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준(동북아평화협력연구원 원장)


동북아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중국이 있다. 중국은 경제적 급성장을 통해 국가적 위상이 높아졌다. 중국은 인정하지 않지만 사실상 G2 국가가 되었다. 중국은 경제적 위상에 맞는 역할을 최소한 동북아에서만이라도 하겠다는 입장이다. 대륙국가인 중국의 부상에 대해 해양국가인 미국과 일본이 견제하면서 동북아 정세가 불안정해 지고 있다. 특히 역사문제와 영토문제를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이 벌이는 힘겨루기는 가히 공포스러울 정도이다.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역사적으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에 의해 많은 침략을 받아 왔다. 그 회수는 대략 1,000여 회에 이른다. 대부분 중국과 일본에 의한 것이다.

고대 한국은 고대 중국과 영토문제를 둘러싸고 수많은 쟁투를 벌였다. 한민족은 용감히 저항하여 중국의 침략을 물리쳤다. 고대 중국은 한민족을 “큰 활을 사용하여 용감히 싸운다”는 의미로 ‘동이족(東夷族)’이라 부르면서 두려워했다. 한민족에 대한 완전 정벌을 포기한 고대 중국은 조공을 받는 대신 안전을 보장해주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것이 한.중간에 맺어진 ‘조공.책봉관계’이다. 고대 중국은 고대 한국이 이것을 잘 지키지 않을 경우 어김없이 군사적 침략을 감행하였다. 수나라, 당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중국 등이 모두 똑같은 행동을 보였다. 1270년 원나라의 직접지배, 청나라에 의한 1627년 정묘호란 및 1636년 병자호란, 중국의 6.25전쟁 참전 등이 대표적 사례들이다.

해양세력인 일본 또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한반도를 침략하였다. 옛 일본인 왜구(倭寇)는 A.D 3-400년경부터 신라, 백제, 고구려 등을 침략하였고,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하여 한반도를 침략하였다. 고려의 몰락은 잦은 왜구의 침략 때문이라는 주장까지 있다. 고립된 섬나라인 일본은 광활한 대륙을 차지하기 위한 교두보 확보를 위해 한반도를 침략한 것이다. 500여 차례의 소소한 왜구 침략을 제외하고 큰 침략의 사례만 보더라도 1592년 임진왜란, 1598년 정유재란, 1910년 한반도 식민지배 등 3차례나 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강대국들이 한반도에 대한 독점 지배가 불가능할 경우 한반도 분할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강대국에 의한 한반도 분할 시도는 모두 5차례 있었다. ① 7세기 중.후반 당태종에 의한 한반도 분할 제의, ② 1593년 4월 일본의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에 의한 한강 중심 분할 제의, ③ 청일전쟁 직전인 1894년 7월 영국외상 킴벌리(Kimberley)의 청과 일본에 의한 조선 분할 제의, ④ 러일전쟁 8년전인 1896년 6월 러시아와 일본에 의한 북위 38도선 중심 한반도 분할 제의, ⑤ 일본 항복 직전인 1945년 8월 미국에 의한 북위 38도선 한반도 분할 제의 등이다. 한반도지배를 위한 패권전쟁도 근대에 들어서만 186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50년 미중전쟁 등 3차례나 있었다.

위와 같은 예에서 보듯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및 전략적 가치는 매우 크다. 그러나 어떤 강대국도 한반도를 영원히 지배하지는 못하였다. 그 이유는 한반도를 어떤 특정국가가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강대국들의 세력균형 정책이 주효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민족국가가 효율적인 외교를 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강력한 대륙국가인 중국의 힘에 눌려 한국의 역대 국가들은 대부분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활용하지 못하고 강대국에 의존하여 안보를 유지하는 편승(bandwagoning)외교를 주로 채택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에 대한 편승외교는 ‘사대외교’라는 혹평까지 받고 있다. 자신의 안보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강대국에 의존하여 해결하려는 전통은 최소한 A.D 10세기인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한반도 주변 강대국의 세력전이를 잘 알지 못한 결과로 많은 수난을 당하였다. 특정한 강대국에 안보를 맡긴 채 강대국간 세력전이를 알아채지 못한 한국은 강대국의 ‘동네북’이었다. 강대국 의존적 안보논리는 결국 1910년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를 가져왔고, 해방과 분단 또한 강대국들의 힘의 역학관계에 의해 주어졌다. 강대국에 의한 분단은 1,000년 이상 통일국가를 이루고 살았던 한민족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한민족은 강대국에게 매번 당하는 이유는 힘이 없기 때문이라는 자성하에 힘을 키우기 위한 노력을 하지만 강대국들은 이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 힘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한반도 통일밖에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통일은 요원한 상태이다. 강대국에 의해 분할된 한반도는 강대국의 동의 없이는 통일이 될 수 없는 구조로 고착되었다. 여기에다 남북한은 자기중심의 통일국가를 달성하기 위해 처절한 경쟁을 하고 있다. 남북한은 자기 체제가 더 우월하기 때문에 자기중심 체제로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북한은 심지어 자기중심의 통일을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이다. 1945년 8월 3.8선을 중심으로 남쪽을 점령한 미국은 정치, 경제, 군사, 외교, 교육 등 모든 시스템을 미국식으로 만들었고, 북쪽을 점령한 구소련은 모든 것을 구소련식으로 구조화시켰다. 이후 남북한은 치열한 체제경쟁을 벌였다. 남북한은 자신의 체제만이 한반도를 다스릴 정당성을 갖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분단 69년이 지난 현 상태에서 체제 경쟁은 남한의 승리로 끝났다. 경제적 측면만 보면 남한은 북한의 40배에 가까운 우위를 보이고 있다.

