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섭합니다”

▲ 보통강호텔 은하수카페의 봉사원 김정화. [자료사진 - 민족21]

2008년 6월 24일일 방북해 3일간의 취재를 마치고 평양을 떠나기 전날인 6월 27일 저녁 환송만찬을 끝내고 보통강호텔 1층의 은하수카페에서 맥주를 한 잔 하고 나오는데, 가라오케(노래방) 문이 열리면서 낯익은 여성봉사원이 나왔다.

“아니 선생님, 마지막 날인데 우리 가라오케에는 안 들리십니까? 섭섭합니다.”

딱 걸렸다. 김정화(19) 봉사원의 손에 이끌려 노래방에 들어가 맥주 한 잔을 더 해야 되는 상황이 됐다.

- 지난번에 보니 목소리가 좀 안 좋던데 괜찮아졌나?
“일 없습니다(괜찮습니다). 그런데 한 달만에 또 오셨습니다. 이번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 ‘정화 동무’ 노래 들으러 왔지.
“아이, 농하지 마십시오. ‘조장 동지’ 만나러 왔겠지요. 그런데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 사업이 잘 안 돼서 그런가 보지.
“‘첫 술에 배부르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자꾸 오시다보면 꼬인 실타래가 술술 풀리는 듯이 잘 될 겁니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을 줄 아는 신세대 봉사원답게 대답이 청산유수다.

신출내기 봉사원

▲ 첫 직장으로 은하수카페에 배치된 신세대 봉사원 김정화. [자료사진 - 민족21]

‘김정화 동무’가 이곳에 온 것은 2008년 5월 중순이었다. 원래 이곳 노래방은 다른 호텔 노래방과 달리 입장료(8유로)가 별도로 있었고, 전에 있던 봉사원은 ‘무뚝뚝한 스타일’이라 별로 이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 봉사원은 이곳에 배치되자마자 노래방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빼어난 노래솜씨, 손님의 요청을 마다하지 않고 노래를 불러주는 친절함으로 남쪽 손님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술 취한 손님들의 일부 ‘무례함’에도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김 봉사원을 처음 만난 것은 <중앙일보> 방북취재진과 동행해 평양에 갔던 2008년 5월 19일 밤이었다.
자리에 앉아 대동강맥주를 시키고 곧바로 ‘신상조사’에 들어갔다.

- 못 보던 얼굴인데, 언제 여기에 왔어요?
여기 온지 며칠 되지 않았습니다.󰡓
- 어려 보이는데 여기가 첫 직장인가?
“예, 그렇습니다.”
- 그럼 중학교는 어디를 나왔어요?
“금성제1중학교를 나왔습니다.”
- 중국 베이징에 나와 있는 북쪽 식당에도 금성제1중학교 나온 동무가 있던데 알아요?
“아, 은심 동무요. 저하고 중학교를 함께 다녔어요.”

만수대 근처에 있는 금성제1중학교는 평양학생소년궁전의 부속학교로 예능과 컴퓨터 분야의 수재를 키워내는 학교로 유명하다.

- 아니, 수재학교를 나왔으면 대학에 진학해서 예술가가 되어야지 왜 이곳으로 왔어요?
“그 정도 실력은 안 됩니다. 원래 노래를 좋아해서요. 중학교를 나온 후 봉사분야의 전문학교를 나온 후 여기가 첫 직장입니다.”
- 매일 노래를 부르려면 힘들지 않나요?
“일 없습니다. 손님들께서 즐거워하시면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망향(望鄕)’의 노래 <임진강>
 

▲ 김정화 봉사원은 기타 솜씨도 수준급이다. [자료사진 - 민족21]

동행한 이화여대 조동호 교수님이 “정화 동무, 노래 솜씨를 보여줘야지”하자, 잠시 망설이다 무대에 나가 북측 가요를 한 곡 불렀다. 분단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담은 <임진강>이란 노래였다.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 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녘 땅 가고파도 못 가니 /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강 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 울고 / 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
협동벌 이삭마다 물결우에 춤추니 /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노래는 ‘망향(望鄕)’의 노래다. 월북 시인 박세영의 글에 고종환이 곡을 붙였다. 1957년경에 만들어진 이 노래는 1960년대 말 일본으로 건너가 널리 불려지면서 재일 조선인들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노래가 됐다. 2004년 어느 재일 조선인 감독이 만든 영화 <박치기>의 엔딩곡으로 삽입되면서 더 유명해졌다. <임진강> 노래에는 분단으로 자기 땅을 찾지 못하는 ‘조선인’의 응어리가 맺혀 있다.

‘정화 동무’는 구슬프게 간절하게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와 함께 노래방에 있는 모든 남쪽 사람들이 ‘앵콜’을 연호했다. 옆에 있던 노래방의 봉사조장 ‘경애 동무’가 “정화 동무는 기타도 잘 친다”며 거들었다.

어쩔 수 없이 수줍은 표정으로 기타를 들고 나온 ‘정화 동무’가 이번에는 기타를 연주하며 <심장에 남는 사람>을 불렀다.

