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9월 6.15산악회 도봉산 산행에서(오른쪽 두 번째) 양원진, 박희성, 김영승 선생 등과 함께. [사진 - 류경완]
명백한 전쟁포로임에도 선생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지지 않고 54년 12월 청주형무소로 옮겨졌다.

어느 날 간수가 사동 복도에서 한 사람씩 이름을 불렀다. 호명된 수형자들이 패통을 치자(감방 안에서 밖으로 튀어나와 복도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아무개, 특별조치령 몇 조 위반, 징역 10년, 아무개 징역 5년...” 판결을 내렸다. 재판 없는 판결, 자신들이 무슨 죄로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지, 위반했다는 특별조치법의 조항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다.

무법천지의 세상, 적극적인 항의도 할 수 없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위에서 하라고 하니까 그랬을 텐데...”
병사생활 또한 밥알까지 셀 수 있을 정도로 열악해서 환자가 죽어도 알리지 않고 죽은 자의 배식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엄청난 구타와 고문으로 피를 토하고 결핵 판정을 받은 선생은 55년 3월 치료시설이 있던 마산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거기서도 투약량을 줄여 수감자들과 같이 단식투쟁을 하다 짐승처럼 진압당하고 수갑에 채워져 독방 생활을 했다.

57년 다시 전주형무소로 옮겼다. 이곳에서 지금까지 두터운 동지애를 나누고 있는 김교영 선생과 순창 출신의 조기창 동지를 만날 수 있었다. 조기창 동지의 부인이 면회 다녀갈 때 맛보았던 미숫가루가 평생 고마움으로 남아 있다. 목수 일도 열심히 배웠다.

처음에는 합방을 해 줘 동지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도 나누고 간수들이 신문도 넣어 주었다. 보름 정도 징역 사는 것 같지 않았지만 그것이 공작이었다. 갑자기 한 명씩 끌어내어 구타하며 전향공작을 시작했다. 선생이 ‘나는 인민군이다. 전쟁포로가 무슨 전향이냐’고 버텼지만 고문기술자들은 백지전향서에다 실신한 선생들의 지장을 강제로 찍어버렸다. 잊을 수 없는 58년 ‘전주교도소 전향공작사건’이었다.

반발이 이어지자 59년 또 목포교도소로 이감, 4.19와 5.16을 맞는다. 쿠데타 정권은 전향서를 쓰고 형기의 절반 이상 산 사람은 풀어주라는 특별사면령을 내렸다. 61년 10월 1일 선생은 7년여 징역 끝에 37세로 출소했다. 전주의 그 가짜 전향서 때문에 반공을 국시로 내건 군부 정권에 의해 풀려난 것이다. 훗날 테러를 대비하여 소지한 특별사면장은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 1972년 재혼한 반금숙 님과, 74년 선생의 모습(당시 50세). [사진제공 - 유기진]
출소 후 목포 갱생보호소에 의탁해 몇 달을 머물렀다. 거기서 한 할머니를 알게 되었는데 돌아가시기까지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드렸다. 얼마 후 서울 갱생보호소로 옮겨 남산 KBS 방송국 건설 현장에서 일하게 되지만 건설업자는 노임을 떼먹고 도망가 버렸다. 품삯을 달라고 시위했지만 소용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수소문 끝에 동두천의 두부공장에 취직했다. 당시는 인민군 출신 출소자들이 백주에 지프차로 연행되어 행방불명되는 일이 잦을 때였다. 몇 달 안 되어 기관원들이 찾아왔지만 군부대에 납품하던 공장의 최 사장이 ‘내가 책임질 테니 그 사람 손대지 말라’고 막아 나섰다.

“처음 공장에 취직하니 사람들이 축축한 숙소에서 신발을 신은 채 목침 깔고 앉아 고스톱을 치고 있더군요. 부엌도 엉망이고. 혼자 깨끗이 청소하고 도배까지 하니 소문을 들은 사장이 와서 둘러보고는 나를 눈여겨보고 있었던 거지요. 나도 끌려갔더라면 그 때 죽었을 겁니다.”

주위를 탄복케 한 특유의 성실성이 생사를 가른 경험 때문일까? 등산 뒤풀이나 여러 모임에서 선생이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우리는 모든 걸 잘 해야 합니다. 연설도 노래도 춤도. 무엇보다도 군중들 속에서 실천으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조건에 불만을 가지면 안 돼요. 더 나은 조건은 언제나 내 자신이 만들어야 합니다.”

사장의 인우보증으로 위험은 넘겼지만 ‘미혼의 신분이면 기관에 당할 수 있다’는 공장장의 중매로 그 집 가정부로 일하던 박초순 님과 62년 결혼했다. 이후 염천교와 청량리 일대에서 갖은 일을 겪은 끝에 미아리에 작은 구멍가게를 낼 수 있었다.

세 아들을 키우며 부인은 밤늦도록 가게 일을 보고 선생은 연탄을 배달했다. 한 장을 배달하면 1원이 남는 달동네 구석구석, 선생은 지게에 20장씩 져 나르며 동네에서 따돌림을 받지 않기 위해 성심을 다했다. 하루 매상이 당시로는 큰 돈인 3천 원이 될 때도 있었다.

그러기를 8년, 선생에게 다시 불행이 닥친다. 과로가 겹친 부인이 병을 얻은 것이다. 선생은 간병과 치료를 위해 이후 40년 간 이어지는 택시운전에 나서지만 부인은 결국 71년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딸 욕심에 얻은 늦둥이, 무리한 모유 수유가 화근이었다.

돌을 갓 넘긴 딸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어 덴마크로 입양 보내야 했다. 데려간 곳에서는 편지가 한 번 오고 연락이 끊어졌다. 언젠가 운전 중 라디오 뉴스에서 덴마크 입양아들이 연세대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행여 있을까 찾아갔지만 일행 중에는 없었다. 며칠 뒤 다시 가서 간곡히 수소문을 부탁했지만 지금껏 아무 소식이 없다.

이듬해 처제의 중매로 선생은 반금숙 님과 재혼했다. 일곱 살 차이 부인은 살뜰한 내조로 아들 셋을 훌륭히 키우고 다섯 손주까지 두었지만 지금은 건강 악화로 동두천 요양병원에서 투병 중이다.

신혼 초 운동을 하다 다친 발목을 제 때 치료하지 못해 이상비대증과 탈골로 번졌고, 그간 10여 차례의 큰 수술을 받아야 했다. 택시를 몰아 병원비를 마련하고 정성을 다해 간병했지만 병원의 부인이 ‘언제 집에 가나?’ 물을 땐 더 잘 해 주지 못한 회한의 자책으로 수심만 깊어 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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