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시 자남동과 북안동 일대에 있는 한옥마을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북한에서 '국보유적 제1호'로 보호하고 있는 '평양성'을 집중 조명하는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었다.

<노동신문>은 11일 '동방강국의 요새로 위용떨친 평양성'이라는 제목으로 고구려의 수도성이었던 '평양성'의 역사와 구조, 축조기술 등을 상세히 소개했다.

신문에 따르면, '장안성'이라고도 불린 평양성은 "동방의 강대국이었던 고구려의 정치, 군사, 경제적 위력과 높은 과학기술 발전수준, 우수한 건축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삼국통일의 원대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남진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고구려는 427년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때 첫 수도성은 현재 대성산지역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수도방위 등 여러 측면에서 일부 불합리한 점들이 있었다. 이에 고구려는 도시 전부를 성벽으로 둘러 막은 새 수도성을 건설했는데 그것이 바로 평양성이라고 한다.

평양성의 둘레는 약 16km, 성벽의 총 연장길이는 23km, 총 면적은 11.85k㎡에 달했다.

북쪽에는 험한 산 능선과 깎아지른듯 한 절벽으로 이루어진 모란봉이 솟아있고 동, 서, 남쪽의 세면에는 대동강과 보통강으로 자연적인 해자를 이루고있다. 따라서 평양성은 외적의 침입에는 불리하고 방어에는 유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 [사진-노동신문 캡쳐]

왕궁이 자리잡고있던 내성은 을밀대에서 시작해 현재의 만수대와 남산재를 거쳐 대동문에 이르는 넓은 지대를 차지하고 있었다.성은 총 4개의 부분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안산과 창광산, 해방산지역을 포괄하는 중성은 주로 고구려 국가의 중앙 관청들이 자리잡고 있던 행정중심지였으며, 주민들이 살던 지대였던 외성은 중성의 남쪽 벽을 경계로 하여 지금의 평양 중구역 남부와 평천구역일대에, 외곽 방어성인 북성은 을밀대에서 북쪽으로 구축되어 있었다.

현재 평천구역 정평동지구에는 평양성 외성을 보여주는 역사유적이 보존돼 있다.

문헌에는 평양성의 축성시기와 관련해 552년에 성을 쌓기 시작해 586년에 완공됐다는 간단한 기록만이 남아있었으나 근세에 와서 일명 '각자성석'으로 불리는, 글자가 새겨진 성돌들이 발견되면서 성 건설의 단계와 규모 등이 알려지게 됐다.

현재까지 발견된 평양성의 글자가 새겨진 성돌은 모두 6개이다.

여기에는 '기축년 5월 21일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12리는 물구 소형 배수백두가 맡아 쌓았다.', '병술년 12월에 한성 하후부 소형 문달이 쌓았다. 여기서부터 서북쪽으로 가면서 관여하였다.'를 비롯해 성을 쌓은 시기와 규모, 건설감독자의 관직과 이름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 [사진-노동신문 캡쳐]
▲ [사진-노동신문 캡쳐]

성돌에 새겨진 글의 내용을 해석한 데 따르면, 내성은 566년부터 569년 사이에 축조되었으며, 이와 병행해 내성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성인 북성의 축조도 진행되었다. 외성과 중성은 569년부터 약 10년간에 걸쳐 건설되었는데 그 규모는 내성과 북성의 3배정도였다.

성돌에 새겨진 기록 가운데는 '본성은 42년 만에 공사를 끝냈다'는 대목도 있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가 586년에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긴 후에도 여러해동안 공사마감정리 사업 등이 계속 진행되었음을 알수 있다.

평양성은 고구려 인민들의 슬기와 창조적 재능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평양성 건축에는 여러가지 다양하고 우수한 성 쌓기 기술이 널리 도입됐다.

고구려 인민들은 산 능선과 평지, 습지대 등 서로 다른 자연지리적 조건에 맞게 합리적이며 우수한 축성방법들을 받아들였다.

성돌들은 모두 4각추 모양으로 정교하게 다듬어 이용했다. 성벽쌓기에서는 산 경사면인 경우 보통 외면쌓기 방법(성벽의 바깥면 만을 돌로 정연하게 쌓고 안쪽면은 산 능선을 이용하는 방법)이, 평지에서는 양면쌓기 방법(성벽의 바깥 면과 안쪽 면을 다같이 정연하게 돌로 쌓는 방법)이 도입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산 지대에서는 4~5m, 평지대에서는 7~9m였다.

평양성에는 모란봉의 정점에 자리잡고 있는 최승대, 청류벽 위에 있는 청류정, 서북쪽 방향으로 통하는 관문인 보통문, 북쪽문인 칠성문 등이 있다.

평양성의 축조형식은 고려시기는 물론 조선왕조 시기에도 계승되었다.

옹성(甕城, 성문을 엄호하기 위해 성문 바깥쪽에 반원형으로 쌓은 성), 적대(敵臺, 성 에 높게 세워 둔 누대), 치(雉,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하여 성벽 밖으로 여기저기 내밀어 쌓아 놓았던 돌출부), 성가퀴(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 등 각종 방어시설물들이 설치된 평양성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 [사진-노동신문 캡쳐]
▲ [사진-노동신문 캡쳐]

'평양성은 북쪽은 산을 등지고 세 면은 강에 막혔으며 성이 또한 높고 험하여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고 한 역사기록만 보아도 평양성이 얼마나 견고하고 철통같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신문은 고구려 인민들의 창조적지혜와 노력이 깃들어 있는 평양성은 동방의 강대국이었던 고구려의 정치, 군사, 경제적 위력과 높은 과학기술발전 수준, 우수한 건축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길이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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