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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보세이 프로세스’다” NCCK 화해통일위원장 조헌정 목사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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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0.13  18:4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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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절을 전후해 평양을 다녀온 조헌정 목사와 9월 27일 향린교회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지난 8.15 광복절을 전후해 평양에 머문 기간 중 매일 아침 대동강변 산책을 다녔다는 조헌정 목사는 “북쪽이 자신감이 좀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향린교회 담임목사인 조헌정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화해통일위원장은 8월 13~16일 평양을 방문, 봉수교회에서 ‘민족의 화해와 단합, 평화통일을 위한 8.15 남북공동 기도회’를 가졌다.

조헌정 목사는 지난 9월 27일 향린교회에서 가진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성찬 예식을 남과 북이 한팀으로 함으로써 상당히 많은 감동을 줬고, 우리도 눈물들을 많이 흘렸지만, 북측도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목격했다”고 감격스러워했다.

북행 길이 거의 막혀 있는 상황에서 드물게 방북한 NCCK 대표단은 최근에 들어선 릉라인민유원지와 문수물놀이장 등을 관람했고, 변화된 평양의 분위기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번에 평양에 가서 보니까 세대가 바뀌고 있더라. 평양봉수교회도 아주 젊은 사람으로 담임목사가 바뀌고 세대교체를 하고 있었다”면서 “3년 전에도 봤지만 작은 구멍가게들이 지금은 더 많이 생겼더라”고 전했다.

또한 “달라진 것은 평양 시내가 잔디를 심어서 상당히 녹화가 잘 돼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고층건물도 상당히 많이 세워졌다”면서 “내가 보기에 예전에 비해서 구호들이 상당히 많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아파트 건물 짓는데 보니까 군인들이 와서 일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6월 17~19일 스위스 제네바 보세이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초청으로 북측 조선그리스도연맹 대표단과 함께 ‘한반도의 정의, 평화와 화해에 관한 국제 컨설테이션’에 참석한 그는 “예전까지는 ‘도잔소 프로세스’라고 부르는데 이제는 ‘보세이 프로세스’다”고 선언했다.

30년 전 WCC의 초청으로 일본 도잔소에서 남북 교회 대표단이 처음으로 만난 이후 주로 대북 인도적 지원 사업이 주류를 이뤘다면 이번 국제회의에서는 인도적 지원 보다는 ‘통일’ 문제를 직접 논의하게 된 계기를 맞았다는 것.

그는 국제회의 도중 발생한 에피소드를 전하면서 “지금까지 인도적 지원만으로 제한돼 있었던 교회의 만남이 이제는 조금 더 그것을 벗어나서 정치적 역할이라고 할까, 남북통일에 밑거름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는, 기조가 바뀌는 그런 만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정전협정이 체결일인 지난 7월 27일에 즈음해 워싱턴 백악관 앞에서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행진하고 시드니 사일러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한반도 담당 보좌관을 만나 한반도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인 일화 등은 우리의 현주소를 냉정하게 살펴보는데 시사점이 적지 않다.

그는 “오히려 북을 더 악마화시키고 그래서 남북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키는데 미국 전략이 숨어있는 것 아니냐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라며 “한.미의 군사동맹이 한반도 운명을 쥐고 흔드는, 이런 정치적 상황이 70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 우려를 표했다.

다음은 조헌정 목사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스승들이 김재준, 함석헌, 문익환 목사”

   
▲ 조헌정 목사는 KNCC 화해통일위원장으로서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이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화해통일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평화와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게 된 계기는?

■ 조헌정 목사 : 내가 한국신학대학 다닐 때 스승들이 김재준, 함석헌, 문익환 목사였다. 자연히 민족문제, 통일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우리 남쪽 사회의 모든 부조리 현상들이 사실 분단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인식은 대학생 때부터 갖기 시작했다.

내가 군대에서 철책선 근무를 했다. 3년 동안 철책선에서 성찰하면서 이렇게 억울하고, 이렇게 분한 일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가를 생각했다. 약소국가, 약소민족의 아픔이기는 하지만 미.소 특히 미국의 국제전략 속에서 하나의 희생물로 된 민족의 아픔 문제를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미국으로 가서 20년 넘게 그곳에서 공부하고 목회하면서, 거기에서는 거기 나름대로 또 한인 이민자들의 아픔 문제, 흑백 차별의 문제를 고민했다. 그러면서도 꾸준하게 민주화와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60년대부터 지금까지 민주화와 통일문제의 가장 핵심그룹이 북미기독학자회인데, 당시 60대가 하던 부회장을 내가 40대 초반으로서 처음으로 맡게 됐다. 젊은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국내 기독교 인사들이 90년대 초부터 미국 교회의 초청을 받아서 미국에 오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내가 워싱턴에 있으면서 뒷바라지 해드렸다.

