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21세기민족주의포럼 대표


“5.16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2기 내각 사회 부총리인 교육부 장관 후보로 내정되었다가 지명 철회된 김명수 후보가 청문회에서 한 말이다.

김명수 후보에 대한 지명 철회의 이유는, 논문 표절과 제자 논문 가로채기 및 신문칼럼 대필 강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비리 그리고 자질 미달의 발언 등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5.16 관련 발언은 잠시 문제로 떠올랐다가 잠복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김명수라는 인물 그리고 그를 교육부총리로 임명하려 했던 박근혜 정부, 그 밖에 그를 두호하려는 많은 이들의 성격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오히려 그의 열거하기조차 힘든 비리들보다도 바로 이 발언일 것이다.

그의 이런 발언에 대해 청문회에서 야당 의원들의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의 발언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의 그를 비난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비난만 할 문제는 아니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 소신을 말한 것이고, 그에게는 진리일 수 있는 말을 한 것이다. 물론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는 관점으로 그의 발언에 대해 접근해야 한다. 그것은 그의 말이 누구에게는 맞을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틀릴 수도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채만식이 쓴 ‘태평천하’의 주인공인 윤직원 영감에게는 남들이 다 지옥 같은 일제 강점기가 태평천하일 수도 있듯이, 김명수 후보에게는 많은 이들에게 군사반란으로 여겨질 수 있는 사건이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5.16쿠데타가 과연 ‘누구에게’ 불가피한 선택이었냐 하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불가피 여부가 누구에게나 동일할 수는 없다. 3.1운동 때 조선 사람이라고 다 만세를 부른 것이 아니고, 한민족이라고 해서 누구나 8.15광복을 기뻐했던 것이 아니듯이, 5.16을 불가피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있어서는 안 되었을 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을 밝히기 위해 우리는 4.19혁명부터 5.16쿠데타에 이르는 기간 동안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당시가 과연 군사력을 동원해서 헌정 질서를 중단할 정도로 ‘불가피한 선택’을 해야 하는 위급한 상황이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물론 위급하다는 것도 누구에게 위급한 것이냐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5.16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근거로 김명수 후보는 그 당시 우리나라는 최빈국이었고, 사회상이 상당히 어지러웠다는 점을 들었다. 이런 그의 생각은 김명수 개인의 독특한 생각이 아니라 5.16쿠데타를 옹호하는 세력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근거이다.

최빈국이었다는 것과 군사쿠데타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 그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개발독재라는 발전 유형을 그가 선호하는 모양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그의 자유이다. 하지만 민주국가에서는 군사력을 동원해서 헌정 질서를 중단한 행위를 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공공연하게 옹호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정부를 전복하는 반민주적인 폭거를 하거나 옹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생각을 가진 이가 민주국가에서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가 말하는, 사회상이 상당히 어지러웠다는 것, 5.16쿠데타 옹호론자들이 즐겨 준거로 삼는 것이다. 그들은 당시에는 초등학생(국민학생)들도 데모했을 정도로 사회의 혼란이 극에 달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시위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사회상이 어지러운 것으로 따지자면 기득권세력에게는 1980년 서울의 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때도 그랬을 것이고, 1987년 6.10민주항쟁 때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므로 5.16쿠데타는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 반민주세력에게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4.19혁명 이후 6.25전쟁 과정에 군과 경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들의 문제가 이슈로 떠오른다. 유가족들이나 생존자들의 진상 규명 요구가 전국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이것을 어지러운 상황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학살을 사주한 자들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는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이나 생존자를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는 등 탄압을 함으로써 그 열기를 잠재웠다. 민간인 학살의 진상이 규명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반인륜적인 자들에게 5.16쿠데타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상식으로 된 이야기이지만 우리 사회는 식민지에서 독립이 되었어도 식민 잔재는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 아니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식민 잔재인 친일 주구들이 오히려 이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행세하는 기이한 사태가 생겨났다. 분단과 전쟁은 이러한 왜곡된 질서를 더욱 고착시켰다. 4.19혁명이 성공한 뒤 꽃 피게 된 민주주의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잘못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운동들을 촉발시켰다. 이제 친일파들의 죄악상은 만천하에 폭로되고 그들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거세질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 민족을 배신한 친일주구들에게 군사쿠데타는 ‘불가피한 선택’이 된 것이다.

5.16쿠데타의 주역들의 대다수가 일제의 괴뢰였던 만주국의 만주군 출신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의 지도자였던 박정희가 철저한 친일사상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은 여기서 굳이 길게 논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는 쿠데타 이후 굴욕적인 한일협정 체결을 국민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였고, 그것이 오늘날 일본의 극우세력에게 강한 힘을 실어주었으며, 과거의 죄행에 대한 배상을 회피하게 만드는 구실로 작용하고 있다.

4.19혁명의 열기는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인 분단을 해결하고자 하는 통일운동으로 진전되어 나갔다. 당시의 혁신세력이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민간통일운동이 급속하게 확산되었던 것이다. 말로는 통일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분단에 빌붙어 사는 분단고착화세력들에게는 위급한 사태가 도래한 것이다. 결국 통일을 원하지 않고 분단만이 자신의 기득권을 보호해줄 수 있다고 믿는 분단고착화세력에게 군사쿠데타는 ‘불가피한 선택’이 되어 버렸다.

4.19혁명은 민주주의를 폭발적으로 발전시키고, 그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가려져 있던 민간인 학살 등 반인권적인 상황들에 대한 진상 규명을 촉발시켰다. 나아가서 분단과 전쟁으로 덮여져 있던 친일 잔재 청산이 본격적으로 요구되게 되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민간통일운동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수구기득권세력에게는 위급한, 매우 어지러운 상황이 된 것이다. 그들은 ‘불가피한 선택’을 했다. 군사쿠데타에 의한 폭력적 진압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5.16쿠데타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김명수 후보의 말은 그에게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이 아니라 이 땅의 많은 수구기득권층에게 그러하였다. 결국 5.16쿠데타는, 독재만이 자신의 이익을 지켜준다고 믿는 반민주적인 세력, 학살의 진상이 밝혀지기를 노심초사하며 두려워하는 반인륜적인 세력, 민족을 배신하고 일신과 자기 가문의 탐욕을 위해 친일 주구가 된 반민족적인 세력, 통일운동을 막아서고 분단에 붙좇아 살려고 하는 반통일적인 세력에게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어지러웠다고 하는 그 당시의 상황을 우리는 1987년 이후 아주 자연스럽게 목도하고 있다. 결국 5.16쿠데타는 우리 사회를 수십 년 동안 후퇴시킨 사태였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들은 각각이 아니라 하나의 세력으로 분단 이후 이 땅에서 온갖 변신과 술수를 다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 왔다. 이제 그들의 정체가 일부 선각자들이나 지식인들에게만이 아니라 국민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고 있다. 김명수 후보는 5.16쿠데타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만천하에 알림으로써 자신을 비롯하여 자신을 교육부 장관에 임명하려한 박근혜 정권, 그리고 자신을 두호하는 수구언론을 비롯한 수구세력들이 어떠한 성격을 지녔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박근혜 정권 2기 내각의 구성에서 빚어진 인사 참사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러한 점이 국민 속에 각인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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