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초기 피난 가던 민간인들이 미군의 무차별한 공습과 사격으로 수 백 여명이 희생되었던 비극의 장소, 충북 영동 노근리에는 2011년 사건 발생지 일대에 평화공원이 세워져 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딛고 ‘평화’와 ‘인권’의 메카로 거듭나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을 추모하는 시설 중 제주의 4.3 평화공원과 함께 국내 유일한 평화공원인 이 곳 노근리평화공원에 지구촌 곳곳의 평화 활동가들이 모여 들었다. 노근리국제평화재단이 평화 박물관 국제네트워크(INMP)의 8차 세계대회를 성공적으로 유치해 3년 간의 준비 끝에 9월 19부터 22일까지 35개국에서 200여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행사 웹사이트 www.nogunri.org)
4박 5일간 지구촌 곳곳에서 참석한 평화 운동 관계자들은 “전쟁방지와 역사적 진실, 화해를 증진하기 위한 박물관의 역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각지의 활동을 공유하고 평화를 증진하기 위한 미래 비전을 모색하면서 다양하고도 깊이 있는 논의를 벌였다.
노근리국제평화재단이 이러한 세계대회를 유치하기까지, 지난 8월 1일 타계한 부친 정은용 옹과 정구도 현 재단 이사장의 대를 이은 노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민간인 학살 문제, 더군다나 미군에 의한 학살을 감히 누구도 이야기 할 수 없었던 서슬퍼런 군사정권하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20여 년간 용기 있고 끈기 있게 실화소설과 논문으로 또 줄기찬 진상규명 노력을 기울여, 1999년 마침내 AP와 세계 주요 언론이 노근리 문제에 주목하는 계기를 만들어 냈고, 한.미 합동조사에 이어 2001년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유감을 표명하기에 이른다.
노근리 민간인 학살의 문제에 세계가 주목하는 계기를 만들어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갔듯이, 이번 대회를 통해 분단 문제에도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계기를 만들어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의를 새롭게 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이 행사를 통해 풀뿌리 시민의 열망을 결집해 ‘한반도에서 전쟁을 끝내고 하나의 코리아를 실현하자’는 AOK(Action for One Korea)의 취지에 세계 각국의 참여자들과 교감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도 값진 경험이 되었다.
적극적인 ‘평화’를 만들어가는 평화박물관
세계 각지에서 어느덧 박물관은 과거를 전시하는 정적인 공간이 아니라 시민들이 찾아와 배우고 익히는 시민교육의 장소, 또한 공동체의 가치를 키우고 살찌우는 미래지향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특히 국내에는 약간 생소한 개념일 듯한 ‘평화박물관’은 ‘평화’에 관한 다양한 차원의 시민교육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음을 이번 행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특히 이들 평화박물관은 ‘어릴 때부터’ 평화 교육을 강조한다. 아이들은 차별과 증오, 폭력의 부당성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지 않는 법에 대해 배운다. 다 함께 나누어야 할 자유로운, 행복한 세상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도 배운다. 차별과 편견이 어느 한 민족 또는 특정 그룹 대상으로 강화되었을 때 인류 역사에 무자비한 폭력과 끔찍한 만행으로 나타났다는 것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을 하지 않는, 또는 전쟁을 반대하는 소극적인 의미는 아니다. 평화는 전쟁 반대를 넘어선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행동. 이번 행사를 참관하면서 평화의 정의에 새롭게 눈뜨게 된다.
간디와 마틴 루터 킹이 한 말과 같이 ‘진정한 평화는 단지 긴장이 없는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실현되는 상태’라는 말이 다시금 떠오른다. 분단 극복을 위한 평화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편견을 타파하고, 억압을 물리치고, 자기자신과 공동체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면서 긍정적인 조화와 창조의 에너지가 발현되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이 바로 평화가 아닐까. 평화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긍정의 에너지이고 창조의 원동력이다.
분단 극복을 위해 다시금 평화를 생각한다. 평화는 통일로 가는 과정이고 결과이어야 한다. 평화의 정의를 새롭게 내리고, 세상을 바꾸는 긍정 에너지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통일운동이 지구촌의 공감과 지지를 확보해 평화 세력을 우리들의 우군으로 만드는 확실한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의 길에 세계인의 동참을 위한 연결고리, 그 이름은 평화
한반도가 왜 분단이 되었는지, 지구촌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하나의 겨레로 5천년 이상을 운명공동체로 살아온 지난 역사에 대해서도 물론 알지 못한다. 세계 지도에 북한, 남한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원래부터 그렇게 다른 나라로 생긴 줄 아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러나 지구상에 전쟁이 없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전쟁이 나면 군인들보다 여성과 아이들과 같은 무고한 민간인 대거 희생된다는 것을 가슴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전쟁이라는 메커니즘으로 지구상의 많은 불의와 불평등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에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는 너무나도 절실한 시대적 과제이자 힘을 결집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이들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면서, 분단과 끊임없는 전쟁 위협에 의해 고통 받아온 코리아에 진정한 평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70년이 다되도록 가족과 생이별을 강요당하고도 그대로 세상을 하직해야만 하는 아픔, 이제 분단을 대물림해야 한다는 절망이 얼마나 가슴이 저리도록 비극적인 것인가를...
“이념과 편견을 뛰어넘어 우리들의 마음을 모두 하얗게 비운 한반도에 세계 국어로 평화를 채워 넣은 뜻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여러분들의 관심과 열정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의 지지와 참여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번 행사에서 만난 많은 지구촌 활동가들에게 나는 호소했다. “코리아는 원래 하나였고,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전쟁 없는 평화 한반도를 원합니다.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지구촌 시민들이 한반도 ‘평화만들기’에 동참해 준다면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코리아는 한국인들의 염원이자 세계인들의 드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손을 잡아주세요!”
코리아가 분단된 채 남아있는 한 전쟁과 폭력의 극단의 세기였던 20세기는 한반도에서, 아니 세계사에서 영영 끝나지 않은 셈이다. 생명, 상생, 화해와 치유, 조화와 융합. 21세기 인류를 위한 미래 가치를 내걸고 이에 공감하는 세계인들이 한반도 통일의 절박성을 이해하고 통일의 길에 함께하는 협력자, 동참자가 되게 만들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쉽게 지치지 않고, 단념하지 않고 우리가 지속적으로 세계인들을 향해 마음과 마음을, 지성과 지성을, 열정과 열정을 ‘연결’해 나간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