신학적으로 민중신학을 공부했고, 내 삶의 기본 방향이 통일에 있다고 볼 수 있다.

□ 언제 한국으로 돌아왔나?

■ 2003년도에 홍근수 목사님 후임으로 향린교회에 왔다.

□ 지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화해통일위원장 이외에 맡고 있는 일은?

■ 몇 개 있다. 평화통일연구소 이사장도 있고, 전태일재단 이사장도 맡고 있고, 전쟁반대평화실현국민행동 대표직과 예수살기회라는 기독교모임의 상임대표도 맡고 있다.

□ 세계교회협의회(WCC)가 6월 17~19일 스위스에서 남북이 함께 참석한 국제회의를 개최했는데, 그 국제회의가 열리게 된 배경을 설명해달라.

■ 남북교회가 만나기 힘든 30년 전에 세계 교회가 남북교회를 서로 만나도록 일본 도잔소에서 양쪽 교회 대표를 초청해 공식적으로 남북교회가 직접 첫 만남을 가졌다. 그전에도 약간의 만남이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독일, 홍콩, 일본 등에서 4차까지 모임이 이어졌다. 5,6년 전쯤 홍콩에서 4차 모임이 있었고,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만나기가 거의 어려워졌다.

그런 상황에서 남북교회가 공식적으로 만나야겠다는 요청이 있었고, 북쪽은 북쪽 나름대로 강영섭 전 위원장이 별세하고 그의 아들인 강명철 위원장이 새롭게 위원장으로 진용을 갖췄고 또 남쪽은 남쪽대로 교회 지도자들도 좀 바뀌었다.

그리고 작년에 부산에서 10차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가 있었다. 원래 그 자리에 북쪽 교회 대표를 초청하려고 WCC가 노력했는데 성사되지 않았고,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함께 힘을 합쳐서 평화기차를 탔다.

WCC를 앞두고 한 달 전에 독일 브란덴부르크 광장에서부터 예배를 드리고 평화기차를 타고 모스크바와 이르쿠츠크, 북경을 거쳐 원래는 평양을 통과하기로 했다.

그러나 계속 남북 양측 정부를 설득하고 노력했지만 결국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결국은 단동에서 배로 인천으로 들어오고, 인천에서 부산으로 오는 여정이 됐다.

그 과정에서 남북교회의 만남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고, 회의체간 만남은 계속 있었지만 공식 대표모임은 못 가졌다.

그래서 남북교회의 만남이 절실하다고 여겨져 WCC에서 국제회의에 초청하는 형식으로 보세이에서 만나게 됐다. 북쪽도 외국에 나오려면 남쪽 보다는 WCC가 초청자가 되는 것이 편안할 것이다.

스위스에서의 ‘작은 사건’과 ‘보세이 프로세스’

   
▲ 남북 교회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스위스 제네바 보세이에서 WCC 국제회의가 열렸다. [자료사진 - 조헌정 목사]
□ 남북이 참석한 국제회의는 어떻게 진행됐고, 무슨 내용들을 논의했나?

■ WCC 15개국 약 30개 교단 대표들 60여명이 3박 4일 동안 회의를 진행했다. 남쪽에서는 15명 정도 대표단이 갔고, 북쪽에서는 강명철 위원장을 비롯한 4명의 대표단이 왔다.

회의 진행 과정에서 우리는 WCC 부산총회가 만장일치로 채택했던 ‘한반도 평화통일 성명서’를 재확인하고 어떻게 남북교회가 남북 화해와 통일에 앞장설 것인가 함께 논의했다.

성명서에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일, 한.미 군사훈련을 중지하는 일, 북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를 해제하는 일 등이 포함돼 있다.

□ 북측 대표단이 세대교체가 됐나? 남측은 큰 변화가 없어 세대차가 나지는 않았나?

