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헌 /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오는 10월 16일이면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한 민가협 목요집회 1000 번째를 맞게 된다. 고난을 상징하는 보랏빛 머리수건의 양심수 가족들에겐 국가보안법도 양심수도 없는 세상을 위해서는 눈·비가 내린다 해서, 불볕더위와 한 겨울 강추위 때문에 쉬는 일이 없었다.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에만 머물지 않은 ‘목요일의 외침’

처음 모였을 때의 검은 머리는 어느덧 반백으로 변했고, 고운 얼굴들도 주름살이 잡혔다. 강산을 두 번씩이나 변하게 했을 시간이었고, 정권이 다섯 번이나 바뀌는 동안 목요집회는 사회적 약자의 신문고로, 정의·평화·인권을 지키는 파수대로, 반전평화와 자주통일을 외치는 종루가 되고 있었다.

탑골공원 앞에서의 목요집회는 그 자리 때문에도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강도 일제에 맞서 3·1 자주독립을 선언했던 그 역사의 현장에서 이제는 잘못된 법과 제도, 부당한 권력의 폭압에 맞서 자유와 해방을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의 보편 가치와 인간의 자주적 권리는 시대와 경계를 넘어 가장 정당하고 가장 치열한 함성으로 울려 퍼지게 했다.

이러한 ‘목요일의 외침’은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에 머물지 않았다. 매 시기마다의 인권실태와 노·사 관계, 생명·평화, 외세와 분단 등 시대 상황을 반영했다. 바로 학생운동, 노동운동, 생명평화운동, 자주통일운동 등 양심적 활동이 범죄로 몰려 시도 때도 없이 압수 수색과 강제 연행, 강압 수사와 구속 기소로 이어지는 민주주의 압살과 공안 탄압을 고발 규탄하고, 시민적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 그리고 자주 통일에 대한 민족 권리를 줄기차게 외쳐 왔다.

목요집회를 이끌어온 주인들은 부당하게 구속된 양심수 가족들이었다. 구속학생 학부모들이었고, 노동자·농민 구속자가족이었으며, 청년·민주인사 가족이었고, 장기구금양심수 가족들이었다. 그리고 양심수 석방과 후원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는 양심수 후원회원들이었다. 바로 민주화 실천 가족운동 협의회(민가협)이었다.

‘문민정부’에서 시작된 ‘목요집회’

이렇게 민가협 회원들이 거리에 나서 집회를 열게 된 데는 이른바 ‘문민정부’로 자처한 김영삼 정권이 대선 시기 인권관련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14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대신 인권 침해의 독소 조항이 없는 대체 입법을 말한 데 비해, 김영삼 후보는 국가보안법을 아예 없애겠다고 했으며, 당선 뒤에는 군사 독재의 상대 개념으로 ‘문민’을 자처하고, ‘변화와 개혁’을 내세우며, 앞으로는 양심수를 함부로 구속하거나 고문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인권개선 의지를 밝혔었다.

양심수 가족들은 대통령 취임 사면과 함께 언제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법적 절차를 밟을 것인지를 부푼 기대로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데 1993년 3월 6일에 실시된 ‘새 한국 창조를 위한 대화합 차원의 사면’은 실망 그 자체였다. 당시 구속 양심수 514명 가운데 28%인 144명에 그쳤다. 출소자 중 36명은 만기가 겨우 1개월을 남긴 사람이었고, 62명도 3개월을 남겨놓고 있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는 격이었다. 그것은 노태우 군사정권의 1988년 12월 21일 취임 사면과도 비교되었다.