북한이 개혁.개방을 싫어하는 이유는 ‘혁명전통’ 때문이다. 생존시 김일성 주석은 경제적 지원을 미끼로 강대국은 정치적 개입을 시도하고 결국은 속국으로 만들려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이것은 신적 존재였던 김일성이 주장한 ‘4자로선(四自路線)’에서 유래한다.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외교)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 등이 그것이다. 이것이 곧 주체사상이다. 주체사상은 사람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강조한다. 북한의 어떤 누구도 수령절대주의에 도전할 수 없고 도전한다면 ‘반혁명종파분자’로 낙인찍혀 처형된다. 따라서 김일성 주석의 교시를 절대명령으로 신봉하는 북한 지도부가 수령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김일성 주석의 아들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주체노선을 충실히 따랐고, 손자인 김정은 제1위원장도 이를 따르고 있다. 신제도주의에서 주장하는 ‘경로의존(path dependency)적’ 정책선택인 것이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은 일본, 미국은 물론, 중국까지도 싫어했다. 강대국에 대한 불신이 강했기 때문이다. 강대국은 영토적 야심이 있어서 반드시 약소국을 무력으로 침략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한민족은 강대국에 굴종할 것이 아니라 강대국을 극복하고 강력한 한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한말 한국에서 일어난 동학사상과 비슷하다. 한민족은 위대하고 언젠가 강대국을 물리치고 한반도를 세계의 중심국가로 만들 것이라는 사상이다. 북한도 한민족 독립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고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족주의에 입각한 ‘반제민족해방’이 북한의 중심가치가 되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부터 공고화되기 시작하였다. 구소련에서 스탈린 사후 시작된 개인숭배 반대 운동이 북한까지 영향을 미쳤고, 1956년 8월에 김일성은 권력을 상실할 위기에 까지 몰렸었다. 그 주동세력들은 구소련 및 중국과 연계되었었다. 김일성은 이념적 종주국인 구소련과 중국을 불신하고 ‘주체’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자주’의 다른 표현이다. 북한은 구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적당한 간격을 두고 실리를 챙기는 정책을 구사하였다. 그는 소위 ‘시계추 외교’를 구사하였다. 김일성은 스탈린 사후 구소련이나 중국이 이념논쟁을 거치면서 보다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을 확보하기 위한 패권경쟁을 추구했기 때문에 양국 모두 북한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계산을 하였다.

북한은 중.소 등거리 외교를 통해 ‘실리’를 추구하면서 독자적인 방식의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였으나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중국의 원조도 감소되면서 큰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1994년에는 신적 존재인 김일성이 사망하고, 1995년부터 3년간 자연재해가 엄습하면서 북한 경제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다. 북한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고난의 행군(the Arduous March)’을 실시하였다. 이 기간동안 최대 약 400만명이 굶어 죽었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북한은 붕괴되지 않았다. 외부의 강력한 적인 남한과 미국의 존재, 비자본주의적 경제체제, 강력한 정치사회적 통제 등 3가지 때문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겪고도 살아남은 북한은 주체사회주의에 대한 강한 자기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사회주의 경제블록(COMECON)이나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가입하지 않은 자신의 선택이 정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1990년대 초부터 내부적 문제뿐만 아니라 외부적 문제로 큰 고통을 당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대북 압박이 그것이다. 1993년부터 북핵문제를 이유로 미국은 본격적으로 대북 압박을 가하였다. 미국의 대북 압박은 핵무기 개발포기였다. 북한은 미국이 핵무기 개발을 핑계로 북한을 죽이려 한다고 판단하였다. 북한은 미국의 압박을 역으로 미국을 공격하는 무기로 활용하였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여 큰 거래를 할 수 있는 카드라고 생각했다. 북한은 상대방이 관심을 갖는 사안을 협상의제로 선택하여 큰 이익을 보는 협상전술을 구사한다. 북한은 풍산개처럼 일단 먹잇감을 물면 거의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북한은 미국이 싫어하는 핵개발 문제를 의제로 미국을 끝까지 괴롭히고 있다. 북한은 핵문제만이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북한은 북핵문제라는 전략적 의제가 있는 한 이의 해결을 위해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남한 등이 북한에게 일정한 양보를 할 것으로 믿는 것 같다.