■ 북도 바꿔가는 상황에 있고, 강명철 위원장도 54세다. 아주 젊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번에 평양에 가서 보니까 세대가 바뀌고 있더라. 평양봉수교회도 아주 젊은 사람으로 담임목사가 바뀌고 세대교체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남북 대표단이 한집에 함께 머물렀다. 그래서 공식적인 모임 외에 아침 식사도 같이하고 저녁에 자유롭게 대화도 나눴다. 그러면서 친밀한 관계를, 신뢰를 쌓아가는 그런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일은 세계교회가 남북 화해와 통일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그동안은 주로 인도적 지원 관련해서 많은 힘을 쏟아온 것은 사실이다. 교회다 보니까 정치적 이슈보다는 인도적 지원에 힘을 많이 기울여서 그동안 외국 교회가 북쪽 교회를 도와온 것이다.

알다시피 북쪽에서 김정은 정권 시대에 오면서 남쪽 교회나 세계 교회가 깃털만큼 주면서 그걸 가지고 너무 부풀린다. 소위 자존심 상한 일이라면서 받지 않겠다는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하나의 사건이 생겼다.

예전부터 30년 동안 WCC를 대표해서 일해 온 일련의 실무진들이 있는데, 우리가 협의하는 과정에서 지금 인도적 지원에 관련한 사안은 상황이 바뀌고 있으니까 의제에 다루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실무진 가운데 그런 일들 주로 했던 사람들이 세미나에 인도적 지원 한 꼭지를 마련해서 주도적으로 진행한 거다.

그런데 너무 노골적으로, 앞에 사람을 두고 우리가 어떻게 도왔느니 도표를 그려가면서 설명해 도중에 북쪽 대표들이 나가 버려 회의가 중단됐다. 우리도 ‘이건 아니다. 북쪽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 생각했다. 설득해서 다시 회의를 재개하기는 했다.

지금까지 인도적 지원만으로 제한돼 있었던 교회의 만남이 이제는 조금 더 그것을 벗어나서 정치적 역할이라고 할까, 남북통일에 밑거름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는, 기조가 바뀌는 그런 만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전까지는 ‘도잔소 프로세스’라고 부르는데 이제는 ‘보세이 프로세스’다. 이제부터는 교회가 통일에 좀더 밀착된 일들을 해야겠다는 그런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오랜만에 북측 관계자들과 편하게 만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겠다.

■ 나는 사실 외국에서 20년 있으면서부터 전혀 꺼릴게 없으니까 마음의 문턱이 덜 하는데 처음 가신 분들은 보이지 않게 마음의 문턱이 많다. 밥 먹을 때도 북쪽 사람 혼자 앉아 있는데도 가지 못하더라. 나는 가서 같이 먹었다.

   
▲ 보세이 회의에 참석한 남북 기독교 대표자들이 포즈를 취했다. 조헌정 목사 왼편이 강명철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장. [자료사진 - 조헌정 목사]
□ 강영섭 위원장이 오랫동안 위원장을 했는데, 강명철 위원장은 할아버지 강양옥 목사로부터 3대째 이어온 셈이다.

■ 강양옥 목사가 김정일 위원장의 어머니 쪽으로 6촌 삼촌이다. 그리고 믿음의 뿌리가 굉장히 깊은 집안이다. 강양옥 목사는 같이 나라를 세운, 유공자 중에서도 핵심 유공자다.

강명철 위원장이 54세에도 불구하고 최고인민회의의 가장 핵심인 상임위원회 12명의 상임위원 중 가장 나이어린 위원이다. 우리는 3권 분립이 돼 있지만 북쪽은 당을 중심으로 하나로 돼 있기 때문에 최고인민회의라는 게 모든 권력의 핵심이 다 모여 있다. 거기 상임위원 12명 중 한 명이니까 상당한 파워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실은 다른 단체나 종교단체들도 북측에 다 초청장을 요청했지만 결국 첫 번째로 성사된 것도 강명철 위원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8.15 방북, 잊지 못할 ‘통일의 노래’

   
▲ 남북 목회자가 한팀으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찬식이 진행됐다. [자료사진 - 조헌정 목사]
□ 8월 13~16일 방북했는데, ‘8.15 방북’이라고 하면 되나?

■ 공시적인 명칭은 ‘민족의 화해와 단합, 평화통일을 위한 8.15 남북공동 기도회’인데, 북측에서는 ‘남북공동 대회’로 하기로 서로 양해가 된 상황이다.

□ 당시 몇몇 단체들이 방북을 신청했지만 통일부가 승인하지 않았는데 방북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 초청장은 왔지만 통일부에서 허락이 잘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WCC 부산총회 과정에서 통일부가 두 번이나 방북 승인과 관련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 그 빚이 남아 있어서 상당히 어려운 과정을 거쳐 승인을 받았다.

