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겸 / 동국대학교 북한학 석사

 

▲ [그림1] 동북방언권과 육진방언권
지난 연재에서 동북방언 중 하나인 함경도방언을 다루었는데, 이번에는 함경도방언과 같이 동북방언에 속하면서도 다른 특성을 가진 ‘육진방언’을 살펴본다. 여기서 ‘육진’은 조선 세종시기 영토 방어를 위해 설치한 6개의 진(경원진, 회령진, 종성진, 온성진, 경흥진, 부령진)을 뜻한다. 육진지역은 두만강을 접하고 있는 한반도 최북단에 자리 잡고 있다(그림 1의 표시 지역). 이러한 지리적 특성과 함께 육진지역은 독특한 역사와 방언을 지니고 있다.

* 육진의 구획과 명칭은 북한 건국 이후 변화하여, 현재 각 군과 시(새별군, 온성군, 은덕군, 부령군, 회령시, 라선시, 청진시)로 바뀌었다. 회령, 온성, 부령의 명칭은 육진의 것이 온존, 6세기가 지난 후에도 살아남은 것이다.

육진지역의 역사와 독특한 지역성

▲ [그림2] 조선, 고려의 국경 및 4군 6진
자료: http://study.zum.com/
육진지역은 고구려의 영토였지만, 이후 한민족의 영토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고, 때로는 다툼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 한민족과 여진족이 끊임없이 다투었으며 다양한 주민들이 떠나고 모였던 곳이 육진지역이다. 한반도의 최북단·접경 지역이자 변방 지역이라는 지리적 ‘숙명’을 지닌 것만 같다.

고려시기 육진지역은 주로 여진족의 무대였는데, 그들의 끊임없는 침범에 고려는 이들을 정벌하고 이 지역을 수복하고자 했다. 12세기 초 윤관을 수장으로 하는 고려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고 ‘동북9성’을 축조하였다(각 성들의 위치에는 논란이 있으나 육진의 일부를 포함한 것으로 보임). 그리고 약 7만여 호(戶)에 이르는 주민들을 이주시켜 안정을 꾀하였지만, 계속 되는 여진족의 화친 요구에 동북9성 지역을 1년 만에 여진족에 돌려주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에 와서도 이 지역의 여진족과 끊임없이 마찰이 일어났는데, 세종 때에 이 지역을 점령하고 국경을 굳건히 했다. 김종서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여진족을 두만강 이북으로 몰아냈으며, 4군과 육진의 요새를 건설한 것이다. 이후 비로소 육진지역은 조선의 영토로서 안정화되었다.

조선은 척박하고 거주민이 적은 이 지역을 안정시키고 국경을 지키기 위하여 각 지역으로부터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이주민들은 군인과 장정들 위주였으며, 경상도·전라도·강원도 등 전국 각지에서 선발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육진지역에 이주민들과 기존의 토착민, 다른 민족(여진족, 몽골인 등)이 함께 살게 되었다. 육진 설치 후로 이 지역은 조선의 영토로서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며, 고유한 지역성과 방언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한양으로부터 거리가 멀고 교통이 불편해 다른 지역과의 왕래가 적었던 것은 육진지역의 고유성을 더욱 심화시켰을 것이다. 육진지역의 고유성에는 다민족의 혼재와 변방의 특성이 투영·혼합되었다.

육진방언의 고유성과 현재

지난 연재에서 함경도 방언을 다루었는데, 육진방언은 함경도방언과 많은 유사성을 보이면서도 중요한 차이점들을 갖고 있다. 방언연구자들은 육진방언이 특히 고대 언어의 음성 및 음운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훈민정음 창제 시에 존재했으나 현재는 사라진 ‘ᅘ’, ‘ᄫ’, ‘ᅀ’, ‘∙’과 같은 음의 흔적이 육진방언에 남아 있다. 그리고 ‘ㅚ’가 없는 대신 ‘ㅙ’만 있기 때문에 ‘왜’(오이), ‘쇄’(소), ‘왜우다’(외우다)로 각각 발음한다. 또한 함경도 방언과 달리 육진방언은 자음과 이중모음 연결이 자유로워서 ‘땨르다’(짧다), ‘둏다’(좋다), 뎌것(저것) 등으로 발음한다.

각 방언에는 지역의 경제생활과 자연지리에 따라 발전된 독특한 어휘들이 있기 마련이다. 동북방언권에서는 토양이 척박하고 농지가 부족하여 농지와 보습(쟁기, 가래에 끼우는 넓적한 쇠)의 종류를 구분하는 독특한 어휘들이 있다. 육진방언에는 집 안에 추운 날씨에 적합한 시설들, 즉 ‘정주간’(화덕을 설치한 부엌 겸 거실)과 ‘등디’(화덕)과 같은 단어들이 쓰인다.

그리고 이는 필자의 추측이지만, 지역 토착민, 세종시기 이주민들과 다른 민족들(여진족과 몽골인 등)이 섞여 살며 타민족 언어가 육진방언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함경도방언에도 여진어와 만주어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국경에 위치한 육진지역은 그 영향력이 더욱 컸을 것이란 짐작이다. 육진지역에는 8.15 광복당시에도 여진족 마을이 있었고, 1936년에는 약 4천 명의 여진인이 거주했다고 한다.

이렇게 육진방언의 특징(고대 언어의 흔적, 경제생활이 반영된 어휘들, 타민족 언어의 영향) 몇 가지를 살펴보았는데, 이는 지역 특유의 자연조건과 역사가 투영·혼합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을 파헤치다 보면 “이 좁은 지역이 어떻게 하나의 방언을 갖게 되었을까?”(방언은 하나의 체계적 언어이다), 그리고 “육진방언의 특징과 그 원인은 무엇일까?”(방언학자들은 육진방언 특이성에 주목한다)라는 의문이 풀릴 것 같다.

1996년의 한 현지답사 연구결과에 따르면, 육진방언은 아직까지도 그 특징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고 교통·통신이 발전함에 따라 방언이 약화될 수 있음을 생각하면, 그 생명력이 참 질기다. 그런데 변방지역의 언어로서 육진방언은 현재 또다시 변화의 순간을 맞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 라선시, 청진시를 중심으로 중국·러시아와의 대규모 경제협력 사업이 진행 중인데, 그 과정에서 외국인들과의 교류·접촉이 증가할 것이다. 육진 지역에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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