦게 걸릴수록 도달 거리는 짧아지는 법이다. 박 대통령은 어떤 선택을 할까?

 
동국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 밖에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경실련 통일협회,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같은 통일 관련 단체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평화와 통일의 사건사』(2014, 공저), 『동북아시아 열국지 2: 팍스 아메리카나의 뒤안길』(2013), 『동북아시아 열국지 1: 북·미 핵공방의 기원과 전개』(2012), 『구술사로 읽는 한국전쟁』(2011, 공저), 『북한위기론: 신화와 냉소를 넘어』(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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