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흔히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하여 더 많이 안다는 것 뜻하죠. 즉 아는 만큼 우리의 사랑도 커지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알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내가 딛고 사는 이 땅의 역사를 활자가 아닌 내 발로 직접 느껴보고자 나의 한양도성기행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횟수를 거치면서 내가 보고 느꼈던 것들을 나 스스로 정리해보고, 또 그것을 함께 공유해 보고자 글로 남기기로 한 것이며, 또 내가 역사전문가가 아니기에 혹 잘못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지적과 비판은 기꺼이 환영합니다. /필자 주

<필자 프로필>
후퍼소프트(www.whoopersoft.com) 대표이사
<하나를 위하여 : 민통선-DMZ 통일나들이>, <북한영화, 그리고 거짓말> 저자, <21세기 민족주의>(공저)

서울 성곽길에서 상상하며 느껴보는 우리역사 

흔히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발 딛고 사는 서울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것을 도대체 어디서 시작해야 할 지 난감했다.

그러던 중 600년 전 서울의 첫 모습, 즉 서울성곽을 먼저 떠올리며 옛 한양도성을 돌기로 했다. 약 18.6Km에 해당되는 서울 성곽. 바로 이 길을 걸으며 우리의 역사를 찾고 느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성곽 자체가 나에게 역사를 가르쳐주지는 않을 것이다. 오로지 직접 그 곳을 밟고 지나며 주변에 남겨진 흔적을 통해 마치 퍼즐조각을 맞춰 나가 듯 지난 우리의 역사를 상상하는 것이다.

성곽 길을 통한 역사기행으로 정한 다음 어디서 시작해야 할 지 고민하던 중, 역사기행이란 어차피 과거의 흔적을 따라 상상하며 퍼즐조각 맞추듯 엮어내야 하는 여행이다. 이런 핑계로 도성 사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돈의문을 택했다. 그리고 그곳에 가기 위해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서대문역>에서 도성순례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돈의문 ~ 사직터널 구간

<서대문역>에서 펼쳐지는 조선 500년, 계유정난과 임오군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로 나오자 좌우로 ‘조선 500년의 역사’가 마주 서있다. 우측 농업박물관은 조선 초 계유정난(1453)으로 수양대군에게 살해된 우의정 <김종서의 집 터>이며, 좌측 서울적십자병원은 조선 말 봉건지배층과 일본제국주의에 대하여 총칼로 저항하며 싸웠던 임오군란(1882)의 현장이다. 바로 이곳에서 구식군대가 싸움을 벌이고 무기를 탈취한 <경기감영 터>이다.

▲ 서울적십자병원(좌)은 조선 말 경기감영이 있던 곳으로 동대문에서 시작된 ‘임오군란’의 첫 격전지였다. 그리고 농업박물관 및 농협(우) 일대가 계유정란의 신호를 알렸던 김종서 집터로 여기서 김종서가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된 곳이다. [사진 - 유영호]
최근 영화 ‘관상(2013)’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계유정난은 우리에게는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주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자신이 권좌에 오르고자 일으킨 일종의 역모이다.

수양대군의 할아버지인 태종은 조선 건국 후 각종 공신으로 가득찼던 조정을 핏빛 숙청을 통해 정리했고, 그런 조선을 수양대군의 아버지인 세종에게 물려주었기에 세종은 안정된 왕권으로 북방의 영토를 확장했고, 한글 창제 등 거대한 문화사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은 자기 형 문종으로 이어진 왕위가 그의 아들 단종으로 넘어가는 권력을 탐하여 결국 단종의 오른팔이었던 김종서를 바로 이곳에서 살해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계유정난은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단종을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냈으며, 결국 수양대군이 왕권을 찬탈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제 태종에 의해 사라졌던 공신들이 수양대군과 함께 계유정난을 일으킴으로써 수양대군의 왕권찬탈과 함께 되살아 난 것이다. 여기서 권력찬탈을 위해 힘썼던 수많은 공신들에게 분배된 것은 권력과 재산뿐만이 아니었다.

김종서, 황보인은 물론이며 사육신의 아내를 공신들의 첩이나 노비로 나누어 주었는데, 특히 신숙주는 단종이 서인으로 강등되어 사사되니, 얼마 전까지 자신이 임금으로 모신 단종의 정비 정순왕후 송씨를 자기 첩으로 달라고 주청하기도 하였다. 세조도 차마 자기 질부(姪婦 : 조카의 아내)를 공신의 첩으로 주는 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나 보다.