방북 인원도 사실은 애당초 9개 교단이 모이다 보니까 초청장이 30명이 왔는데 결국은 통일부의 요청에 의해서 19명으로 제한해서 다녀온 셈이다.

□ 평양에서의 일정을 소개해달라.

■ 13일 북경을 통해서 들어갔는데 강명철 위원장이 공항까지 나왔고, 보통강호텔에 숙박했다. 나로서는 3년전 인도적 지원을 위한 방북 후 처음이었고, 97년부터 다섯 번째 방북이었다. 지난번에도 보통강호텔에 묵었고 같은 장소에 또 가고 그래서 나로서는 상당히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둘째날은 만경대 고향집을 방문하고 국가선물관을 참관했다. 예전에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에 있던 선물 상당부분을 평양으로 옮겨왔다. 최근에 지어진 것 같다.

오후에는 옥류아동병원 그리고 ‘평양산원 유선종양연구소’를 방문했다. 유선종양연구소는 유방암 전문 연구소다. 모두 처음 가본 건데, 김정은 시대에 와서 새롭게 만들어진 현대식 병원들이고 MRI 같은 최신 의료기구들을 들여놨더라. 그리고 옥류아동병원에서는 다른 지방에 있는 병원과 화면으로 진료해 주는 장면도 보여주더라.

그리고 8.15 광복절에는 봉수교회에서 기도회를 가졌다. 내가 5번 갔을 때마다 예배실이 거의 다 찼었는데 이번에는 반 정도 모인 것 같다. 그들이 얘기하기를, 시간이 짧아서 연락하는데 힘들었다고 하더라.

예배 사회는 봉수교회 담임목사인 송철민 목사가 봤는데, 아마 40대 초반 정도인데 미남형이더라. 강명철 위원장이 환영사하고 김영주 총무가 답사하고, 봉수교회 전도사가 기도하고 설교와 성찬식을 진행했다.

성찬식을 진행할 때는 떡과 잔을 나누는 예식이 있는데, 남북이 서로 빵과 포도주를 들고 한팀이 돼 3팀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살과 피를 함께 먹는, 화해와 하나되는 가장 중요한 의식이다.

성찬 예식을 남과 북이 한팀으로 함으로써 상당히 많은 감동을 줬고, 우리도 눈물들을 많이 흘렸지만, 북측도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목격했다.

   
▲ 조헌정 목사가 '통일의 노래'를 북측 성가대와 함께 부르고 있다. [자료사진 - 조헌정 목사]
특별히 나한테는 잊지 못할 감격스러운 일이 있었다. 내가 3년 전에 갔을 때 우리 교회 국악찬송가 중에 ‘통일의 노래’를 독창했는데, 봉수교회 성가대가 노래를 부르고 성가대원 8명이 따로 나와서 노래를 몇 곡 했는데 그 중에 ‘통일의 노래’를 하는 거다.

깜짝 놀랐다. 내가 한 노래를 잊지 않고 노래해 준 것에 대해서. 너무 잘 부르더라. 사실 그 노래는 국악풍이니까 남쪽에서도 잘 안 불려지는 노래다. 그런데 북쪽 찬양단이 그것을 부르니까 나는 감동이 막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거다.

그리고 이번에 갈 때도 우리가 답송을 해야 되니까 노래 두 곡을 준비했는데 그 가운데 ‘통일의 노래’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나가서 노래 부르면서 두 번째 곡으로 그 노래를 부를 때는 그들을 다시 나오라 해서 사이사이에 끼어서 함께 ‘통일의 노래’를 불렀다. 나한테는 굉장히 감격적인 순간이었고 모든 사람들에게도 참 감격적인 시간이었다.

내가 나오는 길에 어떤 나이드신 할머니 한분이 옆에 오더니 나보고 “목사님, 세 번째 뵙습니다” 그러더라. 사실 우리가 ‘북측 그리스도인이 정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냐’하는 질문들을 많이 제기한다.

내가 우리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교인들한테도 그랬다. “참 그리스도인이냐고 묻는데, 당신들은 참 그리스도인 입니까?”, “자기는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근거가 뭡니까?” 이렇게 질문 던졌던 적이 있다.

북쪽은 사회주의 국가라서 전도하는 것, 이런 것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있다. 그러나 북쪽 어디를 다니나 김일성.김정일 부자 사진이 놓여있고 어디를 가나 뱃지룰 달고 다닌다. 그러나 북쪽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들어올 때는 다 떼고 들어오고 교회 건물 어디에도 사진이 없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북쪽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종교를 인정해 준 것 아니냐.