“인생의 길에 상봉과 이별 그 얼마나 많으랴 / 헤어진대도 헤어진대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 아~ 그런 사람 나는 못잊어”

1980년대 후반 북한에서 제작된 영화 <심장에 남는 사람>에 나오는 주제곡이다. 자신이 맡은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며 집단을 위해 헌신하는 주인공에게 바치는 노래다. 북측 식당의 봉사원들이 남측 사람들을 위해 기타 반주를 곁들여 자주 불러주는 곡이기도 하다.

남측 손님들은 남쪽 노래인 <아침이슬>과 북쪽 노래인 <준마처녀>로 화답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경애 동무’가 나와 바이올린으로 서양곡을 연주했다.

- 남측이 아닌 해외 방문객들도 많이 옵니까?
“저희 노래방에서는 영어, 중국어, 일어 등 해외 여러 나라의 노래도 부를 수 있어 해외 손님들도 많이 찾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채 끝나기 전 독일 NGO 관계자가 들어왔다. 그러자 ‘정화 동무’는 레퍼토리를 바꿔 중국어와 서양의 명곡들을 불렀다. 중국어 노래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 외국 노래도 잘 부르네…
“전문학교에서 외국의 명곡들도 배워줍니다.”

외국어를 학습을 하면서 외국 노래도 함께 배운 모양이다. 최근 북한은 관광산업 육성에 적극 나서면서 전문인력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이를 위해 2014년 4월에는 장철구평양상업대학에 봉사학교를 신설했다. 이 학교에는 호텔경영학과, 호텔봉사학과, 요리학과 등이 설치됐다. 특히 이 학교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 손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호텔 봉사업의 특성에 맞게 2개 이상의 외국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이론 강의보다 실천실기 강의 비중을 늘리는 원칙에서 교육하고 있다”고 한다.

1990년대 초반 평양에도 노래방문화 상륙

▲ 외국인들도 자주 이용하는 은하수카페. 김정화 봉사원은 외국노래들도 잘 소화했다. [자료사진 - 민족21]

평양에서 처음 노래방에 간 것은 2002년 8월이었다. 숙소인 고려호텔 지하에 있는 노래방이었다. 그런데 당시 동행한 남쪽 손님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굳이 호텔 밖에 있는 노래방에 가야 한다고 우겼다. 결국 체류 마지막 날 저녁 고려호텔을 나와 걸어서 인근에 있는 ‘창광가라오케’에 갈 수 있었다.

북한에는 평양 뿐 아니라 향산호텔 등 지방의 호텔에도 노래방이 있다. 이러한 전문 노래방 외에 평양의 주요 식당들도 손님들을 위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언제부터 평양에 노래방 문화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1992년 12월에 문을 연 청년중앙회관에 ‘화면반주음악장’이 생긴 점을 고려할 때 그 즈음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남쪽에 노래방문화가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 1990년대 초반이므로 거의 비슷한 시점에 평양에도 일본을 통해 노래방문화가 상륙한 셈이다.

북쪽을 방문하는 남쪽 사람들이 흔히 “북한에도 노래방이 있냐”고 묻는다. 노래방문화가 통상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문화의 한 형식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한 북측 사람들의 대답은 “문제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높은 문화적 소양을 가지고 고상하고 문명하게 살 것을 바랍니다. 사회발전과 더불어 나날이 높아지는 청소년들의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려면 문화정서생활의 종류와 형식도 새롭고 다양하게 개선해야 합니다. 오늘날 전자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새로운 전자악기가 나오고 그에 의한 현대음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습니다. 현대과학의 성과가 도입되어 음악형상의 입체화 수준도 비할 바 없이 높아졌고요. 화면반주음악도 이러한 발전과정에 생겨났습니다.”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21세기 ‘3대 바보’의 하나

‘화면반주음악’ 자체를 배척할 이유는 없고, ‘화면반주음악’을 통해 어떤 노래를 어떻게 부르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는 게 북한의 입장인 셈이다. 이에 대해 북측 관계자는 “리듬을 위주로 하는 거칠고 이지러지고 소란스런 음악에 맞추어 퇴폐적인 노래를 부를 것이 아니라 유순하고 고상한 우리 민족의 선율을 위주로 하고 흥취 나는 고유한 조선장단을 타면서 우리 민족의 취미와 정서에 맞는 노래를 부르면 좋은 것이지요”라고 설명했다.

북한에서는 ‘담배 피우는 사람, 컴맹, 음악을 모르는 사람’을 21세기 ‘3대 바보’라고 부른다. 그래서일까? 북한은 “노래가 없는 세상은 화단에 꽃이 없는 것과 같다”며 주민들에게 음악생활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고, 어려서부터 소조(동아리)활동을 통해 노래와 악기를 가르친다.

‘정화 동무’도 어려서부터 평양학생소년궁전에서 과외활동을 통해 노래와 기타를 배웠을 것이다.

“다음에 오실 때도 꼭 우리 호텔에 오셔야 합니다.”
노래방을 나올 때 ‘정화 동무’는 다음의 만남을 기약했다. 2008년 말까지는 ‘정화 동무’가 노래방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로부터 6년이 흘렀다. 이제는 시집을 갔거나 다른 직장으로 옮겼을 것 같다.

‘정화 동무’가 부른 <심장에 남는 사람> 노랫말처럼 곡절이 많아도 남과 북 서로에게 심장에 남는 사람이 많이 생길수록 더욱 가까워질 텐데, 지금의 남북관계가 처한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게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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