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측의 핵심 실세들로 구성된 고위급 인사 세 사람이 4일 전격적으로 남쪽에 왔다. 황병서 군총정치국장, 최룡해 노동당 비서, 김양건 대남담당 비서 등이 그들이다. 이들 북측 대표단은 4일 오전 10시경 남측에 왔다가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류길재 통일장관 등 남측 대표단과 회담을 하고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참석한 후 오후 10시경 북측으로 떠났다. 12시간 정도의 남측 체류를 어떻게 봐야 할까? 북측 대표단은 이날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여를 위해 인천을 방문했지만, 이는 명분일 뿐 실지 내용은 남북관계 개선에 있음이 당연하다. 일부에서 이들 방남의 ‘전격성’을 들어 갑작스런 방남으로 평가하는데 그렇지 않다. 매사에 주도면밀한 북측이 실세들을 보내면서 준비 없이 급작스레 보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전격 방문은 북측의 오래된 전술의 하나일 뿐이다. 오히려 북측 실세들의 방남은 준비된 것으로 봐야 한다.

북측은 지난 5월 23일 인천 아시안게임에 선수단을 파견한다고 공식 발표한 이후 7월 7일 최고 수준의 입장표명인 ‘공화국 정부성명’ 발표를 통해 이미 남북관계 개선의 강한 의지를 나타냈었다. 북측은 ‘공화국 정부성명’에서 “북남관계를 개선하고 민족 단합의 분위기를 마련하기 위해” 인천 아시안게임에 선수단과 함께 응원단을 파견하기로 했다면서 “우리의 이번 성의 있는 조치는 냉각된 북남관계를 민족적 화해의 열기로 녹이고 전체 조선 민족의 통일의지를 내외에 과시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북측은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를 응원단 파견을 통해 만들고자 했으나 응원단 파견이 무산되자, 이번 아시안게임에서의 폐막식을 통해 재시도를 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해진 이유는 아시안게임에서 북측 선수들의 선전과 남측 ‘남북공동응원단’의 응원, 특히 여자축구 결승전인 북한 대 일본전에서 남측 관중들의 일방적인 북측 선수 응원에 힘입어 애초의 구상을 실천할 수 있는 명분과 계기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역대 남북 당국 간 교류에서 이번 북측 대표단만큼 실세들이 무더기로 온 적이 없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시 김기남 당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이 방문했을 때보다도 이번 대표단에 그 무게감이 더 나간다.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은 북측 최고기관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직을 겸하고 있다. 사실상 서열 2위다. 최룡해 당 비서는 군 총정치국장,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정치국 상무위원 등 요직을 모두 꿰찬 경력의 소유자다. 최근 장성택 후임으로 국가체육지도위원장에 임명된 것으로 확인돼 건재를 과시했다. 김양건 대남담당 비서는 통일전선부장과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을 겸한 ‘대남통’이다. 남북문제 해결 뒤엔 항상 그가 있었다. 세 사람 모두가 각 영역에서 실세인 셈이다. 이번 북측 대표단이 역대 방남 인사들 중 가장 순도 높은 고위급 인사들이기에 그들이 가져왔을 대남 메시지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특이한 점은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군복을 입고 남쪽에 온 것이다. 하지만 낯선 풍경은 아니다. 그가 현직 군인이기에 당연할 수 있지만 여기엔 ‘북한식 의도’가 담겨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지난 2000년 당시 조명록 총정치국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워싱턴을 방문해 군복 차림으로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만난 것을 상기시킨다. 당시 조명록 총정치국장의 군복 차림은 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정전상태인 ‘전시(戰時) 중’임을 부러 상징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반면에, 이는 지난해 최룡해 당시 총정치국장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특사자격으로 군복을 입고 중국을 찾았다가 시진핑 주석을 면담할 때 인민복으로 갈아입은 점과 대비된다. 그렇다면 이번 황병서 총정치국장의 군복 착용은 남북관계의 군사적 대립을 표현한 것으로 봐야 한다.

북측 대표단은 이날 오후에 열린 남북 고위급 대표단 회담에서 그동안 남측이 제안했던 제2차 남북 고위급 접촉을 수용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 예방은 불발됐다. 실세인 북측 대표단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특사일 공산이 크고 특사라면 응당 박 대통령을 예방해 김 제1위원장의 메시지를 전해야 했는데, 2차 고위급 회담 성사라는 한정된 성과에 머물러 아쉬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뭔가 부족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꼭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다. 북측은 방남 하루 전까지 박 대통령의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두고 입에 담기 힘든 험담을 이어갔다. 하루 사이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만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측이 실세들인 대표단을 남측에 파견한 입장은 명확하다. ‘북측은 남북관계 개선을 원하지만 박 대통령은 어떤가’ 하고 공을 넘긴 것이다. 북측 실세 세 사람의 방남이 ‘초가을 하루의 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세 사람 중 단장인 황병서 총정치국장은 군복을 입고 왔다. 북측 실세 세 사람의 전격 방문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황병서 군복의 방문으로 볼 것인가는 향후 남측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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