우리들이 3년 전에 갔을 때 가정교회를 갔었다. 열댓 명에서 스무 명씩 동네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다. 그런데 얄궂은 목사 한 명이 같이 갔었는데, ‘이게 거짓일 줄 모른다’고 생각해 찬송을 부르는데 자기가 임의로 고르는 거다. “이것 부릅시다”, “이것 부릅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이 사람들이 다 부르는 거다.

그러니까 이 목사가 스스로 “내가 잘못 오해했다”고 이야기하더라. 누구를 향해서 “당신 정말 그리스도인이냐? 정말 교인이냐?” 묻는 것은 굉장히 오만한 질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은 굉장히 비신앙적인 질문이다.

또 하나 감동적인 것은, 1993년인가 조선그리스도연맹 대표단이 처음 미국 장로교회 초청으로 워싱턴과 뉴욕에 온 적이 있다. 그때 통역관으로 온 김혜숙 선생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당시에 종교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특별히 미국이 기독교니까 굉장히 비판적이었다.

이 사람이 그동안에 문익환 목사라든가 한상렬 목사를 보고 나서 본인이 신학교를 다녀서 이번에 가니까 목사가 됐다. 김혜숙 목사가 남쪽에서 간 이은성 교수와 함께 성명서 낭독을 했는데 나로서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미국에서 목회할 때 우리 교회에 북측 대표단을 초청했을 때부터 알고 있어서 감명 깊었다.

“매일 아침 대동강변 산책 갔다”

   
▲ 엄청난 규모로 설립된 문수물놀이장 모습. [자료사진 - 조헌정 목사]
□ 최근엔 북행길이 막혀 있어 드물게 방북한 케이스다. 3년 만에 가서 둘러본 소감은?

■ 다른 때는 묘향산 가느라고 평양 외부로도 가고 했는데, 이번에는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평양시 밖으로는 나가 보지 못했다.

달라진 것은 평양 시내가 잔디를 심어서 상당히 녹화가 잘 돼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고층건물도 상당히 많이 세워졌다.

내가 3년전 방문했을 때 짓고 있던 굉장히 독특한 건물도 봤다.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그렇게 고층빌딩으로 지으면서 독특한 양식으로 지은 건물은 보지 못했다. 너무 멀어서 사진을 못 찍었다.

그리고 평양시민들의 얼굴에 예전에 보지 못했던 약간의 자신감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예배드리고 나서 15일 오후에 릉라곱등어(돌고래)관과 릉라인민유원지, 문수물놀이장을 참관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싱크로나이즈를 북쪽이 잘 하듯이 돌고래 쇼 같은 것도 상당히 잘하더라. 돌고래와 함께 다니며 물속의 장면을 TV로 그대로 보여주니까. 나도 돌고래 쑈를 미국에서 여러 번 봤는데 그런 건 못 봤다.

이런 모든 것들이 최근에 만들어진 것인데, 그날이 8.15라서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 나왔다. 물놀이장도 거대하게 만들어져 있더라.

   
▲ 릉라곱등어관에서 북측 젊은 여성과 함께 무대에 나선 조헌정 목사. [자료사진 - 조헌정 목사]
릉라곱등어관에서 하나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관람석이 꽉 차서 2,000명쯤 되는데 우리에게 맨 앞좌석을 줬다.

사회보는 젊은 남녀가 돌고래에게 더하기, 빼기 숫자 맞추기를 시키는데, 거기는 빼기를 덜기라고 하는데, “누가 하겠냐”고 장내의 신청을 받는다. 내가 앞줄에서 손을 들었는데 몇 칸 떨어진 초등학생 남자애와 동시에 손을 들었다. 그래서 사회자가 둘이서 가위주먹(가위바위보)을 하라는 거다. 내가 져서 억울해 했다.

그랬는데 그 다음에 돌고래가 주둥이에 조그만 훌라를 돌리는 걸 했다. 그런데 또 남자 한명, 여자 한명 지원을 받는 거다. 내가 맨 앞에서 계속 손을 들었다. 그랬더니 사회자가 ‘할아버지가 못하는데’하면서도 할 수 없이 내가 계속 손을 드니까 대표로 나가서 훌라후프 돌리기를 해보라는 거다.

