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6월 양심수후원회 민통선 평화기행, 파주 북한군-중국군 묘지에서 잔을 올리는 선생(당시 88세). [사진 - 류경완]

1950년 전쟁이 터졌다. 선생은 개성에서 확장한 조선인민군 9사단에 편입되어 파주를 거쳐 서울로 입성한다. 38선에서 오랫동안 고생한 사단은 부대를 확장, 정비하느라 지금의 용산 미군기지에 주둔하면서 수도보위부대로 작전을 수행했다. 포진지를 구축하고 신병을 훈련시키다 미군의 첫 폭격도 받았고, 이후 정릉 부근으로 이동하며 1중대장으로 승급했다.

그 사이 낙동강 전선이 교착되면서 9사단도 8월초 낙동강 2차 도하작전에 참가하게 된다. 폭격을 피해 거창까지 야간이동으로 일주일, 전조등을 켤 수 없어 흰 옷을 입고 행진하는 병사들을 기준 삼아 포차량을 이송했다.

포성이 진동하는 낙동강을 도하하여 ‘푸른 고지’로 진격하던 중 갑작스런 미군 비행기의 맹폭을 맞아 산비탈에 몸을 숨겼다. 온종일 32대의 비행기가 교대로 한 순간 쉴 틈도 없이 퍼부어 부대의 포가 거의 궤멸되었다. 당시 인민군은 따발총을 가지고 있었고 군관은 권총 정도를 지닌 것이 전부였다.

전선까지 어떻게 옮겨온 포탄인데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었다. 연대장이 비장한 명령을 내렸다.
“남은 포탄을 무조건 고지를 향해 작렬시켜라.”
비행기의 계속되는 폭격 속에 부서진 포를 세워 포탄을 발사하던 순간은 어떤 영화 속의 장면보다 치열했다.

이후 작전참모와 함께 인근의 야산고지로 진격하던 중 맹렬한 중도사격을 받고 포수와 분대장이 쓰러졌다. 포수 대신 직접 포를 쏘던 선생도 왼쪽 발목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진다. 64년이 지난 지금도 훈장처럼 남은 상처가 구순의 선생이 인민군 중대장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출혈로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다시 낙동강을 건너 남원의 야전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산을 넘으면 온 산하 큰길에 시신이 널렸고 수송차량은 덜컹거리며 힘겹게 나아갔다. 나중엔 포병중대 80명과 보병 120명 중 4명만이 생존해 있었다. 다리를 절단한 경상도 출신 한 의용군이 “누가 전쟁을 일으켰나? 내 다리, 내 다리”하며 울부짖던 소리가 아직 귀에 쟁쟁하다.

▲ 2013년 10월 6.15산악회 도봉산 등산에서(앞줄 왼쪽 두 번째). [사진 - 류경완]

9.28 후퇴로 수송로가 막히고 국군이 전주까지 들어오자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만 알아서 피해야 했다. 작대기를 짚고 큰 길로 나와 우마차를 타고 임실까지 가지만 폭격으로 철로는 끊겨 있었다. 기총사격으로 뒤집힌 마차마저 밭고랑에 처박혀 간신히 한쪽 발로 빠져나왔다.

하늘의 도움으로 이동 중이던 전북도당 소속 트럭을 타고 순창 가까이 갔다가 국군이 근접했다는 소식을 듣고 회문산 500고지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부상한 발목 때문에 더 이상 이동하지 못하고 산에서 일주일을 혼자 버텨내야 했다. 상처가 썩어가면서 냄새를 피우자 까치와 까마귀들이 몰려들었다. 진흙을 짜고 아침이슬을 훑어 마시며 연명하다 더는 지탱할 수 없어 앉은 상태에서 손으로 밀며 필사적으로 산을 내려왔다.

금산골의 한 부락에 도착, 할머니 혼자 사는 집으로 기어 들어갔다. 할머니는 자식을 인민군에 보냈는데 소식이 없다며 정성껏 밥상을 차렸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밥인지 먹다가 밥에 취해 잠이 들었다.

이후 선생은 전북도당의 도움을 받아 간호사들이 있는 의무대에서 치료를 받고, 쌍치전투로 유명한 가막골로 보내진다. 그곳엔 지금의 통일광장 전 대표인 임방규 선생이 활약하고 있었으며, 성냥과 납 등으로 탄약을 제조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치료를 받은 후 다시 회문산으로 돌아오지만 상처 때문에 자유로운 활동은 할 수 없어 문화부의 직책을 맡았다. 부대는 남원의 대규모 군단급 토벌대에 계속 밀리며 산개하게 된다. 지금도 선생은 다친 다리 때문에 빨치산 투쟁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동지들에게 늘 미안하다 한다.

1953년 7월 휴전 후 일부는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일부는 지구대별로 활동하게 된다. 선생은 전북 성수산으로 이동하여 활동하던 54년 1월, 인민군 분대장 출신으로 지구대장을 맡고 있던 이인걸의 배신으로 여성동지 3명과 함께 체포된다. 이인걸이 지서에 투항하여 토벌대와 같이 산에 올라오는 것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훗날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죽음을 당한다.

선생은 남원 임시수용소를 거쳐 광주 포로수용소(현 전남대 병원)로 보내진다.
“나는 강제수용소에 들어갈 때까지 인민군 정복을 벗지 않았어요. 산에서 옷이 다 헤져 완전한 복장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인민군 복장을 하고 있었고, 모자도 하나 새로 만들어 쓰고 있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나를 인민군 포로 취급했습니다. 취조하는 형사들도 상당히 후대하면서 ‘이제 고생은 끝났다. 수용소에 가게 되면 머잖아 송환되어 올라갈 것이다. 그동안 수고 많이 했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인민군들과 수용되어 있다가 보름쯤 지나 다시 불려갔다. 그 때는 다짜고짜 엄청나게 구타를 하고 무릎을 꿇리더니 총으로 위협하며 산에서의 활동을 다시 취조했다. 정규군이 아닌 빨치산으로 몰아 처형하기 위해서였다. 밀고자 이인걸도 빨치산 대대장을 했다는 혐의로 사형시켜 버렸다.

당시 수용소에서는 맞거나 굶어서, 또는 질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왔다. 여기서 선생은 인민군 부연대장이었던 이욱(본명 이성욱) 동지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보위성 직속 포병대대장으로 활동했고 동향이라 선생을 배려해 주었다 한다. 그러나 정작 이욱 동지 본인은 포로수용소 소장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유책을 거부하고 사형당하고 만다.

<계속>

(수정, 25일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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