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간히 북한의 역사 문화유적을 소개하는 <노동신문>이 25일자에서 관서8경의 하나인 명승고적 '연광정(練光亭)'을 해설한 글을 실어 눈길을 끌었다.

▲ 연광정 전경. 크고 작은 두개의 합각지붕을 직각으로 어긋나게 맞물림으로써 기묘한 구조를 이루게 했다. [사진출처-http://wikimapia.org/]

신문에 따르면, 연광정은 평양시 중구역의 대동강 기슭에 자리잡고있다.

연광정 자리는 원래 고구려 시기 평양성 내성의 동쪽 장대터(將臺-, 지휘소)였다. 고려시기 평양성을 고쳐쌓고 1111년 이곳에 누정(樓亭, 누각과 정자)을 세우면서 그 이름을 산수정(山水亭)이라고 했다.

그후 보수도 하고 다시 세우기도 하면서 연광정이라고 고쳐 부르게 됐다.

연광정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막새(기와집 추녀끝을 장식하는 무의가 새겨진 기와)들 가운데는 1596년부터 1860년에 이르는 기간의 연대가 밝혀진 것이 20여개나 있었다.

장방형(직사각형) 평면의 두 누정이 비껴붙은 연광정은 본래 남쪽 채만 있었는데 1573년에 북쪽 채를 잇대어 지었다.

연광정이라는 이름은 전망 경치가 아름다운 누정이라는 뜻인데 '제일누대', '만화루'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지금의 건물은 1670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연광정은 독특한 평면구조를 가진 누정으로서 두개의 다락 건물(누각)을 조금 빗세워 맞물린 것처럼 되어 있다. 연광정의 밑부분은 땅을 파서 돌을 깔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은 다음 지면이 좀 높은 대동강쪽 바위위에는 큰 나무기둥을 세우고 서쪽의 낮은 곳에는 네모돌기둥을 세워 수평을 잡고 그 위에 다락을 세웠다.

지붕은 크고 작은 두개의 합각지붕을 직각으로 어긋나게 맞물림으로써 기묘한 구조를 이루게 했다.

▲ 천정은 시원하게 열린 통천정을 기본으로 하면서 일부에만 우물반자('井'자 모양의 틀에 가운데 네모난 구멍에 넓은 널빤지를 덮은 반자)를 댔다. 연광정에는 전반적으로 화려한 모루단청을 입혔고 대들보같은 데는 비단무늬를 그려놓았다. [사진출처-http://wikimapia.org/]

다락에는 전면에 널마루를 깔고 남쪽에 10단의 넓은 돌계단을 놓아 오르내리게 했다. 천정은 시원하게 열린 통천정을 기본으로 하면서 일부에만 우물반자('井'자 모양의 틀에 가운데 네모난 구멍에 넓은 널빤지를 덮은 반자)를 댔다. 연광정에는 전반적으로 화려한 모루단청을 입혔고 대들보같은 데는 비단무늬를 그려놓았다.

연광정은 이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로 하여 옛날부터 관서8경의 하나로 일러왔다.

연광정 대들보에는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이 글이 여기에 처음으로 씌여진 것은 조선왕조에 명나라의 서화가 주지번이 평양의 경치를 구경하면서 연광정에 올랐다가 그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에 현혹되어 남긴 글이라고 한다.

대동강으로 향한 남쪽 채의 기둥에는 고려시기의 이름난 한 시인이 부벽루에 올라 시를 짓다가 평양의 절경을 노래하기에는 자기의 재능이 너무도 모자람을 탄식하며 붓을 놓고 내려왔다는 일화가 깃들어있는 그의 미완성시가 씌여진 판이 걸려있다.

연광정에는 전설도 많다. 평양과 닻에 대한 전설도 그중의 하나이다.

연광정 바로 아래에는 소(沼)가 있다.여기가 대동강에서 가장 깊은 곳이며 그 속에 큰 닻이 있다는것이다.

옛날부터 평양은 지형이 배모양으로 되어 있고 대동강과 보통강물 위에 떠있는 것 같아서 평양성이 물에 떠내려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연광정 아래에 큰 닻을 걸어두었다는 것이다. 이런 전설들은 다 평양과 연광정의 아름다움으로부터 나온것이다.

연광정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 격멸의 전략전술이 토의되고 이 부근에서 아군이 수많은 왜적을 소멸했을 뿐아니라 김응서와 계월향이 묘한 꾀를 써서 적장의 목을 베었다는 통쾌한 이야기도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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