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에 거주 중인 고려인 동포들이 자동차를 타고 지난 7일 러시아 모스크바를 출발, 16일 MDL을 통과해 남측으로 들어왔다. [사진제공-고려인 이주 15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러시아 등지에 거주 중인 고려인 동포들이 자동차를 타고 16일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서울로 들어왔다. 지난 달 러시아에서 출발, 중앙아시아 지역을 거친 이들은 북한 지역을 거쳤으며, 부산까지 이동해 다양한 행사를 갖고 오는 24일 러시아로 돌아간다.

고려인 이주 150주년을 기념해 자동차 랠리를 하고 있는 고려인들. 우리는 일제 강점기와 분단의 아픔을 지닌 재외동포하면 재일 동포들만 떠오르기 마련이지만, 고려인들의 삶도 그에 못지 않다.

러시아 등지 이주 역사 150년을 간직한 고려인들의 역사와 현재 삶을 들여다보자. 여기서 1937년을 기점으로 이전은 조선인, 이후는 고려인으로 표기한다.

고려인의 이주 역사를 살펴보기에 앞서, 16세기 러시아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579년 러시아 동진정책으로 스트로가노프 일가가 우랄산맥 동쪽 지역 개발을 위해 동쪽으로 이동해 왔다.

그리고 1581년 예르마크가 시베리아의 시빌칸국을 공격, 1584년 트볼스크시를 건설했으며, 1653년 흑룡강 연안에서 청나라와 맞닥뜨렸다. 당시 청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요청, 조선인과 러시아인이 처음 마주했다.

청.러 간 네르친스크조약(1689년)으로 국경선이 확정된 이후, 러시아는 1860년 연해주에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했다. 1863년 당시 조선인들이 러시아에 처음 이주, 연해주 포세트지역 조선인 13가구가 최초기록이다. 일각에서는 홍경래 난 당시인 1811년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그러나 1863년 본격적인 이주가 됐다는 점에서 고려인 이주 역사를 150년으로 보고 있다.

가난을 벗고 항일 투쟁을 위한 고려인의 이동

▲ 1860년대에 러시아로 이주한 고려인 가족. 고려인들은 1963년 가난을 탈피해 본격적으로 러시아로 이주했다. [사진출처-동북아평화연대]

1860년 최초로 기록된 고려인 이주 역사의 시작은 1863년 러시아 연해주로의 본격적인 이주로 이어진다. 1867년 당시 기록에 의하면, 러시아 이주 조선인은 185가구, 999명이다.

그러다 1869년 조선 동북지역의 극심한 흉작으로 대기근이 일어나자 러시아로 이주하는 고려인들이 대거 늘어나, 1만여 명으로 기록된다.

여기에 조.러 수교통상조약(1884)은 조선인의 연해주 지역 이주에 영향을 끼쳤다. 또한, 갑신정변,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 등으로 조선을 둘러싼 정세가 급박하던 시기, 아관파천(1896)으로 친러내각이 조직, 조선인들의 러시아 이주가 본격화되는 계기가 됐다. 1902년 당시 러시아 이주 조선인은 3만 2천 380명이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조선인들의 러시아행 '디아스포라'가 이어졌다. 또한, 의병들이 러시아를 근거지로 삼고 이후 독립운동가들의 운동 거점이 되면서 러시아 내 조선인들의 숫자는 꾸준히 늘어갔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 사할린 지역으로 강제 징용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 반일 민족해방운동을 펼친 대표적인 인물은 홍범도, 이동휘 등이다.

기록에 의하면, 1908년 총 1천4백 여건의 의병활동에 6만 9천 8백여 명이 동참했다. 1914년 조선인은 6만 3천여 명으로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연해주와 우랄산맥 근처 오바강 유역까지 퍼져나갔다.

그러나 러시아의 반한인법 선포(1909), 일본군의 연해주 점령(1918), 신한촌사건(1920) 등은 러시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 고통을 줬다.

하지만 1922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등으로 이루어진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소련) 설립으로 일본군이 연해주에서 철수, 1923년 공식적으로 10여 만명이 거주했으며, 실제 25만여 명이 살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제이주정책의 슬픔을 안은 고려인

▲ 1937년 소련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이동한 고려인들이 생활한 집. [사진출처-고려인돕기운동본부]

일본의 침략전쟁이 본격화되던 1930년대. 소련 정부는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들이 일본의 간첩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이에 소련 정부는 1937년 '명령번호 1428-326'를 발표한다. '1428-326'은 '연해주 극동국경지역 거주 모든 한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아랄해, 발하쉬 호수 및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으로 이주시킨다'는 강제이주정책을 골자로 하고 있다.