북쪽은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스커트를 입고 왔고 나는 이런 차림으로 했는데, 나는 훌라후프를 좀 해봤다. 그래서 그 여자는 하나도 못하고 나는 막 흔들어서 훌라후프를 10번은 돌린 거다. 그랬더니 모두 껄껄대고 웃더니 앵콜쇼를 3번을 더했다. 갑자기 북쪽 인민 스타가 됐다고 박수치고... 내게 남아있는 추억거리다.

□ 방북 중에 예전과 다르게 느껴진 점들이 있다면?

■ 우리가 평양 보통강호텔에 묵으면서 사실 지금까지 밖에 산책을 못 다녔다. 나가려 하면 “어디가십니까?”, 양각도 호텔에서는 양각도가 어차피 섬이니까 그 이상 못 나가고, 고려호텔은 이미 다 보고 있으니까 더 이상 멀리는 못 간다.

외국 사람들은 조금 더 가기도 하는데 남쪽에서 간 사람들은 제한을 받는데 이번에는 제한이 없었고 앞에서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매일 아침 YMCA 남부원 사무총장과 같은 방에 있어서 같이 대동강변 산책을 나갔다. 그래서 주민들 고기잡는 것도 보고 한참을 걸어다니다 왔다. 우리도 조심스럽긴 했지만, 북쪽이 자신감이 좀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내가 보기에 예전에 비해서 구호들이 상당히 많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아파트 건물 짓는데 보니까 군인들이 와서 일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3년 전에도 봤지만 작은 구멍가게들이 지금은 더 많이 생겼더라. 아이스크림 가게, 군고구마 가게.

□ 방북의 하일라이트는 15일 남북공동 예배였을 텐데, 함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도와 찬송을 한 소감은?

■ 감격적이고 기쁘기는 한데,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이 이렇게 드문드문, 이런 식으로 제한을 받으면서까지 같이 예배를 드려야 되는 분단의 현실이 마음이 아팠다.

어느 사회고 모순이 없지는 않겠지만 북이 미국의 압박에 그렇게 홀로 싸워가면서 우리 민족의 자유와 독립의 어떤 정신을 세워나가는 어려운 과정을 보면서 마음으로 기도를 많이 했다.

이런 분단의 과정을 빨리 끝내고 하루속히 우리 민족이 하나 돼서 세계 평화와 인류 사회의 증진에 크게 이바지하는 나라가 돼야 한다.

지금은 내가 외국 나가면,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꼭 묻는 게 “From south or north?”를 묻는다. 이 사람들이 남쪽에서 온 걸 모르는 게 아니다. 일종의 비아냥이 그 안에 들어가 있다. 그럴 때마다 자괴감을 갖는다.

우리가 우리 안에 살 때는 우리만이 잘난 것처럼 이야기하고, 상대를 미워하고 하지만 밖에 나가면 세계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를 하나로 보면서도 형제 간에 서로 싸우는 참 어리석은 나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민족이 세계 시민이 우리를 바라보는 것을 빨리 깨닫고 이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되겠다.

시드니 사일러 면담, ‘회개와 용서’ 논쟁

   
▲ 정전협정 61주년을 맞아 7월 26일(현지시간) 백악관 앞까지 행진했다. [자료사진 - 조헌정 목사]
□ 분단 문제에서 미국이 굉장히 중요한 관계국인데, 특히 7월에 방미해서 관계자도 만난 것으로 안다. 미국 방문 이야기를 들려달라.

■ 원래 그 모임은 미국 연합감리회가 주도가 돼서 작년 6월에 아틀란타에서 한반도평화통일 심포지엄을 가졌고, 그 심포지엄에 이어서 올해 6월에 백악관 앞에서 평화행진을 했다.

정전협정 61주년을 맞아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라고 하는 미국 정부를 향한 평화행진 이었다. 미국 연합감리교회에서 시작해서 백악관 앞까지 약 2㎞ 정도 NCCK 10명을 포함해 300명의 기독교 목사들이 행진했다. 그 평화행진이 주된 거였고, 백악관 앞 라파예트 공원에서 평화기도회도 가졌다.

그 전날에는 평화심포지엄 회의도 가졌고, 특별히 미국 백악관에서 한반도 안보담당 책임자로 있는 시드니 사일러와 한국 대표단과 미국교회 대표단 9명이 두 시간 동안 백악관 회의실에서 대담을 가졌다.

