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1. 피리 부는 사나이

변기가 고장이 났다. 물이 내려가다 말고 변기 가득 고여 흘러넘친다. '뚫어 뻥'을 사서 며칠 동안 갖은 애를 써 봐도 변기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전문가를 불렀다.

전문가가 힐긋 보더니 '뚫어 뻥'을 변기 중앙에 대고 두어 번 힘껏 압력을 가하자 변기가 거짓말처럼 뻥! 뚫렸다. 물이 시원하게 콰르르 소리를 내며 내려갔다.

"이럴 수가! 와, 역시 전문가이십니다!"

나는 그를 극찬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아니? 수고한 것도 별로 없잖아. 그런데 수고비를 도대체 얼마를 줘야 한단 말이야?'하는 생각이 가슴에서 몽글 피어났다.

나는 순간, '피리 부는 사나이'가 퍼뜩 머리에 떠올랐다.

'그렇구나! 그 사람들도 이런 심정이었겠구나! 그래서 약속한 엄청난 수고비를 요구하는 피리 부는 사나이를 한 푼도 주지 않고 내쫓아버렸겠지.'

'신나게 피리를 불며 여기저기 다닌 것밖에 없잖아!'

나는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얼마를 드려야 합니까?"

그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출장비 2만원만 주세요."

나는 "네, 감사합니다."하고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2만원을 공손하게 드렸다.
변기 고친 것 생각하면 참 싼데, 수고비로는 꽤 비싼 듯한 '전문가 수고비'다.

2.

전문가 /  기형도

이사 온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의 집 담장들은 모두 빛나는 유리들로 세워졌다

골목에서 놀고 있는 부주의한 아이들이
잠깐의 실수 때문에
풍성한 햇빛을 복사해내는
그 유리담장을 박살내곤 했다

그러나 얘들아, 상관없다
유리는 또 갈아끼우면 되지
마음껏 이 골목에서 놀렴

유리를 깬 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이상한 표정을 짓던 다른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곧 즐거워했다
견고한 송판으로 담을 쌓으면 어떨까
주장하는 아이는, 그 아름다운
골목에서 즉시 추방되었다

유리담장은 매일같이 깨어졌다
필요한 시일이 지난 후,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충실한 그의 부하가 되었다

어느 날 그가 유리담장을 떼어냈을 때, 그 골목은
가장 햇빛이 안 드는 곳임이
판명되었다, 일렬로 선 아이들은
묵묵히 벽돌을 날랐다

변기를 시원하게 뻥 뚫어준 전문가! 인상 좋은 동네 아저씨. 나는 변기기 막힐 때마다 그의 넉넉한 웃음을 생각할 것이다. 그는 이제 내 속에서 군림하고 있다.

나는 이제 '수세식 변기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변기를 차츰 숭상하게 될 것이다.

내가 어릴 적엔 '변소'가 있었다. 수세식 화장실을 보지 못했으니 변소가 흉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좀 무섭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수세식 화장실을 만나게 되면서 '변소'는 더럽고 견딜 수 없는 악취가 되어버렸다. 이제 나는 수세식 화장실 없이는 살기 힘들 것이다.

아무리 '순환하는 새로운 문명'을 얘기해도 우리는 그 악취를 견딜 수 없어 결국 '새로운 문명'을 받아드릴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엄청난 '상전들'을 모시고 살아야 할 것이다. 온갖 '전문가들'. 그들 앞에 우리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펼쳐놓아야 할 것이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나 철도고등학교 운전과를 졸업한 후 기관조사로 근무하다 충북대학교 사회교육과에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잠시 전교조 활동을 했습니다. 교직을 떠난 후 빈민단체(주거연합)에서 활동하다 한길문학예술연구원에서 시 창작을 공부했습니다. ‘리얼리스트 100’에서 주는 제6회 민들레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지금은 경기도 부천에서 살며 글을 쓰고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나무’ 산문집 ‘명시 인문학’ 에세이집 ‘숲’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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