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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화가의 기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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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1.09.06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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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의 지적행위

어떤 소설가는 `한 명의 화가는 수많은 천재의 시체 위에 서 있다`고 말했다. 좋은 말로 미술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고, 슬프게 말하면 일부분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재능을 살리지 못한다는 말이다. 좋은 선생을 만나지 못하거나 미술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 가장 주된 이유일 것이다.

미술은 결코 쉬운 학문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반 사람들에게 미술을 가르쳐보면 놀라울 만큼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기본기술은 물론이고, 까다로운 수채화, 아크릴화까지 빠른 시간 안에 기술과 감각을 습득하는 것을 보면서 화가인 자신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내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감성이 풍부하고 손재주가 뛰어나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름의 임상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학교미술교육에서 실패한 사람들 중에서 그림을 취미로 배우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80~90%는 미술적 재능이 뛰어났다.

그러나 사람들의 미술적 재능을 확인함과 동시에 어떻게 시체로 변하는지도 확인했다. 미술에 실패하는 것은 형태를 못 잡거나 색채감각이 없거나 재료를 사용하는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게으르고, 책을 보지 않으며, 삶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미술적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현실을 돌아보면 더욱 부끄럽다. 우리나라 미술문화의 수준은 미술공모전 입상을 돈으로 사고 팔 정도로 천박하고, 미술적 재능이 뛰어난 일반 사람들은 전시장 가는 것을 동네 갈비집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그림타령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절대 빈곤에서 이미 벗어났다. 나라가 거덜날 것 같았던 IMF시기에도 사람들은 못 먹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이 먹어 살찌는 것을 걱정했다.

내가 남의 먹는 문제까지 들먹이며 미술을 치켜세우는 것은 정말 미술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감성과 재능이 풍부해도 발전시키지 못하면 소용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586멀티미디어 컴퓨터로 게임이나 하는 것이 안타까운 것처럼 좋은 감성과 재능으로 고작 옷이나 사 입고 화장이나 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나는 사람들이 놀라운 감성과 뛰어난 재능을 보다 좋은 가치를 창조하는데 쓰길 바라지만 현실의 구조는 사람들이 창조능력을 요구하기보다는 소비능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세상 탓으로 돌리는 비겁함도 견제되어야 한다.

좋은 가치를 알고 창조하기 위해서는 감성보다는 합리적인 이성의 힘이 필요하다. 최소한 일년동안 책 한 권을 읽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렇다. 이성은 감성을 보다 정교하고 효율적으로 만들어 준다. 어떤 면에서 미술에 있어 뼈대는 이성이고 치장과 피부와 패션은 감성이다. 뼈대가 없는 예술품은 흐느적거리는 연체동물처럼 말초신경만 건드릴 뿐이다.

미술작품에서 화가의 몫은 70% 정도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나름의 사상과 방법으로 작품을 만들면 감상하는 사람의 정서와 사상을 채워 넣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감상자가 입만 벌리고 있어서는 미술감상이 어렵다는 말이다.

아무리 뛰어난 감성의 더듬이로 작품을 감지해도 꽃한송이도 확인하지 못한다. 미술은 허구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지적행위이자 과정이다. 우리가 예술을 `고도의 지적활동`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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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건/총석정/조선화/90*63/2000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6.15 공동선언 1주년 기념 <북한미술특별전>에 전시된 북한화가 최
상건의 `총석정`이라는 조선화이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 소개된 북한 그림 중에는 가장 최근에 창작된 작품이다. 전시를 관람하면서 나의 시선을 오래 끌었던 작품 중에 하나였다.

이 작품이 관심을 끈 것은 주제가 강하거나 특별한 기법을 사용해서가 아니었다. 2절 정도의 아담한 크기임에도 총석정의 거대함을 느끼게 하는 공간처리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금강산 총석정, 파도와 갈매기, 구름 따위의 소재는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지만 이 작품은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묘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공간이 트이고 눈 맛이 시원한 작품을 좋아한다. 주변에서 보는 작품의 대부분은 평면적이거나 좁은 원근법을 사용해 답답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이런 정서는 확트인 바다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을 그린 최상건은 평양미대를 졸업하고 만수대창작사에 소속되어있는 원로급 공훈미술가이며, 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는 화가이다. 북한의 평가처럼 이 작품은 사람의 감성을 묘하게 휘어잡는 마력을 가졌다.

정적이면서 단단하게 표현된 암벽, 거기에 음영대비에 의한 묵직함을 더했다. 우측의 구름과 갈매기는 가볍고 자유롭게 표현했다. 이 극단적인 대비의 조화가 바로 이 작품의 감상 포인트이다. 또한 우측의 갈매기는 하얗게, 먼 좌측의 갈매기는 검게 표현한 것도 시각의 허점을 파고들어 화면의 원근과 균형을 만들고 있으며, 총석정의 상대적 크기를 부각시켜 거대함을 표현하고 있다.

어찌 보면 기교보다는 기본기에 충실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미술에서 기본기는 표현의 전부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환갑이 넘은 원로작가가 이만큼 힘있는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 사실적인 그림을 피하고, 원색적이거나 추상적인 형태로 빠지는 경향이 대부분이다. 정말 작품세계가 농익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체력의 저하와 집중력의 감퇴라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미술에서 기본기는 운동선수의 기초체력과 맞먹는 것이다. 또한 기본기는 오랜 시간 지루하고 반복적인 습작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지만 손을 놓으면 쉽게 감을 잃어버린다.
정정하고 쩌렁쩌렁한 노화가의 기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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