그리고 같은 시간대에 다른 한국과 미국 대표단은 로버트 킹 국무부 인권대사와 교회에서 회의를 가졌다. 나는 킹 대사와 작년에 NCCK 대표단으로 가서 두 시간 동안 국무부 회의실에서 회의를 한 적이 있다.

물론, 짐작하다시피 미국 관료들은 미국의 입장을 계속 내세우면서 핵무기라든가 북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이 많았고, 미국의 정책 입장을 설명하는 방향으로 자꾸 갔다.

우리들은 세계교회가 협의한 대로, 또 우리 NCCK가 지난 88년부터 계속 주장해왔던 대로, 평화협정 체결과 한미군사훈련 중지, 중지가 아니라면 꼭 여기서만 군사훈련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북쪽이 반대하지 않는 좀 떨어진 제3의 지역에서 하라고 했다. 왜 하필 코앞에서 계속 하느냐는 거다. 또 경제제재 해제하라든가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꾸준하게 요청을 했다.

시드니 사일러가 당시에는 NSC 보좌관이었는데 지금은 6자회담 차석대사가 돼서 말하기 뭐한 점은 있는데, 이야기 중에 누군가가 일본의 재무장에 대해서 우려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사일러가 결국 미국 측의 입장을 대변해서, 자기가 한국에 있을 때 한국인인 와이프랑 모 대형교회에 다녔는데 어느 날 목사님이 회개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일본이 회개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하더라는 거다. 그리고 몇 주 후에 용서에 관한 설교를 해서 자기가 속으로 그 설교를 들으면서 ‘그러면 일본을 용서하면 되지 않나’ 이렇게 생각했다고 이야기하더라.

그래서 내가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No, repent first!”, “회개 먼저!” 그랬더니, 이 친구가 “No, forgiveness first!” 그러는 거다. 그래서 내가 되받아 가지고 “Why don't you forgive North Korea first?”, “용서가 먼저면, 너 왜 북한 용서하지 않느냐?” 그랬더니 사일러가 얼굴이 갑자기 벌개지고 화제를 돌리더라.

주로 목사들과 이야기 하니까 사일러가 자기 소원이 은퇴하면 북한 선교사로 가는 게 꿈이라고 얘기하더라. 북쪽 다 막아놓고 자기들 시나리오로 다 망한 다음에 가서 도와주겠다는 이야기 아니냐.

그래서 내가 뒷면에 하나는 사우스 코리아(South Korea), 다른 하나는 노우스 코리아(North Korea)라고 쓴 철 십자가가 있는데, 에스겔서에 나오는 성경구절을 이야기 하면서 그 십자가를 줬다.

에스겔이 살던 때도 남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북쪽의 유다 왕국이 멸망했지만 서로 미워하고 만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두 나라가 하나가 되는 상징으로 한쪽에는 북쪽, 한쪽에는 남쪽이라고 쓰고 그걸 한 손으로 잡으라는 그런 성경구절이 있다.

내가 걸고 있던 그 십자가를 줬더니 이 친구가 그걸 받더니 자기 목에 걸더라. 자기도 일정부분 거기에 동의한다는 뜻인지.(웃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십자가를 거니까 나는 속으로 ‘그래 고맙다. 미국을 대표하지만 그래도 신앙적으로 네가 그걸 넘어서려고 하는 뜻이 담겨 있다’고 이해했다. 그래서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 사일러는 전형적인 미국 관료일 텐데, 오바마 행정부가 민주당 정권임에도 북한에 대해 관여정책보다는 압박정책을 쓰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것 같다. 실제로 그런 건가?

■ 그렇다. 그런데 내가 느끼기에는 어느 정도 북의 발전 상황에 대해서도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다.

특별히 비핵 문제를 자주 이야기 하는데, 노정선 교수가 “WCC 성명서에도 나와 있다. 한반도 비핵화뿐만 아니라 세계 비핵화다. 단순히 북쪽에게만 비핵화를 요구하지 말라. 비핵화 하려면 당신들도 핵을 줄이고 세계가 비핵화로 가야 한다” 그런 입장을 전달했다.

그리고 <통일뉴스>에서 봤는데 헨리 페론이라는 중국 칭화대 박사과정에 있는 학자가 중국의 경제상황에 대해서 쓴 <아시아 저널> 4월호에 실린 글을 사일러에게 줬다. 내가 영어와 한글로 WCC에 가서도 미국사람들 한테 준 적이 있다.