1988년 양심수 사면은 당국이 말하는 이른바 ‘시국사범’(양심수) 194명 전원을 석방했고, 이른바 ‘공안사범’(장기구금양심수) 64명과 계엄군법회의 수형자 23명 등 양심수 281명을 석방했다. 그밖에도 ‘공안사범’ 94명에 대한 감형, 시국관련 수배자 61명 전원을 수배 해제 조치했었다. 특히 ‘시국사범’ 전원 석방에서 기결수 41명은 특별사면, 특별복권으로 석방하고 수사 중인 30명은 검찰이 구속 취소하여 석방했으며, 재판중인 123명은 법원이 구속 취소를 청구하고, 검찰이 공소 취하하여 석방했다. 가히 대사면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분명 군사정권이었지만, 6월 항쟁의 민중의 힘과 그 요청을 반영한 사면이었다. (물론 비전향 장기수 250여명은 [64명이 석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주 감호소와 대전, 대구, 광주 교도소 등에 많게는 40년 넘게 갇혀 있는 채 남아 있었고, 1989년 3월 이들의 석방과 후원을 목표로 민가협양심수후원회가 발족되었다.)

김영삼 정권의 약속 파기는 대통령 취임 사면에서 기만적 ‘선별석방’으로 끝나지 않았다. 군사정권에서도 있어왔던 석탄절, 광복절 사면도 없었다. 군사정권에 맞서 맨 앞에서 싸웠던 양심수는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국가보안법을 없애기는커녕 이 반인권, 반통일 악법에 의한 구속자는 계속 늘어났다. 3당 야합의 태생적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민가협에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1993년 9월 10일 민가협 운영위원회에서는 양심수 실태를 세상에 알리고,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전원 석방을 위한 목요집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그 첫 집회가 같은 해 9월 23일 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목요집회’가 그 해를 넘길 것으로는 민가협에서도 예상하지 못했다. 탑골 공원 앞에서 열기로 한 목요집회는 그해 12월까지 매 목요일마다 집회 주제를 정해, 예로써 10월 7일은 ‘43년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 석방을 위한 목요집회’로부터 12월 9일은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목요집회’ 그리고 12월 23일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한 목요집회’를 마지막으로 하는 1993년 말까지의 시한성 집회를 계획했었다.

그러나 목요집회는 해를 넘기게 되었다. 기대했던 양심수 석방은커녕, 무더기로 구속하는 반인권 공안탄압이 이어졌고, 국가보안법은 더욱 날을 세웠다. 김영삼 정권은 임기 5년 동안 ‘문민정부=양심수 없음’이란 “문민정부에서는 양심수가 없기 때문에 양심수 사면도 없다”는 오만과 독선으로 일관했다. 임기중 4263명의 양심수를 잡아 가두었고, 국가보안법 적용 양심수가 1974명이었다. 이른바 ‘문민정부’의 반문민성이었고, 목요집회가 이어지게 된 이유였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도 계속된 목요집회

50년 만의 실질적인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국민의 정부’는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개선은 물론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을 합의하는 등 남북사이 화해와 협력의 물꼬를 텄고, 자주적 평화통일로의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은 없애지 못했다. 사상전향제도를 없앴지만, 대체입법인 준법서약제를 도입했고(1998년), 양심수의 사면·복권으로 그 수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국가보안법은 살아있었다. 목요집회가 계속되어야 할 이유였다.

노무현 ‘참여정부’는 그 어느 정권보다 민주주의 원칙과 인권을 중시했고, 특히 언론자유시대를 이루게 했다. 또한 6·15 공동선언의 실천 강령으로서 10·4 평화번영선언을 합의해 남북관계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언론과 표현의 자유,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반북 대결자들에게까지 지나치게 허용하고, 대북송금 특검을 하는가 하면, 다 죽어가는 국가보안법을 끝내 폐지하지 못하여 반민주 동족대결 세력을 키워주고 있었다. 이 또한 목요집회를 이어가게 한 요인이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대통령 당선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서도, 지난 민주정부 시대를 ‘잃어버린 10년’이라며 6월 항쟁으로 일궈온 민주주의와 인권을 짓밟고 어떤 권력으로부터도 독립해야 할 국가인권위원회를 장악하는가 하면, 낙하산 언론장악, 쌍용·한진·한국철도·공무원노조·전교조 등 노동 탄압과 용산철거민 살인 진압, 주민이 반대하고 생명평화에 반하는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했다. 또한 국가보안법을 휘둘러 범민련 남측본부 실천연대, 한국진보연대, 평통사 등 평화와 통일운동 단체를 탄압하는가 하면,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고, 위헌정당심판을 청구하여 합법적인 통합진보당을 탄압말살하려 했다. 군사 주권을 외세에 맡기는가 하면, 살인무기를 도입하는 외세공조 동족대결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가히 유신 부활정권이고, 그래서 목요집회의 고발과 규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1000번의 목요집회, 수천 개의 요구와 주장들

