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지더라도 주한 미 대사직은 미국 정부 전체에서 가장 힘들면서도 보람찬 보직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역대 주한 미국대사에서 가장 한반도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온 도널드 그레그 전 대사는 당시를 회고한 글에서 이같이 밝혔다.

한국의 현대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주대한민국(한) 미국대사는 그 비중에 비해 실제로 알려진 내용들은 빈약한 편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측근으로 5월 1일 차기 한국대사로 내정된 마크 리퍼트 국방장관 비서실장도 우리에겐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17일 상원 외교위원회 인준청문회에서 쏟아낸 그의 강성 발언들로 인해 새삼 주한 미국대사에 대한 우려와 관심을 낳고 있다.

<역대 주한 미국대사>

대수

주한 미국대사

임기

미국 대통령

제1대

존 무초
John J. Muccio

1949.4.20~1952.9.8

트루먼(민주)

제2대

엘리스 브리그스
Ellis O. Briggs

1952.11.25~1955.4.12

아이젠하워(공화)

제3대

윌리엄 레이시
William S.B. Lacy

1955.5.12~1955.10.20

아이젠하워(공화)

제4대

월터 다울링
Walter C. Dowling

1956.7.17~1959.10.2

아이젠하워(공화)

제5대

월터 매카너기
Walter P. McConaughy

1959.1017~1961.4.10

아이젠하워(공화)

대리

마셜 그린
Marshal Green

1961.4~1961.7

케네디(민주)

제6대

새뮤얼 버거
Samuel D. Berger

1961.6.27~1964.7.10

케네디(민주), 존슨(민주)

제7대

윈스럽 브라운
Winthrop G. Brown

1964.8.14~1967.6.10

존슨(민주)

제8대

윌리엄 포터
William J. Porter

1967.8.23~1971.8.18

존슨, 닉슨(공화)

제9대

필립 하비브
Philip C. Habib

1971.10.10~1974.8.19

닉슨(공화)

제10대

리처드 스나이더
Richard L. Sneider

1974.9.18~1978.7.21

포드(공화), 카터(민주)

제11대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니어
William H. Gleysteen, Jr

1978.7.24~1981.6.10

카터(민주)

제12대

리처드 워커
Richard L. Walker

1981.8.12~1986.10.25

레이건(공화)

제13대

제임스 릴리
James R. Lilley

1986.11.26~1989.1.3

레이건(공화)

제14대

도널드 그레그
Donald Gregg

1989.9.27~1993.2.27

조지H.W.부시(공화)

제15대

제임스 레이니
James T. Laney

1993.11.2~1997.2.5

클린턴(민주)

대리

리처드 크리스텐슨
Richard A. Christenson

1996.2~1997.12

클린턴(민주)

제16대

스티븐 보즈워스
Stephen W. Bosworth

1997.12.15~2001.2.10

클린턴(민주)

제17대

토머스 허버드
Thomas C. Hubbard

2001.9.12~2004.4.17

부시(공화)

제18대

크리스토퍼 힐
Christopher R. Hill

2004.9.1~2005.4.11

부시(공화)

제19대

알렉산더 버시바우
Alexander R. Vershbow

2005.10.17~2008.9

부시(공화)

제20대

캐슬린 스티븐스
Kathleen Stephens

2008.10.6~2011.11

부시(공화), 오바마(민주)

제21대

성 김
Sung Kim

2011.11~2014.8(예정)

오바마(민주)

* 미국대사관 홈페이지위키백과 참조 재작성

주한 미국대사는 1949년 4월 20일 신임장을 제정받은 무초 대사를 시작으로 현 대사인 성김 대사까지 21대를 이어오고 있다. 물론 미국대사의 역사는 조선 말기인 1883년 루시어스 푸트 특명공사 겸 전권공사로부터 시작되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1948년 이후 대사(Ambassador) 명칭을 사용한 때부터를 기준으로 삼는다. 마셜 그린과 리처드 크리스튼슨은 부대사로 근무하다 대리대사를 맡았지마 정식 대사로 임명되지는 않았다.

그린 대리대사는 61년 5월 16일 새벽 3시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인 매그루더 대장으로부터 전화를 통해 군사쿠데타 소식을 처음으로 들었고, 글라이스틴 대사는 79년 10월 27일 새벽 3시 역시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던 위컴 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박정희 대통령의 유고 사실을 알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과 갈등빚은 미국 대사들

역대 대사들은 아무래도 본국 정부의 성격과 한국 정부의 성격에 따라 한국 정부와의 협력과 갈등을 겪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석방해 미국을 당황케 하는 등 미측과 갈등을 빚었고, 52년 7월 ‘부산 정치파동’ 이후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 제거를 위한 ‘에버레디 작전’(Ever ready operation)을 구상하기도 했다. 다만, 한국전쟁 기간에는 주한 미국대사 보다는 주한 미군사령관의 영향력이 훨씬 강했고 이 작전의 수립도 주한 미군사령관이 주도했다.