비록 이렇게 신숙주의 청은 거절되었지만 이러한 그의 폐륜적인 행동을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우리 후대들도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만들어 준 말이 ‘숙주나물’이다. 녹두나물은 신숙주의 변절만큼이나 쉽게 변질된다고 하여 이를 ‘숙주나물’이라고 고쳐 부른 것이다. 이리하여 신숙주는 영원히 변절자의 상징적 인물이 되고 말았다.

어쨌든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으로 인하여 이제 조선은 ‘임금의 나라’가 아닌 ‘공신의 나라’로 변했으며, 이는 임진왜란을 거치며 사대부의 당쟁을 여는 씨앗이 된 것이니 여기 농업박물관 앞 <김종서의 집 터>라는 표석 앞에서 나는 조선 당쟁사의 그 뿌리를 상상해 본다.

이렇게 조선 초의 역사를 생각하며 길 건너 서울적십자병원을 바라본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400년이 넘는 세월이 훌쩍 지나 조선의 멸망사 속으로 나는 빨려 들어간다. 조선 말기 이곳은 외세에 빌붙은 민씨 외척에 의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총칼을 들고 항거한 곳이다.

바로 1882년 임오군란의 현장이다. 임오군란은 구식군대에게 그 동안 밀린 13개월 급료를 쌀로 주면서 겨와 모래가 섞인 것으로 주어 폭발한 항거였다. 분노한 병사들과 가족 등 백성들은 동대문에서 봉기하여 전 선혜청 당상이었던 관찰사 최보현을 죽이려 이곳 경기감영으로 왔지만 그는 이미 도주하고 없었다. 이에 분노한 군인들은 경기감영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으며, 이 무기로 바로 서쪽으로 난 길 건너편에 위치한 일본공사관(현 동명여고 자리)을 습격하고 불살라 버렸다.

도주한 최보현과 민씨외척 민겸호 등은 그 뒤 결국 이들에게 체포되어 처형되고,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일본으로, 민비는 경기도 이천으로 각각 도피하였다. 이는 그야말로 조선민중들이 외세와 봉건지배층을 응징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후 민비의 사대주의적인 ‘청나라에 대한 도움 요청과 일본의 개입’으로 임오군란은 결국 실패하고 이후 조선은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군화발에 짓밟혀 가기 시작했다.

<4.19혁명기념도서관>, 이기붕 가(家)의 멸문지화(滅門之禍)

서대문역을 나오자마자 이처럼 좌우에서 맞이하는 조선 전후기 커다란 두 개의 사건은 결코 이번 기행이 간단하지 않으며, 깊은 생각을 하게끔 할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이런 마음가짐을 하고 발길을 옮기려니 그저 표식으로만 표시된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 커다란 건물이 막아 나선다. 그것은 바로 <4.19혁명기념도서관>이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곳에 ‘4.19혁명기념’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건물이 서 있는 것일까? 좀 자세히 알아보니 이곳은 바로 4월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3.15부정선거의 주범 이기붕의 집이 있었던 곳이다.

▲ 자유당정권 시절 제2의 경무대로 불렸던 이기붕의 집이 있던 곳으로 4월혁명으로 이기붕 가족 전원이 자살함으로써 집을 헐고 지은 <4.19혁명기념도서관>. [사진 - 유영호]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선거를 한 달도 못 남겨둔 채로 사망하여 대통령선거는 단독선거가 되었고, 부통령선거는 자유당 이기붕과 민주당 장면의 대결이 되었다. 이에 부통령에 출마한 이기붕을 당선시키려고 거대한 부정선거를 자행한 것이다.

이에 분노한 민중의 저항이 곧 4월 혁명인데, 바로 이곳 이기붕의 집에 군중들이 몰려와 그를 잡으려 하였다. 이기붕의 자택은 자유당정권 시절 ‘제2의 경무대’라고 불릴 만큼 온갖 권력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기붕 일가는 모두 경무대로 도주하고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곳을 경비하던 경찰의 총격으로 수많은 민간인 살상이 발생한 장소이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이기붕의 집에 들어가 가구 등을 가져 나와 모두 부수었다.

한편 경무대로 도주한 이기붕 가족은 그곳에서 맏아들 이강석이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 동생 등 모두를 권총으로 사살하였고, 그 총구는 이강석 자신조차 예외로 하지 않았다.

이처럼 멸문지화가 되고만 이기붕의 집을 그 뒤 1963년 정부소유로 하였다가 4월혁명단체에게 증여함으로써 현재는 관련 단체의 사무실 및 도서관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도서관 로비는 4월혁명 당시의 사진들로 꾸며져 비록 사진으로나마 지난 4월혁명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각 층마다 일반열람실, 참고열람실, 전자정보시용실 등으로 꾸려져 있다. 