그리고 그날 밤에 발표할 평화통일에 관련한 원고도 줬다. 미국이 과거에 ‘카쓰라-태프트’부터 시작해서 한반도 분단을 제안한 것도 미국이고, 분단의 결정적 책임을 지고 있다. 그리고 70년 동안 분단정책을 만들어 결국 북을 고립시키면서 한국과 일본에 지금까지 무기 팔아먹은 것 아니냐. 미국의 군수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악마는 미국이지 다른 게 아니다. 미국의 군수산업 이게 악마 아니냐. 이게 내 원고의 요점이다.

미국, ‘북이 핵을 갖도록 만드는 전략’

   
▲ 조헌정 목사는 시드니 사일러 당시 NSC 보좌관과 면담하기도 했다. [자료사진 - 조헌정 목사]
□ 생각보다 오바마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 소극적이거나 비관적인 것 같다. 뭔가 문제 해결을 시도해볼 생각이 없는 건가?

■ 커다란 의지가 없는 것 같고, 지금은 중동문제에 완전히 발목이 잡혀 있다.

한 때는 풀고 나가려고 하는 의지가 좀 있었던 걸로 보인다. 6,7년 전 대통령 선거 당시 뉴스를 보면 오바마 후보가 상당히 그런 의지가 있었다. “대화를 하려면, 북쪽의 지도자와 직접 만나겠다”, 그게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하다.

그런데 지금은 군수산업체제에 완전히 몰려서 북을 악마화 하면서 계속 무기 팔아먹는 게 미국의 기본적인 전략이다. 지금은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지만, 뉴스에도 나오듯이 북이 핵무기 소형화를 달성했고, 적어도 인공위성을 띄우는 상황에서 미국 본토도 어디든지 타격할 수 있다. 북은 또 그렇게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으로서도 더 이상 협상의 전략이라는 게 없는 상황이다. 북쪽은 핵에 관련해서는 이미 헌법에 핵보유를 밝혀놓은 상태 속에서 그게 생존의 문제가 걸려있는 상황인데 핵포기가 가능하겠냐.

그렇다면 지금 미국의 정보전략이 북한의 핵무기 전략을 꿰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약속을 파기하고 해온 것은 결국은 북이 핵을 갖도록 만드는 전략이 오히려 그 뒤에 있었던 것 아니냐. 그래서 오히려 북을 더 악마화시키고 그래서 남북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키는데 미국 전략이 숨어있는 것 아니냐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야기하다가 천안함 이야기도 나왔다. 시드니 사일러가 천안함 이야기를 해서 내가 “믿느냐?”고 그랬더니 “믿는다”고 해서 내가 말을 하려고 했더니 자기가 화제를 바꾸더라.

천안함 사건도 사실은 애당초 미국 국방부 대변인이 북한 소행 아니라고 처음부터 발표했었고, 또 이명박 대통령도 당시 원인을 밝히려면 1년은 걸린다고 했다. 다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하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다. 그러나 결국은 나중에 북한 소행으로 가고 미국은 발을 빼고 있었다.

내가 천안함 사건 직후 미국에 갈 일이 있었는데 그때 우연하게 미국 상원의원 청문회하는 걸 봤다. 그때 국방장관과 상원 국방위원장이 국방예산을 가지고 다툼이 있었다.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데 상원 위원장이 “대폭 예산을 삭감해야 하는데, 첫 번째 할 일이 F-35 개발 중지다. 더 이상 돈 쓸 수 없다. 이건 중지하라”고 이야기했다. 그때 국방부 장관이 “국가 예산 들이지 않고 개발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길래, 나는 그때 순간적으로 ‘아, 이거 남쪽에서 사기로 했구나. 모종의 협상이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래서 내가 그때, 벌써 4년 전에 돌아와서 설교시간에도 이야기하고 공공연하게 어떤 자리가 있을 때마다 “남쪽은 F-35 전투기 구입합니다. 천안함 사건과 연계돼서 이미 다 사기로 협약 맺었습니다”라고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서 1년 있다가 전투기 구입 이야기가 나왔고, 그리고 1년 있다가 F-35하고 프랑스 기종하고 어떠어떠하냐 하면서 마지막 순간에 ‘예산 부족으로 프랑스 기종으로 간다’고 신문에 났었다. 그 신문이 토요일자였는데 내가 그 다음날 일요일날 설교하면서 또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바로 며칠 후에 F-35로 결정했다고 언론에 나오더라.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 쉽게 말하면 한.미의 군사동맹이 한반도 운명을 쥐고 흔드는, 이런 정치적 상황이 70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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