미국의 영향력이 압도적이던 박정희 정권에서 민주당 케네디 정부가 임명한 버거 대사는 ‘민정 이양’을 재촉하며 박정희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이후 브라운 대사와 포터 대사는 이미 권력을 굳힌 박정희 대통령과 한일국교 정상화와 한국군 월남파병 등 실익을 챙기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포터 대사는 ‘닉슨독트린’의 등장으로 남북대화와 주한미군 감축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맡아야 했다.

하비브 대사는 72년 7.4공동성명 직후 10월 유신체제가 시작되면서 한.미 간 갈등에 직면했으며, 73년 8월 일본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은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지일(知日)파인 스나이더 대사는 박동선 사건과 민주화운동으로 박정희 정권과 갈등을 빚었지만, 카터 대통령의 임명을 받고 부임한 글라이스틴 대사는 보다 본격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과 핵개발 의욕을 저지해야 했다.

주한 미국대사가 본국으로부터 항의의 표시로 소환당한 경우, 정권이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58년 ‘2.4 국회보안법 파동’에 항의의 표시로 다울링 대사를 한달간 소환했고, 이후 이승만 정권은 4.19혁명으로 무너졌다. 카터 대통령은 79년 10월 6일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등을 이유로 글라이스틴 대사를 열흘간 소환했고, 그라이스틴 대사가 복귀한 10월 16일 불과 열흘 뒤에 박 대통령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살됐다.

돋보이는 그레그와 힐 대사

이례적으로 공직을 한 번도 맡은 적이 없었던 워커 대사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출신의 보수학자로 공화당 레이건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전두환 군사정권과 호흡을 맞췄고, 역시 레이건 대통령이 임명한 CIA 출신 릴리 대사는 87년 6월 항쟁과, 서울 올림픽 등 굵직한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함께 했다.

그러나 그레그 대사는 공화당 부시 대통령의 임명을 받았지만 노태우 대통령의 남북기본합의서.한반도비핵화선언 채택과 북방정책에 호흡을 맞췄다. 그는 퇴직 후에도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창립.운영하면서 북한을 직접 방문하는 등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가장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앞서 그는 박정희 정부 시기 CIA 한국지부장으로서 김대중 납치사건과 최종길 교수 사망사건 등에서 한국 정부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고, 대사직 퇴직 후에도 특히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호응해 남북을 오가며 정력적으로 활약했다.

레이니 대사는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대통령과 임기를 거의 같이 하면서 94년 1차 북핵위기 당시 카터 전 대통령 방북을 주선했으며,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정부 시기에는 보즈워스와 허버드 대사가 재직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참여정부 시대가 열리자 허버드 대사와 힐 대사는 기존 대사들보다는 훨씬 개방적인 행보를 보여줬다.

허버드 대사는 진보적인 시민사회단체와의 간담회에 참석해 스스로를 ‘반미주의자’라고 소개한 한 단체의 활동가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새로 등장한 인터넷신문들의 연대체인 한국인터넷기자협회 대표단을 처음으로 미 국무부 연수 프로그램에 초청하는 등 달라진 행보를 보여줬다. 힐 대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인터넷 카페를 열고 네티즌과 직점 온라인 채팅을 갖는가 하면, 진보단체 초청 토론회에도 스스럼없이 참석했다.

이후 힐 대사는 아태담당 차관보로 승진해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를 맡아 9.19공동성명을 탄생시킨 주역 중 한명이 됐다. 공화당 조지 부시 대통령 시기의 6자회담 수석대표였음에도 불구하고 힐 차관보는 한국의 참여정부와 호흡을 맞춰 역사적인 9.19공동성명을 일궈낸 것이다.

버시바우 대사는 경력에 비해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으며, 최초의 여성대사로 부임한 스티븐스 대사는 이명박 정부의 한미동맹 강화 정책으로 무난히 임기를 마쳤을 뿐이다.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최초의 한인 2세 출신의 성김(본명 김성용) 대사 역시 보수적인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대과 없이 임무를 수행했고, 오는 8월 임기를 마치면 6자회담 수석대표인 대북정책 특별대표로 승진할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형 군인’ 마크 리퍼트 내정자

제22대 주한 미국대사로 내정된 마크 리퍼트(41세) 국방장관 비서실장은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시절부터 외교안보정책 수석보좌관으로 일해온 측근으로, 대사로 부임하게 되면 최연소 대사로 기록될 전망이다.

그는 1기 오바마 정부에서는 NSC(국가안전보장회의) 비서실장과 대통령 외교안보 부보좌관을 역임했으며, 2기 오바마 정부에서는 국방부 아태담당 차관보(대리)와 국방장관 비서실장을 맡았다.

