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경제학자 고 박현채 선생의 19주기 참배식이 하루 앞선 지난 16일 천안공원묘지에서 진행됐다. 이 자리에는 박중기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추모연대) 명예의장과 노중선 사월혁명회 전 상임의장, 김영옥 범민련 중앙위원, 김경희 지식산업사 대표, 그리고 문국주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와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이 함께 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지난 16일 오전 11시, 민족경제학자 고 박현채 선생의 19주기를 맞아 천안공원묘지에서 조촐한 묘소참배식이 열렸다.

이날 자리에는 선생의 평생 지우인 박중기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추모연대) 명예의장과 노중선 사월혁명회 고문, 김영옥 범민련 중앙위원, 김경희 지식산업사 대표, 그리고 문국주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와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이 함께 했다.

참배식 참가자들은 준비한 술을 올리며, 고인이 남긴 유지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참배객을 대표해 추모사를 한 이창훈 실장은 "이번 세월호 참사는 자본의 논리가 일으킨 비극"이라고 지적하면서, "만약 박선생의 민족경제구조가 이 땅에 정착되었더라면 참사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고인의 부재를 안타까워했다.

1934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박현채 선생은 1995년 8월 17일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온 몸으로 시대를 살고 치열하게 역사를 만든' '인간적인 냄새가 듬뿍 풍기는 휴머니스트'였다.

박 선생은 17세의 나이로 입산해 '소년 빨치산'의 원형체험을 했으며, 이는 이후 조정래의 장편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조원제'의 활동으로 묘사된 바 있다.

박 선생은 1964년 제1차 인혁당 사건과 1979년 '임동규 간첩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당하면서도 ""젊었을 때 자기가 가진 역사관 세계관을 버리지 않고 행동하며 많은 고생을 하며 견딘 사람"(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회고)이었으며, "민중이 독재억압에 짓눌릴 때 그들의 눈을 깨게 한 이"(김정남 전 청와대 교문수석 회고)였다.

이후 경제학자로써 수많은 논문과 기고문을 발표해 하였으며, 특히 1978년 출간된 『민족경제론』을 통해 은 진보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박 선생은 대표적 저서인 『민족경제론』을 통해 "한국사회의 민주변혁은 민족문제와의 결합 속에서 자주, 민주, 민중적인 것으로 되면서 민족통일을 이룩하는 것으로 되어야 한다"며,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착종돼 있는 것을 동시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 2006년 해설)고 주창하는 등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강만길 교수는 지난 2006년 고인의 10주기 추모집 『아! 박현채』에서 "그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한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분야를 개척했으며 우리 사회과학이 뿌리를 내리는데 공로가 크다"고 평가한 바 있다.

박현채 선생 19주기 추모사

이창훈(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4.16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오늘로 꼭 넉 달째입니다. 만약 박현채 선생이 살아 계셨더라면 이런 참사가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선생이 말씀하신 민족경제 구조가 이 땅에 정착되어 있었다면 더라면, 세상은 크게 달라져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선생의 19주기 추모일입니다. 선생은 생전에 “자본의 논리가 민족을 굴복시켜서도 안 되고, 민족이 그에 굴복해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족은 조선반도에서 오천 년간을 살아온 백성을 말합니다. 이번 4.16 참사는 자본의 논리가 백성을 죽인 처참한 비극이었습니다. 한숨만 나옵니다.

선생이시여! 광화문 앞 광장 정중앙 통로에는 딸을 잃은 한 아비가 그 슬픔에 오늘로 34일째 곡기를 끊고 있는가 하면, 그 앞에는 참사 직전 한 학생이 촬영한 동영상이 계속 틀어져 있고, 그 학생은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 나는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다.”며 절규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아비로서 그 슬픔을 감당하기도 어려울 텐데 다시 목숨을 건 단식이라뇨. 그리고 비겁한 어른들로 인해 목숨을 잃은 젊은 학생은 또 무엇이랍니까? 세상이 바로 된 것이 아닙니다. 탐욕과 비겁만 남아 있는 세상이 된 것이죠.

세상이 바로 서려면, 조선 민중이 바로 서려면, 민중이 주인이 되려면, 잘못된 위정자들과 썩은 관료들을 몰아내려면, 자본의 논리에 굴복당하지 않는 민족이 되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선생님! 조선 민중이 살 길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주체로 무장한 자립경제를 60년간이나 지속시켜 온, 그래서 선생의 말씀처럼 나라의 공업을 경제의 기초로 삼아 고도의 기술력을 갖춘 나라가 바로 우리 형제의 나라입니다. 즉 남의 자본과 북의 공업기술력이 합쳐진다면, 그리하여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 민족경제를 이뤄내는 것이죠.

일찍이 선생은 조국의 해방군으로서 춥고 배고픈 산 생활을 하시고, 6,70년대에는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는 등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애쓰셨습니다. 사선을 넘나드는 투쟁의 현장이었던 셈입니다.

선생이시여! 오늘 이 자리 선생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는 먼저 가신 선생을 그리워하며, 선생이 남기신 유지를 이어가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한 사람이 결심하고 열 사람을 움직이고, 그들이 다시 백 명을 움직이고, 그들이 다시 천명을 움직인다면. 선생의 뜻이 이뤄지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다시는 4.16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이 없고, 분단 조국이 다시 하나 되는 그 날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방된 조선 반도에 민중의 민족의 깃발을 우뚝 세우는 날! 그날이 바로 선생이 부활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선생이시여! 영면하소서.

- 선생의 가르침을 서적과 어른들의 말씀을 통해 받은 후학 이창훈,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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