1000번을 이어오는 목요집회에서는 적어도 2000 가지가 넘는 집회마다의 고발과 규탄과 주장들이 있었을 터였다. 장기구금 양심수를 비롯하여 통일애국인사, 청년 학생,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학문과 문학예술인 등 양심에 따라 활동하다 구속된 양심수들의 석방과 이들을 잡아 가두는 국가보안법, 보안관찰법, 노동관계법, 집시법 등 반민주 악법의 철폐 또는 민주적 개정을 요구하는 집회의 주제 말고도 위에서 말했듯이 인권과 민주주의, 사회정의와 생존권 문제, 반전평화와 자주통일과 관련된 현안들이 집회의 주제로 되고 있었다. 과연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 각 현안별로 시차 순서 없이 기억나는 일부를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인권과 민주주의와 관련해서는 5·18 학살자 기소 촉구, 안기부법·노동관계법 날치기처리 규탄, 테러방지법 제정 반대, 독립성과 실효성 있는 인권법 제정 촉구, 통신 검열, 전자국민카드, 현대판 연좌제 반대, 양심적 병역 거부와 대체복무제 주장, 재소자 인권 보장, 공안문제 연구소 폐지, 국정원 대선 개입 규탄과 해체 촉구, 촛불집회 탄압 규탄, 야간집회금지법 규탄, 패킷 감정 규탄, 통치권력의 언론장악 규탄, 인터넷 신문 자주민보 폐간 시도 규탄,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 시도 규탄 등이 있었다.

민중의 생존권과 도시 빈민, 사회적 약자의 권익과 관련해선 구조 조정과 정리 해고, 비정규직 문제 등을 비롯하여 이주노동자 노동인권 문제, 울산 건설 플랜트 노동파업과 탄압 규탄, 하이닉스 매그너침 비정규직 문제, 공무원 노조, 전교조 탄압, 철도 노조 탄압과 민영화 반대, 쌍용차 노조원 무더기 해고와 탄압 규탄, 화물연대 노조와 무더기 구속, 이랜드, 뉴코아 등 비정규직 노조 탄압, 재벌총수 등 사면 반대, 삼성반도체의 열악한 노동조건(백혈병) 규탄, 콜트콜택 부당해고, 공장 폐쇄 규탄, 기륭전자 부당해고·장기농성 지지, KTX 승무원 파업투쟁 지지, 한진중공업 무더기 해고 규탄,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고공농성 지지, 오산수창동 철거민 투쟁,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규탄, 장애인 차별 금지와 이동권 보장, 한미 FTA 반대, 쌀값보방 및 수입개방 반대, 미친소 수입개방 반대, 농민대회 살인집안 규탄 등이 있었다.

자주통일운동 탄압과 국가보안법 적용 공안 탄압 관련해선 범민련남측본부, 한총련, 한청, 범청학련남측본부, 실천연대 등 이적규정 규탄과 철회 촉구, 한국진보연대, 평통사, 자본주의 연구회, 가극단 ‘미래’ 등 탄압 규탄, 영남위원회 사건, 민혁당사건, 일심회 사건, 왕재산자선 등 공안탄압규탄과 내란음모조작사건 규탄, 송두율 교수, 강정구 교수 등 공안탄압을 규탄했다.

반전·평화와 관련해선 이라크 파병 반대, 한미연합북침전쟁연습 반대, 송정리 패트리어트기지 앞 집회 탄압 규탄, 핵 잠수함, 항공모함 입항규탄, 한일 군사정보호보협정 반대, 대북전단 살포 규탄, 애기봉 등 탑 점화 반대, 사드(THAAD) 배치 반대, 전시작전권 환수 촉구, 천안함 사건 진상규명 촉구,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 등이 있었다.