최근 주로 국방부에서 일해온 그는 한.미.일 3각 군사동맹을 완성해 대중국 포위망을 구축하는데 앞장서고 있으며, 일본의 집단적자위권 보유 추진을 지지하는 등 동북아 신냉전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인물로 꼽히고 있다. 특히 한.미.일 군사동맹 구축을 위해 한.일 관계 개선을 주요한 사명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귀추가 주목된다.

5년간 리퍼트 지명자를 정책보좌관으로 뒀던 민주당 패트릭 리히 상원의원은 지난 17일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리퍼트 지명자를 “진정한 ‘시민형 군인’(citizen-soldier)의 표상”이라고 소개했다. 그가 자원입대해 해군 장교가 됐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군복무를 하는 등 사실상 ‘군인’의 자질이 강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리퍼트 내정자는 청문회에서 “만일 인준되면 한국 정부와 협의해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추구하고 핵심 기술의 확산을 막기 위한 노력을 전개해나갈 것”이라고 말해 북핵 문제 해법에 있어 6자회담 초기인 2003년 미국이 강경하게 들고 나왔던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폐기)를 다시 꺼내들었다.

또한 “커티스 스캐퍼로티 주한미군사령관 등과 긴밀히 협의해 대북 억지를 강화하고 주한미군 2만8천500명이 필요할 경우 오늘 밤이라도 싸울 수 있도록 준비태세를 갖추게 만들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북한에 대한 압박과 제재를 지속하겠다”고 ‘군인’다운 공언을 내놓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의 영향력 있는 측근인 그가 오바마와 워싱턴이 북핵문제에 관심을 돌리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하고 있지만, 경험이 부족한 ‘시민형 군인’이 무리수를 둘 수 있다는 강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또한 그가 ‘젊은 실세’임에는 틀림없지만 미국 명문가 출신인 캐롤라인 케네디 주일 대사와 거물 정치인 출신인 맥스 보커스 주중 대사와 격이 너무 차이가 난다는 지적도 있다.

주한미군사령관, CIA 한국지부장과의 공조

역대 주한 미국대사에는 릴리와 그레그 대사 등 CIA(중앙정보국) 출신들이 꽤 있고, 국무부가 관할하는 대사관과는 다른 계통으로 CIA가 관할하는 CIA 한국지부도 개설돼 있다. 1952년 존 레이몬드 하트 지부장을 시작으로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도 80년대 초반 이 자리를 거쳐갔으며, 한국계 여성인 셀린 워넬(본명 한성옥)도 2000년대 중반 지부장을 맡았다. [역대 CIA 한국지부장 보기]

참고로 CIA 한국(서울)지부는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통상 미국대사관 지역조사과(Office of Regional Study)로 활동하고 있다. ‘주한미국대사관 특별보좌관 겸 지역문제 담당참사관’을 맡는 지부장 역시 비공개이지만 2007년부터 지부장을 맡았던 데이비드 마스던의 사진이 미 국방부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주한 미국대사는 현지에서 주한 미군사령관과 CIA 한국지부장과의 관계를 잘 정립해 도움을 받는 일도 중요하다. 주한 미군사령관은 4성 장군이 맡고 유엔군사령관과 한미연합사령관을 겸직한다. [역대 주한미군사령관 보기] 2년 임기로 알려진 CIA 지부장도 한국이 중요한 동북아 거점인 만큼 대체로 거물들이 거쳐갔다.

주한 미국대사직을 잘 마무리한 경우 대체로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등으로 승진한 경우가 많아 주한 미국대사는 외교관들이 선망하는 자리 중의 하나이다. 이미 경력을 많이 쌓은 비중 있는 인물이 임명되는 중국, 러시아 대사나 대통령에게 정치후원금을 많이 낸 순서로 임명되는 유럽지역 대사와는 달리 주한 미국대사는 외교관이라면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드문 자리 중의 하나인 셈이다.

실제로 주한 미국대사는 한반도에서 전쟁 위기를 막거나 한국의 민주화가 진전되는데 기여한 경우도 가끔 있었지만 정치공작과 독재정권 편들기로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한반도에서 미국의 이익을 관철하는데 앞장서는가 하면, 대북 강경책으로 한반도 위기를 격화시키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미 상원 인준청문회까지 거치고 있는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지명자의 운명은 오바마 대통령과 그 자신이 이후 한반도에서 실행하는 정책에 따라 결정될 것이며, 최연소 대사가 될 그가 2년 남은 오바마 2기 정부 이후 어떠한 직책을 맡게 될지도 관심거리 중의 하나이다.

한편, 주한 미국대사는 대통령으로부터 지명받으면 상원 청문회를 거쳐 인준받아야 하고, 아그레망(주재국 임명동의) 절차까지 마무리하는데 보통 수개월이 걸린다. 주한 미국대사는 서울 세종로에 있는 주한 미국대사관 집무실에서 일하고 하비브 대사 시기 건축된 서울 정동 소재 '하비브 하우스'에 거처한다.

(수정,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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