첫째, 미국은 핵확산방지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북한핵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미국은 군사력 사용이 아닌 북한과의 대화에 나설 것이라고 북한은 판단하는 것 같다. 북한은 미국의 대북 무력 사용은 ‘제2의 6.25전쟁’으로 비화할 것이고, 중국과 일본의 참전을 불러일으켜 ‘제3차 세계대전’을 야기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미국은 이러한 사태를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북미간 관계 개선은 필연이라고 계산하는 것 같다.

둘째, 중국은 미국과의 패권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중국의 전통적 우방인 몽골 및 동남아 국가들이 ‘친미화’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까지 버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북한은 판단하고 있다. 중국이 북한을 ‘전략적 자산’이라고 판단하는 한 중국의 대북 지원은 지속될 것이라고 계산하는 것이다.

셋째, 일본은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독자적 방어력 향상과 함께 한반도 국가들(남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할 것이라고 북한은 판단하고 있다. 특히 역사적으로 해양세력인 일본은 대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한반도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앞으로도 일본은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더구나 현재는 한.일 관계가 최악의 상황이다.

넷째, 러시아 또한 동북아에서의 역할 증대, 부동항 확보, 시베리아 가스 판매 등 다양한 이익을 위해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할 것이라고 북한은 판단하고 있다.

다섯째, 남한 역시 남한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북한의 노동력 및 자원을 활용해야 하고 북한을 통해 시베리아로 진출해야 하기 때문에 북한과 대화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북한은 판단하고 있다.

위와 같은 이유에서 김정은은 ‘북한식 전략적 인내’를 지속할 경우 국제사회로부터 핵보유국가 인정과 체제인정을 동시에 받아낼 수 있고 경제문제까지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계산하는 것 같다. 김정은은 2013년 3월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 병진정책’을 채택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북한은 자신의 전략적 가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핵무기 개발을 지속할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다만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통해 안보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재래식무기 개발 비용을 인민경제발전에 투입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정은은 인민경제발전을 위해 2013년 11월 압록강경제개발구 등 경제개발구 13개를 발표한 데 이어 2014년 7월 6곳의 경제개발구를 추가 지정하였다. 경제개발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남한, 미국, 일본 등 자본주의국가들의 경제지원이 필수이고, 이를 위해서는 북한의 핵포기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기대하기 힘든 시나리오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떻게 생존해 갈 것인가? 북한은 자신의 전략적 계산이 맞아떨어지기를 기다리면서(북한식 기다리기 전략) 가능한 범위내에서 최대한의 지대(rent)를 확보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미국의 ‘압살’ 정책이 변하지 않는 한 ‘개혁.개방’을 선택하는 대신, 자원과 노동력을 판매하고 외부의 지원을 통해 생존해가는 ‘지대추구국가(rentier state)’로 살아가려는 것 같다. 지대는 “모든 자연 자원의 소유로부터 얻어지는 보상”, “비생산적 경제행위를 통해 재부를 획득할 수 있도록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기회”를 의미한다. 북한의 지대는 원료판매를 통해 얻어지는 지대, 주요 교통로로부터 발생하는 지대, 지정학적(전략적) 위치를 통한 지대, 개발원조 또는 인도적 지원을 통해 얻어지는 지대, 노동력 수출을 통한 지대, 관광을 통한 지대 등이다.

북한의 지정학적 위치는 북한이 갖고 있는 큰 자산임에 틀림없다. 나진항의 물류 및 관광기능, 가스파이프 라인 연결, 한반도 철도와 시베리아 철도 연결 등 북한은 해양국가와 대륙국가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자신의 지정학적 지위를 전략적 자산으로 삼아 지대추구 전략을 추구할 것이다.

 

 
1953년생으로서 전남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북한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통일연구원에서 22년간 재직한 북한전문가이다.
2006년 북한연구학회장 재직 시 북한연구의 총결산서인 ‘북한학총서’ 10권을 발간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 동안 통일부 자문위원, NSC자문위원, 민주평통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고려대학교, 동국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으며 민화협, 경실련 등 시민단체에서도 활동하였다.
현재는 동북아평화협력연구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는 「김정일 리더쉽 연구」, 「김정일 정권의 통치엘리트」, 「북한 체제의 내구력 평가」, 『북한이해의 길잡이』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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