제 이름마저 빼앗기고 사라진 슬픈 대문, <돈의문(敦義門)>

▲ 돈의문~사직터널 구간 역사기행 장소. [자료 - 유영호]
서대문역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는 불과 250미터 내외임에도 그 짧은 공간 속에서 양파처럼 겹겹이 싸인 우리 역사를 상상하며 드디어 한양도성의 서쪽에 있는 대문, 즉 돈의문에 도착했지만 그 흔적조차 없이 그저 이곳 정동사거리 우리은행 강북삼성병원영업점 앞에 돈의문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있을 뿐이다.

사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그 형체도 없이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문이다. 돈의문은 일제시대 전차궤도를 복선화한다는 명목으로 1915년 헐려 버렸다.

당시 돈의문은 경매에 붙여져 염덕기라는 사람에게 단돈 205원에 낙찰되었다. 당시 쌀 한가미가 16원 할 때니, 도성 4대문 중의 하나인 돈의문이 쌀 13가마니 값에 팔린 셈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낙찰받은 목재 등의 가격보다 돈의문을 헐면서 엄청난 보물이 쏟아져 나와 횡재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 1915년 전차궤도의 복선화로 헐려버린 <돈의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것은 이 현판뿐이다. [사진 - 유영호]
이렇게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 돈의문은 참 기구한 운명을 갖고 태어난 문이었다. 한양도성의 사대문 가운데 계속 자리를 못 찾고 한양 성곽의 서쪽을 이리저리 헤매다 이곳에 자리를 잡을 만하니 일제에 의해 헐려진 대문이다.

돈의문은 처음 태조5년(1396년) 도성을 완성할 때 다른 대문들과 함께 건설되었으며, 그 위치는 지금의 독립문 근처 사직동 고개 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던 것이 태종13년(1413년) 풍수학자 최양선의 건의로 이를 없애고 그보다 더 남쪽에 새로 지으며 이름조차 서전문(西箭門)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10년이 못돼 다시 폐쇄되고 세종4년(1422년) 지금 내가 있는 이곳 정동사거리에 ‘돈의문’이란 이름으로 자리하게 된다. 명칭이 뜻하는 바는 ‘의의(意義)를 북돋는 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꾸 자리를 이동하며 새로 지어졌기에 조선의 백성들은 이를 속칭 ‘새문’ 또는 ‘신문(新門)’이라 불렀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속칭 남대문, 동대문으로 불린 것과는 이점에서 크게 다르다. 그래서 내가 지금 서있는 이곳을 우리는 ‘새문안로’(서대문로타리~광화문로타리)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돈의문을 서대문이라 명명하는 것은 과연 일제의 잔재인지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우리는 사대문의 각 고유명칭 보다는 방향을 나타내는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 등에 익숙하다. 그런데 이것이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명칭이라며 기피하기도 하는데 꼭 일제 때만 쓰였던 명칭은 아니다. 광해군 6년(1614년) 저술 된 이수광의 《지봉유설 》에 의하면 숭례문, 흥인지문을 속칭 남대문, 동대문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돈의문을 서대문이라 부르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경성(京城) 팔문은 정남은 숭례라 하며 속칭으로 남대문이라 부르고, 정북은 숙청이라 부르고, 정동은 흥인이라 하며 속칭으로 동대문이라 부르고, 정서는 돈의라 하며 속칭으로 신문(新門)이라 부르고, 동북은 혜화라 하며 속칭은 동소문이라 부르고, 서북은 창의라 하고, 동남은 광희라 하며 속칭으로 남소문이라 하고, 서남은 소덕이라 하며 속칭으로 서소문이라 부르고 또 수구문이 있어 이 양 문으로 장사지낼 사람이 나간다.” 《지봉유설 》

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념은 근대에 이르러서도 지켜지는데 <독립신문>의 기사를 훑어보더라도 ‘새문밖’이니 ‘새문안’이니 하는 표현은 나오지만 ‘서대문’이라고 지칭한 구절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또한 <대한매일신보>의 경우에도 ‘서대문정거장’을 일컬어 ‘새문밖정거장’이라고 적어놓은 사례는 아주 흔하게 발견된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면 초기에 두 번 등장한다. 하지만 그 뒤 ‘서대문’은 우리의 기록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들 사이에 통용되던 이름이 바로 ‘서대문’이었다. 일제시대에 편찬된 자료를 보자.

“돈의문을 조선인은 신문, 내지인은 서대문이라 부른다.” -《조선만록》(마츠다코:松田甲, 조선총독부, 1928.)
“신문(新門) 즉 내지인(內地人)이 서대문이라 부르는 것은 이전에…” -《향토자료 경성오백년》(경성부공립보통학교교원회, 1926.)