'1428-326'은 △1938년 1월 1일까지 추방 작업 종결, △국가철도의 기차편 제공, △이주경로, 출발 이주자 수, 도착 이주자 수, 해외 이주자 수 등 10일마다 보고 등 구체적 이주방안을 담았다.

결국, 17만 여 명의 고려인들은 우즈베키스탄(7만6천여 명), 카자흐스탄(9만5천여 명)으로 한 달 여 동안 추운 겨울 124대의 화물철도를 타고 6천km를 이동해야만 했다.

강제이주정책은 수많은 사망자를 낳기도 했다. 고려인 인텔리와 군 장교 등 민족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2천 8백 여명이 강제이주정책을 반대할 수 있다는 우려로 처형됐다.

그리고 이동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홍역이 번져 60% 이상 사망했으며, 이주 이후에는 추위와 배고픔, 풍토병 등으로 수많은 고려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사망자수는 2만 여명으로,1938년 인구표본조사 결과 1천명 당 42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됐다.

▲ 중앙아시아 정착촌 모습. [사진출처-동북아평화연대]

40년 가까이 살던 연해주를 떠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지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의 삶은 궁핍 그 자체로 표현된다. 황무지였던 지역에 버려지다시피한 고려인들은 1953년까지 집단수용소에서 생활해야 했다.

이들에게는 민족교육이 금지됐고, 취학과 국가기관 취업에도 제약이 있었다. 결국, 대다수 고려인들은 황무지를 개간해 농업에 종사했다.

하지만 고려인들의 노력은 가히 놀라웠다. 쌀 생산지역이 아닌 우즈베키스탄이 주요 쌀농사 지역으로 탈바꿈하고, 목화 농장이 늘어나는 등 소련의 대표적 콜호즈(집단농장)로 손꼽혔다. 그리고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 소련에서도 인정받는 땅의 주인으로 자리잡았다.

소련 해체..고려인의 또 다른 시련

▲ 러시아 연해주 한민족문화학교의 고려인 아이들. [사진출처-동북아평화연대]

1991년 소련이 붕괴됐다. 소련 해체로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 독립국가들이 생겨났고 소련 정착에 성공한 고려인들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농업발전과 교육열로 지식인을 대거 배출한 고려인들은 소련 해체 이후 2등 국민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소련 체제 하에서 2등 국민은 고려인과 중앙아시아인들로 동등한 위치였지만, 독립국가 건설 이후 원주민이던 중앙아시아인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특히, 우즈베크, 카자흐, 타지크, 키르기스오, 투르크멘 등 대표적인 민족은 이슬람교도들로 러시아어가 아닌 자국어를 사용하고, 탈러시아 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에 이민족 배척 및 추방운동이 펼쳐져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은 러시아 시베리아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언어와 배타적 민족주의에 밀려난 고려인들은 러시아로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3년 러시아 연방정부가 명예회복법안을 통과시켜 고려인들이 러시아로 재이주했다.

1995년 당시 조사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고려인 중 7천 5백여 명이 돌아왔으며, 이중 대다수는 북한과 국경지대인 연해주로 이주했다.

2013년 현재 러시아에 거주 중인 고려인은 7만 8천여 명으로, 연해주에만 2만 9천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고려인의 현재 그리고 기억해야할 역사

▲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집성촌 '나보이마을'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 [사진출처-고려인돕기운동본부]

러시아에서 중앙아시아로 다시 러시아로 돌아온 고려인들 그리고 현재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의 삶은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중앙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자마자 그들만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공용어이던 러시아어를 자신들의 민족어로 바꿨다. 그리고 러시아 중심의 역사를 자신들만의 역사로 기록했다.

여기에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바뀌면서 물가상승, 실업증가, 부의 분배 등 사회문제가 대두됐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쉽게 중앙아시아인과 동화될 수 없었고,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러시아로 돌아간 고려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러시아의 명예회복법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경제악화로 고려인들의 일자리는 줄어들었고, 극심한 인종차별문화로 고려인들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150년의 이주 역사를 지닌 고려인들, 그리고 2, 3세들에게는 '나는 누구인가', '나의 조국은 어디인가'라는 물음을 안고 살아야 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유대인, 폴란드인 등이 2차 대전 이후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갔던 것처럼 한반도로 돌아올 수 없었다.

이들은 남이냐 북이냐는 이데올로기적 선택을 강요받아야 했고, 또한 이들을 받아줄 곳은 남북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려인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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