미군강점과 관련해선 여중생 미선·효순 살인 규탄, 주한미군의 성폭력과 총기난사 규탄, 주한미군강점비 반대, 주한미군 고엽제 매립 규탄, 주한 미군철수를 주장했다.

일본의 침략성과 과거 청산에 관련해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 역사왜곡 규탄, 독도영유권 주장 규탄, 재일조선학교고교무상화 제외 등 민족차별을 규탄,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기도 규탄 등이 있었다.

자주통일과 관련해선 통일운동단체와 통일애국인사의 탄압 규탄을 비롯하여, 6·15, 10·4 선언 이행 촉구, 비전향장기수 송환 촉구, 외세공조·동족대결정책 규탄, 5·24조치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 등 남북사이 교류·협력을 촉구하고 미군 없는 평화협정,우리 민족끼리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구했다.

이밖에도 목요집회에서는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고,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으며, 밀양 고압송전탑 건설과 제주해군기지 건설 등 생명·평화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같은 고발과 규탄, 주장들을 집회 참가자의 발언을 통해 세상에 알렸다. 발언자만 해도 수많은 각 계층 인사들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목요집회에 참여한 특별한 사람들도 있었다.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시대 학살·실종 등으로 희생된 ‘오월광장어머니회’의 후아나 파르라멘트와 아우로라 프라코리 등 두 어머니가 1994년 6월 9일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목요집회에 참석했었다. 또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 Rajiv Narayan 인권활동가(2004.9.6), ‘어머니의 이름으로 전쟁을 반대한다’고 외치는 이라크 참전 미군병사 어머니 신리 신예(2006.11.28), 유엔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 프랑크 라뤄(2009. 10.15), 미국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시 고교토론교사(1010.8.5), 재미동포 조국방문단(2012.8.9, 1014.8.28)이 목요집회에 참가하고 발언도 했다.

‘1000회-20년’ 이후에도 계속될 수밖에 없는 목요집회

이제까지 양심수 가족들의 목요집회가 어떻게 시작되어 어떤 내용으로 진행되었는지 그 대강을 알아보았다. 모든 집회가 그러하듯 민가협 목요집회도 양심수 가족들의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그 실현을 위해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1000번 집회를 맞고도 아직 그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 하여 아무 소득도 가치도 없는 집회였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의와 모순을 고발하고 정의·평화·인권을 위해 자주통일을 위한 민중의 의지를 담아 외쳐왔기 때문이다.

아직도 감옥엔 650여 양심수가 갇혀 있고, 국가보안법은 더욱 시퍼렇게 날을 세워 80살이 훨씬 넘은 통일 애국인사들을 법정에 세우고 있다. 대선개입, 내란음모조작, 간첩증거 조작을 한 공안기구가 여전히 평화와 통일 진영의 양심적 활동을 감시하고 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절반의 품삯을 받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 일하는 사람들 단결권마저 탄압하는 노동현실이 있다. 이윤추구 사회와 정부 당국의 방만한 대응으로 300여 명 귀한 생명을 잃은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뿐인가. 세월호 참사 가족의 대통령 면담을 철저히 막아서는 이 땅의 공권력은 전쟁을 불러올 대북전단 살포를 ‘표현의 자유’라며 방치하고 있다. 외세 공조 동족대결 정책이 빚은 반민족 반통일의 범죄 행패이다. 민가협 목요집회가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인권·반민주·반노동·반통일의 실상이다.

오는 10월 16일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는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전원 석방을 위한 민가협 1000회 목요집회가 열린다. 양심수 가족을 비롯한 사회 각계가 함께하여 지난 20년을 돌아보는 그리고 당면한 인권 실태와 사회적 과제를 문화공연 형식으로 시민들에게 전달할 것이다. 많은 관심 있는 분들의 참가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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