이러한 자료에 근거해 볼 때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이 돈의문을 서대문이라 칭하며 새로운 시설이나 지배기관이 들어서거나 행정구역이 개편되는 족족 그들의 편의대로 ‘서대문’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면서 이러한 용법은 더욱 확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서대문구, 서대문역, 서대문경찰서, 서대문형무소 등 아직도 모든 것이 ‘서대문’이다. 심지어 경인선의 출발지였던 정거장(현 통일로 의주로 공원일대)까지 모두가 다 서대문으로 표기되고 또 그렇게 불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일제의 잔재가 지금까지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또 있다. 서울 중구(中區)는 조선시대 청계천 이남에 위치해 있다 하여 남촌(南村)이라 부르던 곳으로 일제시대 들어와 일본인들이 대거 거주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된 곳이다. 조선총독부, 조선헌병대, 조선신사, 경성신사등 일본 시설이 주로 위치하였으며 충무로, 명동일대가 일본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형성된 것이다.

영화 <장군의 아들>(1990)에서 청계천 이북 종로를 장악하고 있던 조선깡패 김두한이 청계천 이남 충무로깡패 하야시와 결투를 벌이는 장면을 떠올리면 쉽게 상상이 될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당시 상황에서 1943년 일제는 행정효율화를 위해 구제(區制)를 실시하며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남촌이 조선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중구(中區)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중구의 핵심이었던 혼마치(本町:본정)는 충무로로 바뀌었는데 구(區)의 명칭은 여전히 중구(中區)이다. ‘남대문구’나 ‘남산구’ 정도로 지금이라도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 본다.

인간의 본성,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형상된 한양도성

한양도성에는 사대문과 사소문을 설치하였는데, 여기서는 사대문에 대해서만 간단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 한양도성의 사대문과 보신각에 각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한 글자씩 넣어 한양은 오상(五常)을 갖춘 ‘인간의 공간’으로 형상하였다. [자료 - 유영호]
유교를 중시하는 조선시대는 그 이름 하나 하나에도 모두 그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며 지었다. 그런데 한양도성은 동서남북에 각 대문을 설치하였고 그 명칭을 각각 흥인지문(興仁之門), 돈의문(敦義門), 숭례문(崇禮門), 숙정문(肅靖門)이라 칭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면 각 대문에는 맹자에 나오는 4덕(四德) 즉,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각 한 자씩 넣은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가 더 있다. 맹자의 4덕에 한나라 동중서가 오행설에 기초하여 신(信)을 추가한 것이다. 이것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이를 오상(五常)이라 하여 유가에서는 이 다섯 가지는 ‘인간에게 있어서 변하지 않는 성품’이라 하였다. 즉 이 오상이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는 경계’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은 도성을 지으면서도 이 오상을 염두에 두고 건설한 것이다. 따라서 도성 사대문에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넣고 나머지 신(信)은 도성의 중심인 보신각(普信閣)에 넣어 한양 도성이야 말로 짐승이 아닌 인간이 살아가는 곳,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모두 갖춘 곳으로 형상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에 따르면 한양도성의 북문에는 ‘지(智)’ 자가 들어가야 하는데 전혀 다른 명칭인 <숙정문(肅靖門)>이라 하였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여기에 들어가야 할 지(智)는 훗날 숙종 때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도록 축성한 홍지문(弘智門)이 그것을 대신한다는 주장(강기옥)과 숙정문 자체가 다른 이름으로 소지문(昭智門)이었다는 주장(형기주)이 대립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싶다. 예컨대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구도를 잡을 때 세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조화’와 ‘균형’ 그리고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미술이론을 접목하여 숙정문은 획일적이지 않은 ‘변화’로 해석하고자 한다. 물론 이것이 역사적이거나 실증적인 논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런 방식으로 유교가 획일화되는 것을 유연화시켰다고 상상하고 싶을 뿐이다.

어쨌든 90년대 이후 대한민국이 신자유주의 질서에 편입되면서 ‘자본의 논리’ 속에 날로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현실을 볼 때 서울이라는 공간을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갖춘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으로 그 의미를 부여한 우리 선조의 뜻을 다시금 새겨야 할 때인 듯 싶다.

따라서 이 오상 가운데 의(義)를 담은 돈의문부터 성곽길을 걸으며 항상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마음에 넣어두고 그 뜻을 되새기며 걷도록 노력하기로 하였다.


* 필자의 착오로 <오마이뉴스>에 먼저 실려 1,2회 분을 함께 싣게 됐습니다. 앞으로는 <통일뉴스>에 단독 연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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